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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답정너’ 꼴 안 당할 아파트 사용설명서 있지요

등록 2016-04-22 18:58

[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아파트에 살고 계신가요? 2014년 주거실태조사를 보면, 국내 2가구 가운데 1가구(49.6%)꼴로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아파트 공화국’답죠. 그렇다면 아파트 관리·운영에 대해서도 관심 있게 지켜보고 계신가요? 혹시 ‘관리비만 내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계시진 않으신지요. 그러는 사이에 내가 사는 아파트가 몇몇 소수의 의견에 따라 관리·운영될 수도 있는데 말이에요. 이렇게 얘기하는 저도 좀 찔립니다. 아파트 복도에 붙은 공고문 한 장도 잘 안 읽었거든요. 안녕하세요, 사회부 24시팀 박수지 기자입니다.

지난 2월 중순 서울 종로구의 ㅁ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는 관리비 절감을 위해 경비원 인원을 줄인다는 안건으로 주민들한테 찬반 동의서를 보냈습니다. 찬성하려면 동그라미만 치면 됐지만, 반대하려면 ‘구체적인 사유’와 ‘합리적인 대안’까지 적어내야 했습니다. 동의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경비원 해고에 찬성으로 간주한다고 했고요. 말하자면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된다) 투표였던 셈입니다.

전체 가구(960가구) 중 325가구가 동의서를 제출했고, 이 가운데 228가구가 경비원 6명을 해고하는 안에 반대한다는 뜻을 나타냈습니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시한 가구 가운데 3분의 2 넘는 가구가 해고안을 반대했지만 ‘제출하지 않으면 찬성으로 간주’한다는 애초의 공고대로라면 경비원 6명이 해고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실제로 투표가 끝난 뒤 입주자대표회의는 경비원을 해고하는 대신 폐회로텔레비전(CCTV)을 확대 설치한다는 방안을 담은 공고문까지 붙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뒤늦게 알게 된 이 아파트 주민의 민원 제기로 상황이 ‘반전’됐습니다. 종로구청은 “투표의 공정성이나 객관성이 결여됐다”며 재투표를 하라고 아파트 쪽에 시정권고를 내렸거든요. 재투표 결과, 전체 가구 가운데 550여가구가 반대표를 던져 결국 경비원 감축안이 부결됐습니다. 민원을 제기한 이 아파트 ‘103동 주민’ 이아무개(59)씨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공정하게 투표해서 감축하기로 결정됐다면 모르지만, 누가 봐도 불합리하게 절차를 진행한 건 주민들의 무관심을 철저히 이용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대표도 할 말은 있었습니다. “주민들이 얼마나 무관심한지 아십니까? 처음 동의서를 받을 때에도 절반 넘게 제출을 안 하는데 그걸 다 무효표 처리하면 일이 추진이 안 됩니다. (미제출을 동의로 간주한 건)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구청에 민원을 제기한 이씨도, 입주자대표회의 대표도 공통적으로 ‘주민들의 무관심’을 언급했습니다. 불합리하다는 걸 알아도 적극적으로 아파트 일에 개입하려는 의지 없이, 주민들의 무관심이 지속됐더라면 이 아파트도 ‘기울어진 투표 설계’ 속에서 경비원들만 해고됐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이씨는 내친김에 입주자대표회의의 회의록도 받아서 살펴보고, 아파트 주민 300여명의 서명도 받아 아파트 경비원 감축안 투표 절차 의결 내용과 관리비 수입·지출 등에 대해서 구청에 감사요청서도 제출했습니다. 감사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지만 무섭게 감시하는 주민이 있는 한, 적어도 이 아파트에서 ‘절차적 공정성’을 훼손한 의사 결정은 앞으로 생기기 어렵겠지요.

무혐의 결론이 났지만 2014년 배우 김부선씨가 아파트 난방비 의혹을 제기하며 ‘난방 열사’로 떠오른 배경엔, 폐쇄적인 아파트 관리·운영에 대한 국민적인 공분이 있었습니다. 지난 3월10일 국무조정실 정부 합동 부패척결추진단은 전국 300가구 이상 아파트 8319개 단지의 외부 회계감사 실태를 점검했더니, 전국 아파트 5곳 가운데 1곳(19.4%)꼴로 회계 처리 부실·부정 등의 문제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정부는 지방자치단체와 경찰이 협력해 감시·관리하고 단속한다는 대책을 발표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건 ‘입주민들의 관심’이라고 했었습니다.

박수지 사회에디터석 24시팀 기자
박수지 사회에디터석 24시팀 기자
관심은 사소한 실천부터. 아파트 복도에 붙은 공고문을 꼼꼼히 들여다보는 게 시작이 될 수 있겠죠. 국토교통부가 운영하는 공동주택관리정보시스템(www.k-apt.go.kr)에만 들어가봐도, 우리 단지 관리비가 다른 곳과 비교할 때 어떤 수준인지도 알려줍니다. 그때 ‘난방 열사’가 통쾌하다며 열광만 하고, 정작 바쁘다는 핑계로 우리 아파트 문제엔 무관심하지 않으셨나요?

박수지 사회에디터석 24시팀 기자 suj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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