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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오빠가 돌아왔다

등록 2016-10-11 09:00수정 2016-10-11 14:01

늙은 경찰기자의 일기①
보시다시피 나는 (아직) 젊다. 사진은 불과 4년 전에 찍었고, 그 뒤로 내 노화 속도가 유별난 것도 아니었다. “오빠”로 불리고 싶은 주관적 욕망을 잠시 내려놓고, 오로지 사회 통념과 우리 사회의 평균 나이, 노령화 추세 따위를 살펴 이 연재 꼭지의 제목을 정명(正名)하자면 ‘중년 경찰기자의 일기’쯤이 타당할 것이다. (날마다 쓰지 않으니 ‘일기’라는 표현도 문제 삼을 수 있겠지만 ‘진솔한 글쓰기’의 수사 정도로 이해하면 무방할 듯하다.)

스스로 정한 제목은 아니다. 하달됐다. 제목을 내려보낸 쪽에 견줘 내가 상대적으로 늙긴 했으나, 초등학생이 유치원생보다 늙은 이치와 다르지 않다. 내심 ‘오빠가 돌아왔다’ 정도를 기대했지만, 그럼에도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경찰기자는 상명하복이다. 죽으라 하면 죽는시늉도 한다”는 고릿적 신념을 내려놓은 지는 오래다. 그렇게 주장했다가는 곧바로 꼰대 취급받을 것임을 잘 안다. 그걸 아는 인지 능력 자체가 나의 늙지 않음을 유력하게 방증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런데도 나는 왜 저 제목을 순순히 받아들였을까.

무엇보다 <늙은 군인의 노래>를 오마주한 듯한 느낌에 감응했다. 김민기가 짓고 양희은이 부른 이 노래는 <늙은 노동자의 노래> <늙은 농민의 노래> 같은 개사곡 운동가의 계보를 형성했고, 내 기억의 노래집 속에서도 전설의 한 페이지로 세월과 함께 삭아가고 있었다. 세기가 바뀌고서야 그 목록에 한 줄이 늘게 되고, 더구나 새 목록의 주어가 바로 나라니…. 늙었다는데 “모욕은커녕 영광”이라고까지 말할 수 없지만, 거부감을 무장해제시키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사적인 이유만 있었던 건 아니다. 기자라는 직업에는 직급과 상관없는 암묵적인 생애주기가 있다. 서당 학동이 천자문 떼듯이 경찰기자는 기자로서 소싯적에 떼야 하는 과정으로 간주된다. 현장을 직접 뛰는 경찰기자 생활은 수습 직후나 몇 해 뒤에 짧게는 1년, 길어야 2~3년 하고 마친다. 다시 돌아오는 경우는 팀장이나 부팀장 직책을 맡을 때다. 이들 직책은 ‘캡틴’을 줄여서 “(시경)캡” “바이스캡”이라는 꽤 위계적인 이름으로 불린다. 캡은 대개 10년차 안팎의 기자가 맡는다. 나는 (불과) 십수년 전 캡을 지낸, 올해로 (겨우) 24년차 기자다. 한 달 전쯤 경찰기자를 지원해 다시 왔다. 내가 수용한 건 생물학적 늙음이 아니라 직업적 생애주기로서의 늙음, ‘경찰기자’ 앞에 붙는 관형어로서의 늙음이었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나의 수용성을 극대화한 요인은 좀 더 내밀한 데 있다. 나는 저 ‘늙은’이라는 관형어를 반전이 예비된 문맥으로 읽었다. “몸은 늙었어도 마음만은 청춘”이라는, 모든 나이 든 존재들의 이구동성 말이다. 나이 든 존재들은 예외 없이 자신을 예외적인 입지(‘나는 안 그래’)에 놓으며, 자기만큼은 진정성의 화신임을 자처한다. 내 버전은 이랬다. ‘두고 보라지. 너희만큼 빠릿빠릿하게 취재하면서도 너희는 절대 따라올 수 없는 웅숭깊은 기사를 쓰리라.’ 그렇게 소매를 걷어올리듯 ‘늙은’을 수용했다. 하지만 그것이 비극과 희극을 하나의 장르로 통합하는 사태의 출발점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2007년 서울 종로경찰서 출입기자들이 기사를 송고하고 있는 모습. 김진수 기자
2007년 서울 종로경찰서 출입기자들이 기사를 송고하고 있는 모습. 김진수 기자

