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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기울어진 헌재, 전두환 작품이었다

등록 2016-12-29 08:37수정 2017-01-06 17:32

[1987~2017 광장의 노래] 87년 헌법이 낳은 헌재

6월항쟁으로 쟁취했다는 헌재
개헌 시안에 없다가 추후 삽입
현경대 전 의원 “전두환 지시”
야당 요구로 설립 통설 뒤집어

일러스트 김대중
일러스트 김대중

모든 광장은 체제 변혁을 수반하거나 제도 변화로 수렴된다. 2016년 이전까지만 해도 최대 규모의 광장 시위였던 87년 6월 항쟁은 새로운 헌법을 남겼다. 87년 헌법에서 대통령 직선제와 함께 가장 중요한 제도의 변화가 헌법재판소 신설이다. 그런데 이 헌법재판소가 실은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과 전두환 대통령의 작품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헌재가 야당의 요구로 신설됐다고 알려진 통설은 사실이 아니었다. 이른바 ‘3(대통령):3(대법원장):3(국회)’ 임명권으로 대통령이 헌재를 지배할 수 있게 된 것도 이 탄생 비화와 관련 있었다. 직선제 쟁취로 승리했다고 방심했던 당시 민주세력은 양김 분열로 정권 교체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30년 가까이 잘못된 사실을 믿으며 스스로를 속여왔던 것이다.

87년 개헌 당시 여당 개헌특위에 참여했던 현경대 전 의원(민정당)이 공개한 여당 보고서(헌법개정요강안 주요쟁점 검토보고)와 현 전 의원 자필 메모. 위헌법률심사권을 대법원에 주자는 여야의 방안을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보고하자 전 대통령이 반대했고, 이 자리에서 헌법재판소 신설 방안이 처음 나왔다고 현 전 의원은 증언했다.
87년 개헌 당시 여당 개헌특위에 참여했던 현경대 전 의원(민정당)이 공개한 여당 보고서(헌법개정요강안 주요쟁점 검토보고)와 현 전 의원 자필 메모. 위헌법률심사권을 대법원에 주자는 여야의 방안을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보고하자 전 대통령이 반대했고, 이 자리에서 헌법재판소 신설 방안이 처음 나왔다고 현 전 의원은 증언했다.
당시 여당 개헌특위에 참여했던 현경대 전 의원(민정당)은 지난 16일과 23일 <한겨레>와 만나 “헌재는 여야가 합의해 도입했지만 제안자는 여당이었다”며 “특히 전 대통령이 헌재 탄생에 큰 역할을 했는데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현 전 의원이 공개한 87년 7월 여당의 보고서(헌법개정요강안 주요쟁점 검토보고)와 자필 메모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이 보고서는 ‘위헌법률심사권은 대법원에 부여, 헌법위원회 폐지’라는 소제목 아래 민정당과 통일민주당의 공동안이라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애초에 여당과 야당은 위헌법률심사권을 헌재가 아닌 대법원에 주는 쪽으로 의견을 모은 것이다.

현경대 당시 의원을 포함한 여당 개헌특위 소속 김숙현·남재희 의원은 87년 7월24일 이 보고서를 들고 청주 청남대에서 휴가를 보내던 전 대통령을 찾아갔다. 전 대통령은 당시 여당 총재였다. 개헌안을 보고받은 전 대통령은 반대했다. “대법원이 정당해산을 심판하면 운동권이 만날 그 앞에서 데모할 텐데, 대법원을 그렇게 만들면 안 되지.”

그 자리에서 헌재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헌재는 ‘4·19 혁명’으로 탄생했던 제2공화국에서 헌법재판을 맡았던 곳이다. 제2공화국의 단명으로 미처 구성되지도 못한 채 헌법 속 제도로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현 의원은 보고서에 “헌법재판소 신설 검토”라고 메모했다. 그 옆에 괄호 안에 들어 있는 “대법원”은 위헌심판권을 헌재에 주면 대법원이 반발할 가능성이 있으니 그 의견을 먼저 표명하도록 하라는 전 대통령의 지시를 적은 것이다.

3:3:3 비율 왜 문제인가

겉으론 균형 맞춘듯 보이지만
대통령이 대법원장 임명하는 현실
대통령·여당이 최소 7명에 영향

박정희 독재 위해 만든 ‘3:3:3’
전두환이 복제한 뒤 30년째 유지 

이 자리에 동석했던 남재희 당시 의원은 전 대통령이 이날 “헌법위원회와 헌법재판소 중 어느 게 좋은가”라고 물었다고 기억했다. “헌법학자들이 대부분 헌법재판소를 두어야 한다고 합니다”라고 답하니 “그러면 그렇게 해” 했다는 것이다. 그는 <한겨레>에 “그때 대통령이 ‘미국은 어떤가?’라고 물었다면 헌재는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에선 대법원이 위헌 여부를 판결하고 헌재는 독일 등 유럽에서만 채택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87년 개헌 과정을 연구한 정상우 인하대 교수(사회학)는 “갑자기 왜 헌재 설립 얘기가 나오는지 배경을 알 수 없었는데 이번 증언과 자료를 보니 청와대 지시가 맞는 것 같다”며 “(당시) 메모나 속기록을 남기는 것이 관례나 절차로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에 정확한 헌법 개정의 배경이나 과정을 이해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한겨레>가 사실관계 확인을 요청하자 헌재는 “현재로는 사실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 10년사>와 <헌법재판소 20년사>는 “87년 7월에 여당은 정치적인 문제에 대법원이 개입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므로 독립된 헌법위원회를 설치해 담당하게 하자고 했고, 야당은 이(헌법재판) 권한을 모두 대법원에 부여하자고 주장했다”고 돼 있다. 이는 절반의 진실이다. 당시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회의록이나 개헌협상 전담기구(8인 정치회담)의 여야 헌법안 쟁점 대비표 등을 보면, 여당은 헌법위원회 유지가 아니라 폐지를 요구했다. 대안으로 헌재 신설을 제시했다. 반면 야당은 헌재도 헌법위원회처럼 국가 재정만 축내는 ‘휴면기관’이 될 것이라고 꺼려했다.

