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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대중은 사라지고 교조적인 이념만 남았다

등록 2016-09-23 19:26수정 2016-09-23 19:33

[토요판] 박찬수의 NL 현대사
(11)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 - 2
1996년 8월 이른바 ‘연세대 사태’는 학생운동의 분수령과도 같았다. 연세대에서 범민족대회와 통일대축전 행사를 열려던 학생과 경찰이 9일 동안 격렬하게 충돌했고, 1천여명이 부상했다. 경찰과 대치 7일째인 8월18일 오전 연세대 종합관 옥상에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소속 대학생들이 경찰의 진입에 대비해 돌을 쌓아놓고 있는 모습.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1996년 8월 이른바 ‘연세대 사태’는 학생운동의 분수령과도 같았다. 연세대에서 범민족대회와 통일대축전 행사를 열려던 학생과 경찰이 9일 동안 격렬하게 충돌했고, 1천여명이 부상했다. 경찰과 대치 7일째인 8월18일 오전 연세대 종합관 옥상에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소속 대학생들이 경찰의 진입에 대비해 돌을 쌓아놓고 있는 모습.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1991년 7월27일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전대협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핵심 세력은 골수 주사파 조직인 ‘정책위원회’”라고 지목했다. 안기부 발표를 보면, 전대협은 의장이 주재하는 총회 아래 전국 24개 지구대협(지역) 의장으로 구성된 중앙위원회가 있고, 중앙위원회 밑에 투쟁노선과 정책을 세우는 정책위원회를 뒀다. 형식상 중앙위원회의 하부 조직인 정책위가 실제로는 전대협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핵심이란 게 안기부 주장이었다.

이 발표는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틀렸다. 정책위가 전대협을 이끌어가는 핵심인 건 분명했다. 전대협이 대학 총학생회라는 대중조직의 결집체라면, 정책위는 각 대학 핵심 학생운동 활동가들이 모인 조직이었다. 그러나 정책위가 모든 걸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1990년 초반 전대협 정책위에서 일했던 인사는 “회사에 비유하자면 정책위는 비서실 같은 존재였다. 주요 사업계획을 입안하고 집행을 감독하지만 최종 결정은 이사회에서 내린다. 전대협에선 각 지역 총학생회장 모임인 중앙위원회가 바로 이사회와 같은 구조였다”고 말했다.

“4개 주사파 조직이 전대협 움직여”

전대협과 정책위의 이런 관계는 한때 한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단체 중 하나로 꼽혔던 학생운동 조직의 성쇠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한다. 일반 학생들이 참여하는 학생회와 열성적인 운동권 학생들의 조직이 잘 결합할 때 학생운동은 최고의 힘과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이념 지향성이 강한 활동가들이 학생회를 장악하려 하고 활동가들의 분파가 학생회 주도권을 놓고 다툴 때, 전국 조직은 손쉽게 힘을 잃어버렸다. 전대협과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1993년 결성된 전대협의 후신)이 그랬다. 1980년대 말부터 4~5년간 막강한 조직력을 자랑했던 학생운동이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걸은 데엔 이런 측면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1989년 3기 전대협에서 중앙정책위 위원으로 일했던 한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전엔 (일반 학생이 참여하는) 학생회 조직과 서클 중심의 활동가(운동권) 조직이 이원화돼 존재했다. 이런 식으론 전국적인 학생조직을 결성하고 이끌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1988년부터 학생회와 활동가 조직을 하나로 결합시켰다. 각 대학의 운동권 핵심들을 모두 전대협 정책위 안으로 끌어들여, 여기서 토론하고 결정하면 따르자는 거였다. 전국 대학의 운동권 핵심들이 모여 결정한 거니까 학생회와 이견도 없고 집행력도 훨씬 높을 수밖에 없었다.”