처음에 든 걱정은 10년 전쯤 심하게 부러진 적이 있는 왼쪽 무릎 정도였다. 그마저 대중교통이 잘 갖춰진 서울의 현장을 뛰는 데는 대수롭지 않은 문제라고 여겼다. 하지만 노트북과 주변장치, 명함 통뿐 아니라 하루하루 불어나는 각종 종이 자료들까지 배낭에 담아 메고 다니려니 몸이 저절로 뒤로 젖혀진다. 초만원의 지하철 객차 안에서 배낭을 밀치는 손길에 이리저리 쓸리다 보면 온몸이 휘청거리고 속옷이 폭 젖을 만큼 비지땀이 쏟아진다. 지하철역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도 만만치 않다. 될수록 천천히 걷고, 러시아워에는 무리해서라도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내가 찾은 나름의 해법이다.

도무지 해법을 찾을 수 없는 난제들도 있다. 단톡(단체카톡)이 대표적이다. 현장에 돌아와 보니 단톡은 정보 공유와 의사 결정을 위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확고히 뿌리 내려 있었다. 문제는 개입해야 할 단톡방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나는 사회 에디터석 안에서만 3개의 단톡방에 가입해 있다. 내가 속한 24시팀의 단톡방은 보고하고, 묻고, 답하고, 지시하고, 정보를 보태고 공유하는 메시지로 온종일 쉴 새 없이 알람이 울어댄다. 출입처 기자실 단톡방은 들어와 있는 기자 수가 70여명을 헤아린다.¹ 그만큼씩 가입자가 있는 인근 기자실 두 곳의 단톡방에도 들어가 있다. 몇몇 국회의원실 단톡방 같은 데도 들어가 있는데, 마침 지금이 국감 기간이다. 알람은 걸을 때도 울리고, 먹고 마실 때도 울리고, 화장실에서도 울린다. 지난달 25일 백남기 농민이 돌아가셨을 때는 인근 기자실 단톡 알람이 이튿날 새벽 3시께까지 베갯머리 맡에서 울렸다.

스스로 단톡 알람 신경증을 의심하고 있자니, 이 증상과 늙음의 상관성도 궁금해진다. 눈을 가늘게 뜨고 먼 시간을 돌이켜본다. 24년 전에도 어떤 소리에 시달렸던 기억이 있다. “삐삐.” 데스크나 캡 또는 선배가 삐삐로 찾으면 하던 일을 즉시 중단하고 공중전화 부스를 향해 달려야 했다. 숨을 헐떡이며 전화를 걸면 수화기 너머에서 “늦었다”고 경을 치고, “보고 내용이 허술하다”고 경을 쳤다. “삐삐.” 그 단말마 같은 기계음에 기겁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한동안 알람이 울리지 않아도 불안했다. 소리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부랴부랴 삐삐를 꺼내 살펴보곤 했다. 언제부턴가 주기적으로 환청까지 들렸다. “삐삐.” 액정에는 아무 숫자도 찍혀 있지 않았다.

그때도 뾰족수가 없었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성격은 다르다. 그 시절 핸드폰이 있었다면 공중전화로 달려가느라 짜장면이 떡져 세 번씩 다시 주문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대신 전화벨 소리에 경기를 일으켰을지 모른다. 삐삐 신경증은 당시 수습기자라는 더없이 ‘저렴했던’ 내 사내 위상과 무관하지 않았다. 반대로, 지금이 여전히 삐삐 시대라 해도 난 보들레르의 ‘만보자’처럼 공중전화 부스를 향해 바람결 따라 천천히 흘러갈 것이다. 아쉬운 건 전화를 기다리는 쪽일 테니까. 하지만 그런 배짱도 자지러지는 단톡 알람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삐삐와 원고지로 기자 생활을 시작한 이의 기술지체일까. 내 하소연에 공감하는 젊은 동료들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하다. 내가 늙은 탓이 아니다. 세렝게티의 사자도 파리떼는 버거운 법이다. 기술은 호모 사피엔스의 수용능력을 이미 초과했다.

