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 교수와 대학원생, 학부생과 교사 등 전국의 역사 연구자들이 31일 오후 서울 역사박물관 앞에서 열린 ‘역사교과서 국정화 철회 전국역사인대회’를 마친 뒤 청계광장까지 행진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역사인’ 수백 명이 연구실을 벗어나 거리로 모였다. 이들은 스스로 학교를 벗어나 거리로 몰려나온 것 자체가 “신기하다”고 했다. 지난 3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뜰에 모인 역사학 교수·대학원생·학부생·교사 등 400여명은 머리띠를 매고 ‘세계가 하나되어 국정화 반대한다’고 적힌 손팻말을 나눠 들었다. 참석자 몇몇은 거리에 나와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쟁, 전문가에게 직접 듣는다’고 제목을 단 홍보물을 나눠줬다. ‘만인만색 역사연구자네트워크(만인만색)’가 연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역사인 대회’의 풍경이다. 만인만색은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발표에 문제를 느낀 몇몇 대학원생이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든 뒤 현재 연구자 네트워크로 ‘진화’한 단체다.
서울 청계광장에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저지 네트워크’ 주최로 31일 오후 열린 ‘올바른 역사교과서 추진 저지 범국민대회’에 참석한 시민, 학생, 역사학자 등 참가자들이 촛불을 들고 역사교과서 국정화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연세대 사학과의 박사과정 학생인 장미현(37)씨는 “원래 뿔뿔이 흩어져 자기 연구에 몰두하는 분위기인 역사학계가 이렇게 한목소리를 내며 거리로 나온 건 처음 본다”고 했다. 또 장씨는 “단어 하나를 쓸 때도 보수적으로 거르고 걸러가며 공부해온 연구자들에게 엄밀한 근거 없이 쉽게 종북이라느니, 자학사관이라느니 말하는 정부를 보며 화가 나 집회에 참여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동국대 사학과 석사과정인 황교성(30)씨는 “다양한 연구를 하는 역사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목소리를 내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한 명의 사람처럼 역사도 잘한 것은 칭찬받고 못한 것은 비판받으며 성장한다. 자학사관은 역사학도 입장에서 봤을 때 틀린 말이다. 과거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성찰하는 것이 역사의 본질이다”고 했다.
이날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열린 역사인 대회는 붉은색·초록색·보라색 등의 풍선을 든 참가자들이 정동길을 거쳐 행진하면서 서울 청계광장에서 계속됐다. 만인만색은 “서로 다른 색 풍선을 준비한 것은 역사에 대해 ‘만인만색’일 수밖에 없는 다양한 해석을 존중하자는 의미다”고 전했다. 이이화 전 서원대 석좌교수, 윤경로 한성대 명예교수 등 역사학계 원로들이 앞장 선 행진 대열에는 수백 명의 제자들이 뒤따랐다. 연단에 오른 이 교수는 “저는 늙었고 날씨도 쌀쌀하지만 방안에 앉아서 컴퓨터나 두드리고 역사 책을 쓸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 나왔다. 우리가 써온 역사를 좌파·빨갱이라고 하는 상황에서 가만 있을 수는 없다”고 했다.
행진 대열은 서울 청계광장에서 466개 시민사회·역사단체들이 모인 ‘한국사교과서 국정화저지네트워크(국정화저지네트워크)’가 연 ‘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를 위한 3차 범국민대회’에 합류했다. 주최 쪽 추산 1만여명(경찰 추산 2500명)이 참여한 이날 집회에서 역사학자인 안병욱 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위원장은 “여기 모인 우리 역사학자들은 (역사교과서 국정화라는)오늘의 어리석은 만행과 시대착오적인 폭거를 역사에 낱낱이 기록해 다시는 되풀이되서는 안되는, 두고두고 경계할 교훈으로 만들 것이다”고 했다. 참여자들의 손마다 들린 촛불이 시월의 마지막 밤을 환하게 밝혔다.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