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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평양에서 보낸 9장짜리 ‘팩시밀리 편지’

등록 2016-10-07 19:08수정 2016-10-10 14:30

범민련 북측 본부 백인준 의장
문익환 목사 앞으로 친필편지
“딴 길 나가시리라 생각 않습니다”
남한 통일운동에 공개적 의견 표시

문 목사, 89년 방북 김일성과 회동
조평통과 9개항 공동성명 발표
범민련 뛰어넘는 대중운동 모색
NL 내부 이견 수면 위로 떠올라
1993년 12월10일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북측본부 의장인 백인준은 남한의 문익환 목사에게 장문의 친필 편지를 보냈다. 매우 공손한 어투였지만 문익환 목사가 범민련 중심의 통일운동을 벗어나려 하는 데 대한 강한 우려가 담겨 있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3년 12월10일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북측본부 의장인 백인준은 남한의 문익환 목사에게 장문의 친필 편지를 보냈다. 매우 공손한 어투였지만 문익환 목사가 범민련 중심의 통일운동을 벗어나려 하는 데 대한 강한 우려가 담겨 있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박찬수의 NL 현대사

⑫ NL의 분화 - 통일운동 1

1993년 12월10일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북측본부 의장인 백인준이 남한의 문익환 목사에게 장문의 친필 편지를 보내왔다. 범민련 남측본부를 수신인으로 한 9장짜리 ‘팩시밀리 편지’였다. 두 사람은 문 목사가 1989년 봄 역사적인 방북을 했을 때 처음 만나 금세 친해졌다. 문 목사는 시를 즐겨 썼는데, 백인준 의장 역시 시인으로 시집까지 낸 전력이 있었다. 백 의장은 편지에서 문 목사와의 만남을 이렇게 회상했다.(※ 원문 표기를 그대로 살림.)

“붓을 드니 우리가 1989년 봄 평양에서 처음 만나고 헤어지던 때의 일들이 가슴 뜨거이 되새겨집니다. 그 때로부터 어언 5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갔군요. 그것은 저에게 있어서는 ‘그리움’의 연속이었고 ‘그리움’의 루적과정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문 목사님께는 혹시 시인의 과장으로 느껴지실지도 모르겠으나 저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 없는’ 진정의 고백입니다. 그것은 제가 문 목사님을 다만 조국통일의 애국일념을 안고 사선을 넘어와 경애하는 김일성 주석님과 민족의 운명을 놓고 허심탄회하게 상의하신 열렬한 애국지사, 용감한 통일투사로 존경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윤동주를 통하여 문 목사님을 윤동주 대신 얻은 나의 다정한 새 친우로, 시의 벗으로, 십년지기로 여기기 시작했었기 때문입니다….”

범민련 탈퇴 움직임에 불편한 속내

문 목사를 흠모하는 마음이 진하게 묻어나는 이 편지의 목적은 그러나 다른 데 있었다. 백인준 의장은 이렇게 편지를 이어갔다.

“복잡한 남녘의 현 정세 하에서 문 목사님께서 조국통일 운동에 대하여, 범민련 사업에 대하여 무엇을 생각하고 계시며 어떻게 하려고 하실까, 문 목사님의 흉금 속에 겹 쌓이는 천사만려를 제가 어찌 규자할 수 있으리까. 때로는 주위의 개별적 반향을 들으며 저 역시 일종의 위구와 불안에 사로잡히는 적도 있었지만 그러나 문 목사님에 대한 저의 믿음과 기대는 철석 같습니다. (…) 문 목사님께서 그 믿음과 기대에 그늘을 지우는 그 어떤 딴 길로 나가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습니다. 물론 오늘 남녘의 통일운동 실정과 문 목사님이 처하고 계시는 복잡한 처지에 대하여 저도 모르는 바 아닙니다. 지금 내외의 온갖 반동들이 야합하여 우리의 민족통일 세력을 분렬 와해시키고 북을 고립시키며 북의 사회주의를 말살해보려는 책동이 우심하고 이러한 데 영향받아 일부 통일운동가 속에서 신심을 잃고 동요가 일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오늘의 이런 실정을 놓고 8·15 조국해방 전야를 회고하게 됩니다. (…) 이 땅의 진정한 애국자들과 혁명가들은 일제의 총칼과 교수대 앞에서 목숨을 버릴지언정 자기의 숭고한 신념과 지조는 절대 버리지 않았으며 력사는 오히려 그들에게 승리와 영광의 월계관을 씌워주지 않았습니까.”

매우 공손한 어투였지만 문익환 목사가 범민련 중심의 통일운동을 벗어나려 하는 데 대한 강한 우려가 담겨 있었다. 백인준 의장이 직접 문 목사 앞으로 편지를 보낸 이유가 뚜렷해졌다. 백 의장은 문 목사를 향한 극진한 마음을 버리지 않았지만, 끝으로 갈수록 내용은 단호해졌다.

