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의 물대포를 맞은 뒤 의식을 잃고 서울대병원에 입원 중이던 백남기 농민의 딸인 백도라지씨가 지난 3월20일 오후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일인시위를 하려다 경찰들이 동행인 문제를 제기하며 진입을 막자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인근에서 항의를 하며 서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백남기 농민이 숨진 지 20여일이 지났지만 부검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르며 유족들은 아직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있다. 경찰은 유족의 비타협적인 태도를 탓하지만, 유족과 투쟁본부 쪽은 부검이 사인을 다른 요인으로 돌리려는 의도가 있지 않나 의구심을 갖고 있다. 유족 쪽의 국가기관에 대한 불신이 깊어진 데는 검찰, 경찰, 여당 국회의원들 등이 그동안 늑장수사 및 사인 물타기 시도를 하며 자초했다는 지적이 많다. 꽉 막힌 상황을 풀기 위해선, 이런 국가기관과 정치권의 태도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7일 “국가기관과 정치권의 태도 때문에 유족과 대책본부가 더 강경해지고 있다. 경찰과 협상해볼 여지 자체가 없다. 안타깝다”고 말했다.
①동영상 있는데도 300일 넘게 사인 모른다는 검찰 백씨 사망 원인 수사에 미온적인 검찰은 유족이 정부를 불신하게 만든 주범이다. 지난해 11월14일 민중총궐기 시위 현장에서 백씨가 경찰 물대포에 맞아 쓰러지자 유족들은 나흘 뒤 당시 강신명 경찰청장과 구은수 서울청장 등 경찰 7명을 살인미수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그러나 검찰 수사는 300일 넘는 기간 동안 매우 더뎠다. 고발 7개월 만인 지난 6월 현장지휘관인 당시 4기동단장을 비롯해 총 4명을 한 차례씩 불러 조사한 게 전부다. 백씨가 숨지자 겨우 구은수 전 서울청장을 비공개로 불러 피고발인 조사를 했다.
검찰의 이런 태도는 당시 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재판에서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에 대한 태도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검찰은 집회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지난해 12월11일 한씨를 구속 기소했다. 유족이 “공권력이 선택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검찰에 공정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며 특별검사제 도입을 촉구하는 이유다.
경찰도 불신을 부추기기는 마찬가지다. 이철성 경찰청장은 지난달 26일 기자간담회에서 “백남기 농민이 애초 병원에 입원했을 땐 두피 밑으로 출혈(지주막하 출혈)이 있었다고 돼 있는데, 주치의는 신부전(신장기능 약화)으로 인한 심장정지로 병사했다고 밝혔다”며 사인이 불명확해 부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백씨는 외부충격에 의한 뇌출혈로 입원했고 장기간 병원생활을 하면서 2차적으로 급성신부전 등 여러 질병을 얻었다. 유족들은 이 청장의 이런 발언이 경찰 수장으로서 져야 할 법적, 도의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며 거세게 비판했다.
②뒤늦게 빨간우의설 유포하는 여당 의원들 백남기씨가 물대포에 맞아 숨진 게 아니라는 ‘빨간우의설’은 국가 책임을 흐리는 대표적 물타기론이다. 여당 의원들까지 나서서 이런 주장을 일삼으면서 정부에 대한 유족의 불신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극우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에서 처음 유포된 것으로 알려진 ‘빨간우의설’은 지난해 11월 김수남 검찰총장 인사청문회에서 새누리당 김진태·김도읍 의원이 언급하며 널리 알려졌다. 최근 나경원 새누리당 의원도 국회 국정감사에서 재차 빨간우의를 언급했다.
하지만 이 주장은 경찰조차 공식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경찰은 지난 5월 백씨 유족이 경찰을 상대로 제기한 민사소송 담당 재판부에 답변서를 제출했다. 이때 경찰은 ‘백씨는 물대포로 쓰러졌다’고 명확히 밝혔다. ‘빨간우의를 입은 남성이 가격했을 수도 있으니 경찰은 책임 없다’는 식의 주장은 한차례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17일 김정훈 서울지방경찰청장은 기자간담회에서 경찰이 지난해 12월 ‘빨간우의’ 남성을 집시법 위반 등의 혐의로 불러 조사할 때 가격설에 대해선 전혀 조사하지 않았다고 처음으로 밝혔다. 당시는 이미 일부 국회의원들이 이 남성에 대한 수사 필요성을 제기할 때인데, 경찰은 애초 ‘빨간우의’를 사망 원인 중 하나로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았던 것을 자인한 셈이다.