4박5일간의 농성은 20일 새벽, 헬기를 동원한 경찰의 진압작전으로 끝이 났다. 폐허처럼 변해버린 연세대 종합관 건물. <한겨레> 자료사진
4박5일간의 농성은 20일 새벽, 헬기를 동원한 경찰의 진압작전으로 끝이 났다. 폐허처럼 변해버린 연세대 종합관 건물. <한겨레> 자료사진
1990년을 전후한 시기에 전대협이 10만여명의 학생을 동원하며 탄탄한 조직력을 과시할 수 있었던 바탕엔 활동가 조직과 대중 조직의 유기적 결합이 깔려 있었다. 이게 깨지는 순간, 언제든지 내부 분열과 다툼의 위험이 존재했다.

전대협에 비해 정책위는 이념 지향이 훨씬 강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학생운동권 주류인 엔엘(NL)계는 색깔이 조금씩 다른 여러 개의 활동가 조직으로 나뉘어 있었다. 안기부는 “조통그룹, 자민통, 반제청년동맹(반청), 관악자주파 등 4개 주사파 조직이 전대협을 움직였다”고 발표했다. 당시 자민통의 핵심으로 일했던 한 인사는 “89년엔 조통 그룹이 셌지만 91~92년엔 자민통이 가장 세력이 컸다. 자민통에 속한 학생 활동가들이 전국적으로 200여명에 달했다”고 말했다. 자민통은 ‘엔엘 주사파’로 분류됐다. 그러나 이 그룹에 속했던 인사는 “학교마다 북한 방송 청취팀이 자발적으로 있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북한 방송이 도움이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교조적으로 따르지 말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학생운동 활동가들이 대중조직인 전대협과 한총련을 주도하는 경향은 1990년대 중·후반으로 갈수록 심해졌다. 1993년 2월 김영삼 정부 출범으로 일정 부분 민주개혁 조처가 취해지면서 반정부 투쟁의 명분이 약해졌다. ‘신세대’니 ‘엑스(X)세대’니 하며 대학가 분위기도 바뀌었다. 외적 환경은 급격히 변했는데 학생조직 내부에선 이념 중심의 활동가 그룹 입김이 더욱 세지는 모순이 심해졌다. 1997년 5기 한총련 의장을 지낸 강위원(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씨는 “광주에선 중앙의 흐름을 잘 몰랐는데, 의장으로 선출돼 서울에 올라와선 깜짝 놀랐다. 엔엘 내부의 분열도 심했고, 외부의 많은 선배들이 찾아와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심지어 80년대 학번들이 여전히 학생운동에 관여하고 있었다. 도저히 재학생 중심의 운동을 하기가 힘들었다”고 말했다. 이 괴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1996년 8월의 ‘연세대 사태’는 그런 모순의 대폭발과 같았다. 1996년 8월 연세대에서 범민족대회와 통일대축전 행사를 열려던 학생과 경찰이 9일 동안 격렬하게 충돌했다. 과학관과 종합관은 폐허로 변했고, 학생과 같은 또래의 전경 1천여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진압 과정에서 전경 1명은 끝내 숨졌다. 이 사건은 학생운동의 정당성과 대중성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

학생운동의 분수령 96년 ‘연세대 사태’

사태의 발단과 진행은 정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경찰이 범민족대회·통일축전 행사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연세대를 원천봉쇄하자 한총련 지도부는 대회 장소를 다른 데로 옮길 것을 검토했다. 예전 같으면 장소를 바꿨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정부의 ‘개량주의 국면’을 학생운동이 뚫고 나가야 한다는 심리가 강했다. 범민족대회 개막(8월12일) 직전 한총련은 평양에 학생 대표 두명을 파견했다. 한명은 연세대생이었다. 긴장감은 훨씬 높아졌다. 개막식 날인 12일부터 연세대와 신촌 일대에선 학생과 경찰의 격한 충돌이 벌어졌다. ‘헬리콥터가 연세대 위를 날고 길바닥에 학생들이 누워 있었다. 최루탄 냄새가 신촌 일대를 뒤덮었다’고 10년 뒤 <연세춘추>는 그날의 상황을 묘사했다. 14일과 15일 경찰은 교내에 진입해 행사를 무산시키려다 실패했다. 서울과 지방에서 올라온 전·의경 수천명은 거의 작전도 없이 교내에 들어갔다가 쇠파이프와 화염병으로 무장한 학생 2만여명에 둘러싸여 곳곳에서 고립되고 얻어터지고 무장해제됐다. 경찰이 무기력하게 패퇴하는 모습은 충격이었다.