“범민련 운동 즉 조국통일 운동이 결코 어느 한 지역운동의 성과로서만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며 북과 남, 해외의 혼연일체의 련대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문 목사님께서 저보다 더 명철하게 확신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북에서 범민련 운동이 아무리 활발하게 전개된다 하여도 그것이 남측과 공동보조를 맞추지 못할 때 그것은 북의 지역적 운동에 그치고 말 것이며 반대로 남녘에서 통일운동이 아무리 대중화되고 활성화된다 해도 북이 공동보조를 맞추지 못할 때 그것 역시 남의 지역적 운동이나 시민운동으로밖에 되지 못할 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우리 범민련 운동은 시작에서부터 ‘삼발이’의 세 다리와 같이 북과 남, 해외의 그 어느 한쪽이 없어도 정립될 수 없는 숙명적인 일심동체의 운동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저는 범민련 북측본부 의장으로서 문 목사님을 조국통일의 한길에서 말그대로 생사 운명을 같이할 필생의 전우로, 맹우로 여기고 있습니다. 만일 저승이 있어 거기에 가서 윤동주나 송몽규를 만난다면 (…) 윤동주가 끝까지 애국의 순결한 마음을 지니고 살더니 불멸의 저서에 이름이 올라 영생하는구나 하고 눈굽을 적시겠습니다. (…) 1993년 12월10일 평양에서 백인준 삼가 드림.”

결론은 분명했다. 현시점에서 남한 통일운동 단체들은 북한 및 해외 범민련과 공동 보조를 취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범민련을 탈퇴하는 건 일제 말기에 신념과 지조를 버린 행위와 비슷하다는 뜻이었다. 그 무렵 문익환 목사와 다수의 재야 인사들은 이적단체로 규정된 범민련을 뛰어넘어 대중적인 ‘새로운 통일운동체’(새통체) 건설을 추진하고 있었다.

백인준 의장의 편지는 몇 가지 점에서 이례적이고, 의미심장했다. 우선, 북한이 남한 통일운동에 이렇게 공개적으로 세세한 의견을 표명한 건 전례 없는 일이었다. 북이 남한 운동을 지도하려 한다는 비판이 제기될 게 뻔한데도 이를 무릅쓰고 공개 서신을 보낸 건, 그만큼 문 목사 행보를 북한당국이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실제로 이 편지는 남한 통일운동 내부의 이견을 수면 위로 드러내며 갈등을 조정하기는커녕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통일운동을 핵심 노선으로 삼는 엔엘(NL) 세력은 범민련과 새로운 통일운동체 추진을 놓고 둘로 쫙 갈라졌다.

또 하나, 범민족대회와 범민련 결성을 북한당국이 먼저 제안했기에 강하게 집착한다는 잘못된 인식이 남한 내에 광범위하게 퍼지게 됐다. 지금도 대다수 국민은 범민족대회를 북한이 제안했고 범민련은 북한 주도로 만든 통일운동 조직이라고 알고 있다. 범민족대회를 열자고 북한에 먼저 제안한 건 문익환 목사였다. 범민련 결성 역시 ‘연합’이냐 ‘협의체’냐 하는 차이는 있지만, 범민족대회를 상설화한다는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그러나 남한 통일운동의 성장을 반영한 범민족대회는 어느 순간부터 독자성을 상실하고 번번이 ‘친북 논란’에 휩싸이는 상황으로 몰렸다. 이는 엔엘 주도의 통일운동이 대중적 기반을 점점 상실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3개월 만에 나온 북쪽의 답변

범민족대회 아이디어를 처음 낸 사람은 조성우 당시 평화연구소장(현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이었다고 당시 통일운동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말했다. 조성우 소장은 5공 때 전두환 정권에 쫓겨나다시피 해서 일본 유학을 하던 시절에 남북한과 해외동포까지 함께 어울리는 ‘문화 중심 행사’의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조성우 소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1985년 겨울, 작가 황석영씨가 (극본을) 쓴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이란 마당극을 민단(재일본대한민국민단)과 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청년들이 함께 참여해서 일본에서 순회공연을 했다. 민단, 총련 가리지 않고 수많은 재일동포들이 마당극을 보러 와선 감동해서 서로 얼싸안고 뒤풀이를 했다. 그걸 보며 해외동포들도 통일의 한 주체구나 생각했다. 또 정치적 갈등이 첨예할 때는 ‘문화가 답이다’라고 느꼈다. 1988년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세계대회’를 서울에서 열면서, 이걸 징검다리로 해서 문화 중심의 범민족대회를 하자고 했다. 문익환 목사님께 말씀드렸더니 ‘좋다’고 하셨다. 그해 8월28일 성균관대에서 열린 ‘평화 대회’ 폐막식에서 공동대회장인 문 목사님이 북한과 해외동포들을 향해 범민족대회를 열자고 공식 제안했다.”