24년은 조선시대 속도로도 산천이 두 번 반 바뀌는 시간이다. 현대의 기술 진화 속도는 기하급수적이다. 기술은 세태까지 바꿔놓았다. 경찰서 기자실에 다시 나오던 첫날, 본관 현관을 들어서자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유리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 옆에 책상을 놓고 앉아 있는 경찰관에게 물으니 지문인식기에 손가락을 갖다대라고 한다. 결국 홍보 담당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들어갈 수 있었다. 세월호 특조위 사무실을 처음 찾았을 때도 지문인식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리문을 큰 소리 나게 두드렸다. 누군가 나와서 문을 열어주더니 손가락으로 벽에 붙은 종이를 가리킨다. ‘방문객은 벨을 눌러 주십시오.’

새로 등장하는 게 있으면 사라지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삐삐는 스마트폰 단톡방으로, 일대일 주고받기는 수십명의 무차별 떠들기로 대체됐다. “어느 게 경비전화입니까?” 기자실에서 처음 만난 기자와 인사를 나누고서 물었다. “네?” 외계인을 환대하려는 의지가 그의 표정에서 엿보였다. 아무도 경비전화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교환원이 전국 어느 경찰 조직으로도 연결해주는 그 고마운 물건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까. 예전 그대로인 것을 찾기 어렵다. 딱 하나 달라지지 않은 게 있었다. 사람(단수)! 나는 이곳 기자실을 18년 전에도 출입했었다. 그때 기자실 여직원이 지금도 있다. 그녀와 다시 마주한 첫날, 우리는 한 손으로 각자의 입을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로 서로를 가리켰다. 상대의 이름을 떠올리려고 실눈을 뜬 채 한참을 굳어 있었다. 20대였던 그녀도 어느덧 노안이 왔다고 했다.

요즘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예상하시는 대로다. “왜 돌아왔느냐”는 물음에는 ‘굳이’라는 부사가 괄호 처져 있다. 준비해놓은 답은 없다. 안 돌아올 수도 있었고, 돌아올 수도 있었다. 다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다. 지난해 노벨 문학상을 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읽고 올해 조지 오웰의 르포르타주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잊고 지낸 연인처럼 현장이 그리워졌다. 오래전 현장을 떠난 뒤 사유는 조금 깊어진 듯한데 사실(팩트)에 얼마만큼 정합적인지 회의감도 깊어졌다. 사유와 사실 사이의 종심을 단축할 수는 없을까. 진실은 사실의 껍데기 속에 들어 있지만, 모든 사실이 진실을 품고 있지는 않다. 반대로, 사실을 굴착해 들어가지 않은 진실은 검증할 수 없다. 나는 이 관계 회로를 완성하기 위한 무모한 실험을 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맞닥뜨린 현실은 높은 장벽이다. 괜한 만용과 노욕을 부린 것 같아, 기자로서의 생애주기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생애주기까지 받아들이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도 있다. 거리에 서면 짙은 안갯속 한가운데 유기된 듯한 느낌이 든다. 24년 전 기자로 처음 거리에 섰을 때의 막막함에서 한치도 달라지지 않았다. 나이 먹어가며 도대체 뭘 했기에 이 지경일까 싶다가도, 그 낯익은 막막함에서 문득 위안을 얻는다. 진실을 품은 사실을 식별하는 것도, 그 사실을 뚫고 진실에 다가가는 것도 결코 몇 가지 유형으로 경로화할 수 없다. 거리에 나설 때마다 매번 낯설고 막막하다는 건 내가 아직 구제불능으로 닫히지는 않았다는 방증이라고 믿고 싶다. 진실의 그림을 숨겨 놓은 거리라는 매직아이를 뚫어져라 응시할 일이다.

*각주¹: 경찰서 기자실 한 곳의 출입기자가 70여명인 건 아니다. 기자실 단톡방 가입자 수의 3분의 2 이상은 인근 기자실들과 중복돼 있다. 매체별로 한쪽 기자실의 기자가 부재중일 때를 대비한 기자실 간 정보 공유체계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요즘은 그것을 ‘백업’이라고 부른다는데, 예전에는 겸임을 뜻하는 일본어 ‘가케모찌’로 불렀다. 내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후배들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봤다.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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