[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버려 쓰레기로 만들면 뒤탈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왜 쓰레기 이야기나면요.
지난 26일 오후, 저는 찡그린 채 퀴퀴한 냄새로 가득 찬 쓰레기장에 들어섰습니다. 쓰레기더미 사이로 ‘세월호’란 글자가 비치는 순간 후각은 제쳐두고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세월호’란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이었죠.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위치한 국립국제교육원. 교육부가 이달 초순부터 역사교과서 국정화 태스크포스(TF) 팀을 꾸린 곳입니다. 이 건물 주차장 구석에 있는 16.5㎡(5평) 남짓의 야외쓰레기장엔 100리터 정도로 보이는, 제 허리까지 오는 쓰레기봉투 세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중 두개는 유별났습니다. 누가 발견할세라 구석에 놓인 쓰레기봉투에는 파쇄된 문서들이 빼곡했습니다. 가로 1㎝, 세로 0.5㎝ 정도로 잘게 잘린 종이들엔 글자가 3~4자씩 담겨 있었고요. ‘틀린 그림 찾기’가 특기인 저는 땅에 엉덩이를 붙이고 퍼즐 맞추기를 시작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사회부 24시팀 수습기자 현소은이라고 합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이는 박근혜 정부 덕분에 수습기자들의 본래 활동 무대인 경찰서보다 교과서 국정화와 관련된 현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입사 후 첫 뻗치기(취재 대상을 무작정 기다리는 행위를 일컫는 은어)의 기회를 제공해준 한밤의 소동극에 대해 얘기해보려 합니다.
지난 25일 저녁 8시께였습니다. <한겨레>를 비롯한 취재진과 도종환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특위 위원장 등 야당 의원 4명이 국립국제교육원을 방문했습니다. 도종환 특위 위원장이 입수한, ‘박근혜 정부가 9월 말부터 이곳에 비공개 티에프 사무실을 차렸다’는 제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취재진 등이 등장하자마자 티에프 직원들은 문을 굳게 걸어 잠갔고, 일부는 내빼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건물 바깥에서도 진풍경이 펼쳐졌습니다. 경찰이 최대 300여명까지 동원돼 모든 출입구를 지켰고, 심지어 건물 뒤편 모든 창문에 경찰 한명씩이 배치됐습니다. 집회·시위 현장이 아님에도 난데없이 채증 카메라가 두대나 등장했습니다. 모든 창문엔 블라인드가 단단히 내려져 있어 건물 진입은커녕 내부를 들여다보기도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손전등을 건물 2층까지 비춰보아도 묵묵부답. 결국 누구도 들어가지 못했고,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동이 트자 어버이연합 등 보수단체 ‘어르신들’이 현장으로 들이닥쳐 국정화 지지 기자회견을 열면서 현장이 어수선해졌습니다. 어르신들이 경찰, 기자, 국회의원 가리지 않고 쏟아내는 호통을 피해 건물 구석의 쓰레기장으로 발을 옮긴 겁니다.
베일에 꽁꽁 싸인 티에프의 실체를 유추해볼 만한 실마리를 찾은 것도 바로 이 쓰레기장에서였습니다. 파쇄 문서더미에는 교육부가 말한 ‘정상적인 업무 수행’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 빼곡했습니다. <한겨레>를 비롯한 지상파 방송사 이름들은 물론, 인터넷 언론이나 커뮤니티 이름도 등장했습니다. 티에프 구성·운영계획안에 등장하는 ‘언론 동향 파악 및 쟁점 발굴’과 연결되는 대목입니다. <허핑턴포스트>, <뉴데일리> 등 인터넷 언론의 이름들은 1번부터 160번대까지 목록 형태로 정리돼 있었습니다. 또 ‘좌편향’ ‘종북좌파’ 등의 단어와 ‘전교조’부터 ‘어버이연합’ ‘자유총연맹’ ‘고엽제전우회’ 같은 보수단체 이름도 하나둘씩 나왔습니다. ‘에스엔에스 국정화 지지 활동’ ‘학부모 커뮤니티’ ‘블로그 대자보 계속’ 등의 단어들도 조합해볼 수 있었습니다. 계획안의 ‘교원·학부모·시민단체 동향 파악 및 협력’ ‘온라인 동향 파악 및 쟁점 발굴’의 내용과 연결되는 게 아닌지 궁금한 대목입니다. ‘김광진’, ‘정진후’ 등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활동을 활발히 펼친 야당 의원들의 이름도 눈에 띄었습니다. ‘티에프의 정당한 활동’에서 대체 이 단어들이 어떻게 쓰였는지, 그리고 그 많은 문서를 왜 가루로 만들어버렸는지 궁금해지네요. 교육부 해명이 필요합니다.
한데 정작 정부와 여당은 야당 의원들이 티에프 직원들을 감금했다고 역정을 냅니다. 주객전도입니다. 오히려 티에프 직원들은 경찰의 세심한 보호를 받았고, 야당 의원이나 취재진은 기약 없이 건물 외벽만 쳐다보다가 쓰레기를 뒤졌으니까요. 이번 ‘감금 논란’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요? 정부의 행보를 두눈 부릅뜨고 매의 눈으로 지켜보겠습니다.
현소은 사회부 24시팀 기자 soni@hani.co.kr
현소은 사회부 24시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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