재판관 구성 바꿀 대안은

독일 헌재는 16명 재판관 전원
의회 선출에 3분의 2 동의 필요
대통령이 임명하는 한국과 달라

헌법학 교수나 재야 변호사 등
재판관 참여 폭 넓힐 필요 커

여야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헌법소원제도’라는 예기치 못한 실마리로 접점을 찾았다. 헌법소원은 공권력에 의한 기본권 침해를 헌법소송절차를 통해 구제받는 제도다. 독일 등 선진국에선 이미 제도화했지만 우리나라에선 낯설었다. 헌법소원제도 도입을 제안한 것은 야당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남산 중앙정보부나 서빙고동 보안사에 영장 없이 끌려가는 걸 두려워했다. ‘8인 회담’에 참여했던 이중재 의원(민주당)이 공권력에 의한 피해를 구제할 수 있는 헌법소원을 제안했다.”(현경대)

여당은 헌법소원제도 도입을 반대했다. 그러자 야당은 법관추천회의를 협상 카드로 내밀었다. 여당은 대법원장을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길 원했지만, 야당은 법관추천회의 제청으로 국회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자고 했다. 당시 법관추천회의 설치는 ‘사법부 민주화’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법관추천회의가 뽑으면 대통령 권한을 견제하고 사법부 독립성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8월21일 야당은 법관추천회의를 포기하는 대신 헌법소원을 얻었다. 여당은 헌재 신설과 대통령의 대법원장 직접임명권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헌재와 대법원 구성은 여당의 뜻대로 마무리된 셈이었다.

헌법재판기관으로서 제구실을 못했던 헌법위원회를 폐지한 것은 87년 6월 항쟁의 힘이었다. 그러나 헌재 신설은 아니었다. 전 전 대통령의 요구로 민정당이 급조했고, 그 결과 독재정권의 잔재를 고스란히 품고 태어났다. 87년 헌법을 보면, 헌법재판소 재판관 9명은 국회가 3명, 대법원장이 3명, 대통령이 3명 뽑도록 돼 있다. 겉으로는 권력분립의 원칙에 충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민주적 정당성이나 다원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게 대다수 헌법학자의 견해다.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는 “헌재는 대통령 소속 정파에 우월성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재판관을 구성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통령 몫 3명과 국회 몫 3명 중 여당에 보장된 1명을 합치면 대통령·여당은 최소 4명의 재판관을 확보할 수 있다. 대통령이 대법원장을 임명하므로 대법원장 몫 3명에도 대통령이 영향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대통령·여당과 뜻을 함께하는 재판관이 최소 7명이 된다. 여야가 합의로 추천한 국회 몫(1명)까지 끌어들인다면 8 대 1 결정도 가능하다.

통합진보당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야당이 추천한 김이수 재판관을 제외한 8명이 통진당 해산 쪽에 손을 들었다. 이명박·박근혜 등 보수정권이 이어지면서 헌재가 보수 일색으로 채워진 탓이다. 헌재 사상 처음으로 공안검사 출신이 헌법재판소장을 맡고 있고, 새누리당이 ‘공안통’ 검사장 출신을 재판관으로 선출했다. 나머지 7명은 모두 고등법원 부장판사(차관급) 이상 ‘평생 법관’들이다. 순수 변호사 출신도 없다. 헌법이 헌법재판관 자격을 “법관의 자격을 가진 자”로 한정해 헌법학 교수는 재판관이 될 길이 아예 막혀 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는 “전세계 어느 곳에서도 헌법재판소를 이렇게 폐쇄적이고 획일적으로 구성하는 나라는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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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운동장’은 87년 헌법이 예고한, 아니 의도한 결과물이다. 허영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헌법학)는 “헌법재판관 임명 방식은 유신시대의 잘못된 제도를 맹목적으로 수용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72년 헌법재판을 맡을 헌법위원회를 신설하면서 이를 장악할 도구로 ‘3:3:3 원칙’을 고안했다고 허 교수는 밝혔다. “유신시대는 대통령이 임명한 국회의원도 있어 3:3:3 원칙으로 충분히 위헌 결정을 봉쇄할 수 있었다. 발상 자체가 독재 수단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을 전두환 정권이 그대로 따랐다. 87년 헌법은 헌법재판소를 신설하면서, 헌법위원회 구성 원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현행 헌법은 87년 6월 항쟁의 결실로 탄생했기에 기본권 보장의 최후 보루라 자임한다. 하지만 정작 이 헌법을 수호해야 할 헌재 구성에선 민주주의 기본원리가 구현되지 않고 있다. 반면 우리 헌재의 모델인 독일의 경우 16명의 재판관 전원을 의회가 선출하며 ‘3분의 2’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다. 다수당과 소수당이 모두 찬성하는 재판관을 선출해야 한다는 의미다. 허영 교수는 “헌법을 개정해서라도 재판관의 선임 방식은 뜯어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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