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 후배 김경일 신부의 지난해 편지
누리꾼들, 다시금 글 찾아 백씨 추모
누리꾼들, 다시금 글 찾아 백씨 추모
대한성공회 광주교회 김경일 신부. 한겨레 자료사진
▶김경일 신부 편지 전문
나는 요즘 툭하면 눈물이 흘러내리면서 울먹이게 된다.
직사물대포를 맞고 의식불명 상태로 서울대병원에 누워계신 백남기선배님이 눈앞에 어른거려서다.
80년 민주화의 봄 때 긴급조치복학생으로 형님과 처음 만났다.
나보다 예닐곱살 더 드신 형님은 행정학과 직계선배님으로 작은 체구도 얼굴도 나하고 많아 닮아 과학생들이 가끔 나를 형님과 착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형님은 이미 법대의 전설이었다.
유신시대의 서슬 퍼런 법정에서 판사와 검사들에게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호통쳤다는 일화는 법대생들의 얼굴을 치켜들게 만드는 자부심의 근원이었다.
법대 공청회 때 얼떨결에 총장사퇴 주역이 되어 나도 총학생회 멤버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총학의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사무실에 가보면 늘 빗자루와 걸레를 들고 청소만 하고 계셨다.
운동의 방식을 놓고 후배들이 치열하게 논쟁을 벌여도 형님은 옆에서 웃기만 했다.
이렇게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밝힐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게 꿈만 같고 행복하기만 하다고 했었다. 술자리가 벌어지고 안주로 돼지고기 삼겹살을 사와서 구울 때도 형님은 집게를 손에서 놓지 않고 굽기만 하지 드시는 걸 못 보았다.
웃기만 하고 좀처럼 말이 없는 분이지만 쇠처럼 단단한 체구에 정신력도 남달라서 모두가 그 품에 안길 수밖에 없었고 무엇이든 다 받아주었다.
형님은 오로지 공적이면서 대의에 사는 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나이에 어쩌면 인품이나 인격이 그럴 수 있었을까 싶게 형님은 우리와 이미 다른 세계에 계셨다.
그런 형님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잠시 곧 전두환이 집권의 야욕을 부리면서 5.18이 터졌고 형님과 나는 소식이 끊어져버렸다.
그러다 20년도 더 지난 2002년 나는 인연따라 전남 벌교의 빈집에 후배목사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 근처 보성면의 한 주막에서 우연히 백남기선배님을 만나게 되었다.
형님은 농사를 지으며 농민으로 살고 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따님 이름을 백민주화로 지었다고 자랑하셨다.
나는 금방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쏟아졌다.
형님의 민주화에 대한 그 열망과 삶의 고초가 전해져와서다.
따님께서곤혹스러운 순간을 많이 겪었겠습니다라고 하니 형님은 빙그레 웃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비록 교회에 몸담고 살고 있지만 형님의 여전히 타협없는 꼿꼿한 모습과 치열한 삶에 비하면 그저 진구렁에 딩구는 건달에 불과하네요. 죄송하고 부끄러울 뿐입니다.
나는 형님 손을 붙들고 진심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형님은 20여년만에 시골 촌부의 모습으로 내 앞에 다시 나타나셨지만 태산같은 무게로 나에게 다가왔다.
형님은 농민운동의 중심부에서 최전선에 서계셨다.
나는 그 뒤 형님을 찾아뵙지 못 했다.
말로 먹고사는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져서다.
그런데 형님이 민중총궐기 시위현장에서 '이제 다 끝났으니 물대포 이제 그만 쏘라'고 외치다가 이런 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니 매일 눈물만 나올 뿐이다.
생의 마지막을 형님은 이런 모습으로 정리하는구나.
역시 형님답다.
형님! 결국 시대의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떠나가시는군요.
80년도에 형님을 처음 뵙고 한 발 뒤처져 따라다니면서 느꼈던 그 전률과 감동을 나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나는 흉내도 낼 수 없지만 그 모습을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왔다.
오직 대의에 사는 강직한 지사적 풍모와 그러면서도 한없이 따뜻한 눈길과 품을.
그리고 엄격하리만큼 자기 절제가 강한 수도자적 모습을.
그래. 누구든지 형님을 만나면 살아있는 예수를 본 느낌이었을 게다.
나는 형님의 발뒤꿈치도 따라갈 수 없는 간장종지만한 작은 그릇이지만 형님의 역사를 향한 마지막 절규를 결코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다시 마음에 굳게 되새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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