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친절한 기자들’에서 두번째로 인사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사회부 24시팀 박수지입니다. 2014년 말, 보육료 인상을 요구하며 벌어진 가정어린이집 파업 당시 피해를 보게 되는 아이들의 얘기로 인사드렸는데, 이번엔 고등학생이 된 ‘나영이’ 얘기로 여러분과 만나게 됐습니다.
얼마 전 ‘나영이 주치의’로 유명한 신의진 새누리당 의원이 누리꾼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습니다. 아, 상황을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논란의 전말부터 간단히 설명드리겠습니다. 4·13 총선을 앞두고 서울 양천구(갑) 선거구에서 새누리당 예비후보로 나선 신 의원이 건물 외벽에 걸린 대형 현수막에 ‘나영이 주치의’라는 문구를 실었습니다. 나영이(가명)는 2008년 온 국민을 경악하게 한 ‘조두순 사건’의 피해 아동입니다. 현수막 사진이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퍼지면서 신 의원에겐 “성폭력 피해를 당한 아이를 선거 홍보에 이용한다”는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그러자 신 의원은 지난 22일 자신의 블로그에 “나영이 아버님께서는 ‘나영이’라는 이름이 희망의 이름으로 사용되기를 바라셨고, 저 역시 극복된 상처는 많은 사람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서도 “다른 시각으로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알았다”고 해명했습니다. 이후 현수막에선 ‘나영이 주치의’라는 문구는 사라졌습니다.
신 의원은 지난해 12월에도 ‘인천 아동학대 사건’ 피해 아동의 상담 내용과 그림을 언론에 공개해 논란을 일으킨 바 있습니다. ‘소아정신과 전문의’ 자격으로 학대받다가 탈출한 11살 소녀와 만난 신 의원이 피해 아동과 나눈 대화와 그림을 고스란히 공개한 것은 직업 윤리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일었습니다. 사실, 기자들은 국민들의 관심이 쏠린 환자의 상태에 대해 취재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환자의 상태를 가장 잘 아는 담당 의사로부터 설명을 듣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환자 정보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의사들의 대답은 늘 한결같습니다. 이들의 대답이 매번 똑같은 이유는 ‘그것이 의사의 의무’라고 배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행 의료법도 환자의 비밀은 누설하지 못하도록 명시돼 있고요. 다른 사람도 아닌, 국내에서 손꼽히는 대학병원에서 정신과 의사로 근무한 신 의원이 이런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 의원의 ‘나영이 주치의’ 홍보 논란은 현수막에서 해당 문구가 사라지고 나영이 아버지가 신 의원 쪽에 보낸 편지가 공개되면서 일단락됐습니다. 나영이 아버지는 이 편지에서 “성폭력을 당한 아이들도 충분한 치료와 보살핌을 받으면 잘 지낼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 위해 ‘나영이 주치의’로 알리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 나영이는 치료받으면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의 이름”이라고 밝혔지요. 이 편지가 신 의원 쪽의 요청으로 작성된 것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또다시 비난이 일긴 했지만, 적어도 편지에 담긴 나영이 아버지의 마음만큼은 진심이었으리라고 짐작해봅니다. 그래도 어딘가 모를 찝찝함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나영이 아버지만 ‘허락’한다면, 나영이를 ‘희망의 이름’으로 선거 홍보에 써도 괜찮은 건가 싶어서죠.
국내에서 아동복지학을 전공하는 한 교수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신 의원과 나영이 아버지의 행동은 피해 아동에 대한 ‘2차 가해’에 해당된다”고 비판했습니다. 아무리 ‘주치의’와 ‘부모’란 자격이 있다고 해도, 그들이 아무리 ‘선의’를 갖고 한 행동이라고 해도, 피해 아동의 이름을 공공연히 선거 홍보에 사용되도록 ‘허락’하고 ‘허가’받을 권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2012년 한국도 비준한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아동은 ‘보호받을 권리’를 갖고 있고, 모든 사안에서 ‘아동 최상의 이익’을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제는 여고생이 된 나영이가 “성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을 꼭 숨길 이유가 없다”는 아버지의 말에 얼마나 동의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편지로 정리된 이번 논란의 저 밑바닥에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박수지 사회에디터석 24시팀 기자 suji@hani.co.kr
박수지 사회에디터석 24시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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