이념 성향 매우 강한 정책위원회
형식상 중앙위원회 하부조직
안기부, “전대협 배후조종 핵심”
YS정부 출범 뒤 환경 변했으나
활동가조직 입김 되레 세져

96년 연세대 통일대축전 행사
학생-경찰 9일간 격렬한 충돌
진압과정 경찰 1명 숨지고
단일사건으론 최대 연행자 기록
“통일운동 문제제기는 금기시”

1996년 8월 연세대에서 열린 8·15 통일대축전 행사에 참가했던 한총련 소속 학생들이 무더기로 연행되고 있다. 연행자는 5848명, 단일 사건으로 최대였고 이 중 462명이 구속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6년 8월 연세대에서 열린 8·15 통일대축전 행사에 참가했던 한총련 소속 학생들이 무더기로 연행되고 있다. 연행자는 5848명, 단일 사건으로 최대였고 이 중 462명이 구속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16일부터 독이 오를 대로 오른 경찰의 총공세가 시작했다. 179개 중대 2만5천여명이 연세대를 에워쌌다. 시위 진압 경험이 풍부한 ‘백골단’(사복경찰)이 앞장서 교내에 진입했다. 2시간 동안의 충돌 끝에 학생들은 과학관과 종합관으로 밀려들어갔다. 뜻하지 않은 점거농성이었다.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이던 박병언(92학번)씨는 “농성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에 준비도 없었다. 건물 안으로 밀려들어간 뒤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솔직히 해산하고 싶었지만 경찰 봉쇄로 그럴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4박5일간의 농성은 20일 새벽, 헬기를 동원한 진압작전으로 끝이 났다. 건물 곳곳의 바리케이드엔 불이 붙었고, 과학관과 종합관의 유리창 중 성한 게 하나도 없었다. 진압작전에 투입됐던 김종희(당시 20살) 이경이 돌에 맞아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졌다. 연행자는 5848명, 단일 사건으로 최대였고 이 중 462명이 구속됐다.

연세대에서 학생들이 외친 구호는 ‘북-미 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수’ ‘연방제 통일’ 등이었다. 정부에선 북한 주장을 학생들이 그대로 따랐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들 구호는 1986년 10월 말 건국대에서 열린 애학투련(전국 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결성식에서 나온 구호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때도 학생들은 경찰에 밀려 학교 건물로 들어가서 농성하다 격렬한 진압작전 끝에 1500여명이 연행됐다. 달라진 건, 86년에 학생들은 폭압적인 전두환 군사독재에 맞섰지만 96년엔 개량적인 김영삼 정부와 맞서야 했다는 점이었다. 또 하나, 엔엘(NL)계 학생운동권은 건국대 사태 이후 뼈저린 반성을 했다. 입으론 대중노선을 말하면서 구호와 조직은 철저히 대중과 유리됐다는 걸 깨달았다. 건국대 사태 뒤 엔엘계는 투쟁구호를 ‘군부독재 타도, 직선개헌 쟁취’로 통일했고, 이것이 87년 6월 항쟁에서 시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내는 발판이 됐다.

96년 연세대 사태는 달랐다. 학생운동이 괴멸적 타격을 받았지만 운동권 내부에선 제대로 된 평가나 반성이 나오질 않았다. 5기 한총련 의장 강위원씨는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연세대 사건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하거나 토론하려 하질 않는다. 술자리에서도 말을 꺼린다. 너무 참혹한 패배라 기억하기 싫은 측면도 있지만,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누구는 ‘연세대 항쟁’이라 부르고, 누구는 ‘사건’ 또는 ‘사태’라고 부른다.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 박병언씨는 몇년 뒤 한총련 후배들로부터 ‘영웅적인 항쟁’에 대해 얘기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그때의 경험을 저항의 역사로만 볼 게 아니라 왜 대중으로부터 고립됐는지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씨는 20주년인 올해 8월20일 고 김종희 이경의 묘소를 참배하고 돌아왔다고 말했다.

