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행 통보 뒤 병원서 유족면담 요구
9개 중대 720명 병력 배치했다가
유족이 거부하자 3시간만에 철수
서장 “유족뜻 존중…집행 다시 검토”
‘영장 재신청 위한 명분 쌓기 분석’ 나와
백남기 농민에 대한 부검영장 집행이 예고된 2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시민들이 강제부검을 반대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경찰이 고 백남기 농민에 대한 강제부검을 시도하다 유족 반대에 막혀 돌아갔다. 실제 부검영장 집행에 뜻이 있었다기보다 ‘영장을 집행하지 못했으니 재발부해달라’는 명분쌓기용 연출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서울 종로경찰서는 23일 오전 9시35분께 “부검영장을 오전 10시에 집행하겠다”고 고 백남기 농민 유족에게 통보했다. 경찰은 “현장 상황에 따라 충돌도 감수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부검영장 강제집행 계획이 알려지자 백남기 투쟁본부 쪽 인사들과 부검에 반대하는 시민, 학생들이 장례식장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장례식장에 있던 탁자 등 집기를 모아 바리케이드를 만들어 출입구를 막았다. 문규현 신부 등 여러 사제와 수녀들도 영안실 앞을 몸으로 막아섰다. 더불어민주당 박주민·정재호 의원, 정의당 심상정·윤소하 의원 등도 장례식장으로 속속 모였다. 서울대병원 주변에 경찰버스가 대규모로 배치돼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긴장감은 더 커졌다. 시민들은 장례식장 1층 진입로에서 몸으로 스크럼을 짜고 지켰고, 3층 현관에서는 대학생들이 “우리가 백남기다”, “부검 절대 안돼”라고 쓰인 종이를 들고 입구를 지켰다. 백남기 농민의 시신이 안치된 영안실이 있는 지하 진입로에서는 대학생과 시민들이 몸을 쇠사슬로 묶고 경찰 진입에 대비했다.
홍완선 종로경찰서장은 오전 10시께 형사들과 함께 서울대병원을 찾아 유족 면담을 요구했다. 홍 서장은 “유족과 면담하게 해달라. 유족 뜻을 확인하겠다”고 요구했다. 유족이 만남을 거부하자 경찰은 유족 쪽 법률대리인들과 대화를 나눴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법률대리인 말고 유족을 직접 만나 반대 의사를 확인하면 오늘은 강제집행을 안 하고 돌아가겠다”고 거듭 유족 면담을 요구했다. 백씨의 큰 딸 도라지씨는 “저희가 만나기만 해도 협의했다는 명분을 쌓고 부검을 강제로 진행하려고 하는 것”이라며 끝내 만남을 거부했다.
결국 유족을 만나지 못한 경찰은 강제집행 시도 3시간여만인 오후 1시께 철수했다. 홍 서장은 철수 전 기자들에게 “유족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언론을 통해 명시적으로 (부검) 반대 입장을 전달받았다"며 “그 뜻을 존중해 영장 집행을 하지 않고 철수하겠다”고 밝혔다. 재집행 시도 여부에 대해선 “검토해보겠다”고 답했다. 서울대병원 인근에 대기시켜놨던 9개 중대 800여명의 병력도 함께 철수했다.
이날 경찰은 한차례도 진입 시도를 하지 않았다. 부검 영장 시효 만료를 이틀 앞둔 시점에서 경찰이 집행시도 모양새만 연출하다 맥없이 돌아선 것을 두고 ‘영장 재신청을 위한 명분 쌓기’라는 분석이 나온다. 집행시도도 없이 영장을 재신청하는 건 명분이 약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6차례나 협의 요청 공문을 보낸 경찰이 유족의 뜻을 몰랐을 리 없는데도 거듭 유족 직접 면담을 요구한 점도 ‘명분 쌓기용 연출’이라는 분석에 힘을 보태고 있다. 한 경찰 관계자는 “애초에 영장을 집행할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장 집행 안 했다’를 ‘영장 집행 못 했다’로 바꾸는 데 성공했으니 이번 영장 만료 때까지 재집행 시도는 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영장 재신청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족과 백남기 대책본부는 경찰이 부검 영장을 재신청해도 법원이 기각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유족 쪽 변호인단인 조영선 변호사는 “영장 발부 근거가 됐던 두 가지 중 하나인 ‘사망진단서에 기재된 병사’는 대한의사협회까지 잘못됐다고 밝힌 상황이다. ‘빨간 우의 가격설’도 국회에서 공개된 동영상 자료와 본인이 언론에 나와 발언한 진술에 따라 기각됐다. 현재 부검을 강제집행할 명분이 없고, 재청구된다고 하더라도 법리적으로 발부할 명분이 없다”고 말했다.
허승 고한솔 박수진 기자 rais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