이 제안에 대한 북쪽의 답변은 3개월이 훨씬 지나서 그해 12월9일에 나왔다. 예상보다 늦은 응답이었다. 북한은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명의로 “한반도 핵문제를 포함한 남북한의 정치·군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북한 사회단체와 해외교포들이 참가하는 ‘범민족대회’를 조속한 시일 안에 판문점이나 제3국에서 갖자”고 발표했다. 문화행사 중심의 우리 쪽 안과 달리 정치·군사 문제에 방점을 찍었지만, 분명 우리 제안에 화답하는 내용이었다. 범민족대회 준비에 깊숙이 관여했던 한 인사는 “남한의 운동세력이 북한을 향해 구체적인 통일운동 프로그램을 먼저 제시한 건 수십년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북한도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까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듬해인 1989년 1월22일 재야 운동단체들을 총망라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이 출범했다. 조국통일위원장에 임명된 이재오(1996년 김영삼 대통령의 신한국당에 입당해 5선 국회의원을 지냈다)씨는 범민족대회를 받아서 전민련 차원에서 행사를 추진해 나가기로 했다. 전민련은 범민족대회 예비회담 대표단을 구성하고, 우리 정부 승인을 얻어 북한과 공식 접촉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예상 밖의 사건으로 대회 추진은 전면 중단됐다. 1989년 3월25일 문익환 목사가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북한 주석과 역사적인 회담을 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국민이 평양을 방문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정부 승인을 받는 것도 불가능할 뿐 아니라, ‘북한 방문=간첩’이란 등식이 우리 사회를 짓누르던 시절이었다. 문 목사가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을 부둥켜안는 장면은 충격이었다. 남한에선 논쟁이 불붙었다. 문 목사가 4월3일 평양을 떠나 중국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 <조선일보> 기자가 물었다. “당신의 방북이 남한 사회에 대혼란을 야기한 점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문 목사의 대답은 “혼란을 두려워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해 6월엔 스무살의 대학생 임수경씨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그렇게 북한은 ‘금기의 땅’에서 점차 벗어났다.

문익환-김일성 두 차례 회동

북한당국과 시민들은 문 목사를 뜨겁게 환영했다. 김일성 주석은 두 차례나 문 목사를 만나 통일 문제를 논의했다. 극진한 환대에 가려졌지만, 통일운동에 대한 문 목사와 북한당국의 미묘한 의견 차이는 이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김창수 코리아연구원 원장은 이런 일화를 소개했다.

“문 목사님이 김일성 주석과 회담할 때였다. 나중에 범민련 북측본부 초대 의장을 맡은 윤기복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가 그 자리에 배석했다. 주체사상에 관한 얘기가 나왔는데, 문 목사님이 ‘수령을 위한 주체사상이 아니라 인민을 위한 주체사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윤기복 비서가 벌떡 일어나 ‘아무리 목사님이라도 그런 말씀은 용납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김 주석이 윤 비서에게 ‘가만 있으라’고 호통을 쳐서 그럭저럭 어색한 분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고 한다. 운동의 대중성과 자주성을 강조하는 문 목사님의 생각은 그때부터 확고했다고 볼 수 있다.”

4월2일 문익환 목사와 허담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장 명의로 발표한 9개 항의 공동성명엔 “(남과 북) 쌍방은 정치·군사 회담을 추진시켜 남북 사이의 정치군사적 대결 상태를 해소하는 동시에 이산가족 문제와 다방면에 걸친 교류와 접촉을 실현하도록 적극 노력한다”는 문구가 포함됐다. 정치·군사 문제 해결을 우선하는 북한이 남쪽의 교류·협력 병행 방침을 일정 부분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차이는 처음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유연함이 사라지고 관료적 경직성이 개입하는 순간 풀기 힘든 갈등으로 쉽게 비화한다. 남북 민간교류의 물꼬가 트이는 역사적 순간에도 갈등의 불씨는 희미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1989년 3월25일 평양을 방문한 문익환 목사(왼쪽)는 김일성 주석과 두 차례 만나 통일 문제를 논의했다. 문 목사가 김 주석과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나란히 서서 포즈를 잡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989년 3월25일 평양을 방문한 문익환 목사(왼쪽)는 김일성 주석과 두 차례 만나 통일 문제를 논의했다. 문 목사가 김 주석과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나란히 서서 포즈를 잡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989년 3월25일 중국 베이징공항에서 평양행 비행기에 오른 문익환 목사(오른쪽)와 재일동포 정경모씨. <한겨레> 자료사진
1989년 3월25일 중국 베이징공항에서 평양행 비행기에 오른 문익환 목사(오른쪽)와 재일동포 정경모씨.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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