하지만 백씨가 숨지자 경찰은 ‘빨간우의설’을 사망 원인 중 하나로 언급하기 시작한다. 백씨 주검에 대한 부검영장이 한차례 기각되자 경찰은 두번째 영장을 신청하면서 ‘빨간우의설’을 부검이 필요한 사유로 적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기관의 한 인사는 “물대포와 죽음 사이에 하나의 사건을 더 끼워넣어 직접사인인 물대포를 간접사인으로 만들려는 시도”라고 비판했다.
③‘병사’라 우기는 서울대 주치의 서울대병원은 불난 데 기름을 부었다. 백남기 농민 주치의는 백씨가 숨지자 사망진단서를 발급하면서 사인을 ‘병사’로 기재했다. 죽음에 이른 최초의 원인이 질병 아닌 외부 요인이라면 사망의 종류를 ‘외인사’로 적어야 한다는 대한의사협회의 ‘진단서 등 작성·교부지침’을 어긴 것이다. 의과대 학부생들과 동문 의사들이 ‘사망진단서는 틀렸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장도 “백씨의 사망은 외인사”라는 의견을 밝혔다. 대한의사협회조차 이례적으로 사망진단서가 잘못됐다는 입장을 내놨다. 하지만 주치의인 백선하 과장은 유족들의 사망진단서 정정 요청에 응하지 않고 있다. 백 과장은 “가족들이 적극적인 연명치료에 동의하지 않아 백씨가 사망했다”며 책임을 유족에게 돌리기도 했다. 법정에서 백남기 농민의 사인을 밝히는 데 사망진단서는 참조자료일 뿐, 결정적인 자료도 아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 주치의 출신이 원장으로 있는 병원이 백씨 사인을 ‘병사’라 우기는 사망진단서를 고수하면서 유족들은 더더욱 국가를 믿지 못하고 있다.
④갈등 봉합 어렵게 하는 극단적 유족 혐오 유족 혐오 발언은 갈등을 극단으로 치닫게 만들고 있다. 주치의 백 교수가 “유족이 연명 치료에 반대해 숨졌고, 따라서 병사”라고 밝힌 뒤, 국회의원과 보수단체 대표 등은 백씨 사망 책임을 유족에 떠넘기고 있다.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 4일 페이스북에 “(가족의 요청으로) 적극적인 치료를 했다면 (백씨는) 사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 딸은 아버지가 사망한 날 발리에 있으면서 페북에 ‘오늘밤 촛불을 들어주세요. 아버지를 지켜주세요’라고 썼다”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웹툰 작가 윤서인씨도 지난 4일 자유경제원 한컷만화에서 “아버지는 중환자실 침대에, 나는 휴양지 리조트 썬베드에”라는 문구와 함께, 백민주화씨로 보이는 한 여성이 해변가에서 비키니를 입고 ‘아버지를 살려내라, ×같은 나라'라고 페이스북에 적는 모습을 그렸다. 급기야 장기정 자유청년연합 대표는 유족을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로 검찰에 고발하겠다고 페이스북을 통해 밝히기도 했다. 유족 변호인단은 지난 11일 장 대표와 윤서인씨 등을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표창원 더민주 의원은 “유족을 가해자로 몰아가는 이런 식의 행태가 계속되다 보니 중재하기가 참 어렵다”며 “투쟁본부는 다음달 12일 민중총궐기를 강하게 준비하고 있다. 경찰도 차벽이나 물대포를 동원할 것 같다. 그 전에 정부에서 사과하고 특검을 수용해서 유족 쪽과 평화롭게 마무리지었으면 싶은데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고한솔 허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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