‘연세대 사태’ 당시 학생과 경찰의 충돌 과정에서 벌어진 김종희 이경 사망 사건과 관련해, 1996년 12월30일 연세대 종합관에서 진행된 현장검증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연세대 사태’ 당시 학생과 경찰의 충돌 과정에서 벌어진 김종희 이경 사망 사건과 관련해, 1996년 12월30일 연세대 종합관에서 진행된 현장검증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고난의 행군’과 ‘신념의 강자’

북한 정권은 1990년대 중반 동유럽 사회주의권 붕괴와 자연재해로 수십만~수백만명이 굶어 죽는 혹독한 어려움을 겪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난의 행군’이란 구호를 만들어냈다. 비슷한 시기 한총련 내부에서 유행한 구호가 ‘신념의 강자’였다. 온 마음과 열정을 담은 신념으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해 나가자는 뜻이었다. 1990년대 후반기에 연세대 단과대 학생회장을 지낸 인사는 “연세대 사태나 통일운동에 문제제기를 하는 건 금기시됐다. 북한이 주장하는 범민족대회에 한총련이 너무 집착한 게 아니냐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엔엘이 주도하는) 한총련은 외연을 확장하는 게 아니라 의문을 제기하는 학생들을 배제해서 ‘사상의 순결성’을 지키려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학생운동권은 소수화하고 고립됐다. 박병언씨는 “1986년 이후 엔엘이 대중적으로 성공했던 건 주체사상이나 수령론 때문이 아니라 대중노선 때문이었다. 그런데 90년대 중반 이후엔 거꾸로 대중은 사라지고 교조적인 이념만 남았다”고 말했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전대협이 최전성기던 1990년에 운동의 진로를 심각하게 고민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동유럽 사회주의가 무너진) 1990년 무렵에 학생운동뿐 아니라 진보운동 전체가 ‘이제 혁명의 시대는 끝나고 개량의 시대가 왔다’는 걸 인정하고 진지한 모색을 했어야 했다. 그러질 못했다. 엔엘은 아직 북한이 건재하다고 믿었지만 착각이었다. 북한은 사회주의권 붕괴를 보면서 개방이 아니라 오히려 폐쇄적·고립적인 길로 나가다 지금에 이르렀다. 남한 ‘엔엘 주사파’의 궤적도 이와 비슷했다.”

모든 운동은 고립되고 소수화하면 극단으로 치닫기 쉽다. 1970년대 일본의 전공투(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나 독일의 적군파는 세력이 약해지자 납치와 살인을 감행하는 테러리스트의 길을 택했다. 한국 학생운동 역시 급격히 세를 잃었지만 일본이나 독일처럼 적군파로 나가진 않았다. 그 이유를 역설적으로 엔엘 사조에서 찾기도 한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오직 이념만 추구하면 그 이념을 달성하기 위한 극단적 방식에 끌릴 수밖에 없다. 엔엘은 품성과 의리, 인간적 도리를 강조했는데, 그런 면이 어려운 시기에도 사람들을 극단으로 몰아붙이지 않은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 박찬수 <한겨레> 논설위원. 1989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청와대 출입기자와 워싱턴 특파원, 정치부장, 편집국장을 지냈다. 저서로 청와대와 백악관의 권력작동 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2009년)이 있다. 82학번으로 5공 시절 군에 강제징집됐다 돌아와 보니 대학가가 온통 엔엘(NL) 열풍에 휩싸였던 기억을 갖고 있다. 사회부 신참기자 시절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취재하며 무엇이 수많은 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의문을 가진 게 20여년이 지나 이 시리즈를 쓰는 계기가 됐다. 격주로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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