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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정치 바뀌어야 살기 좋아져” “아빠, 개인의 삶이 먼저죠”

등록 2016-12-29 09:29수정 2016-12-29 09:47

[1987~2017 광장의 노래 ③ 광장, 그후] 50대 아빠와 20대 딸의 ‘광장 썰전’

민주화세대 아빠
“요즘 세대 참정권의 힘 몰라”
엔(N)포세대 딸
“20대 투표 안한다는 생각은 편견”

23일 오후 경기 수원 권선구에서 아빠 최윤(왼쪽)씨와 20대 딸 최지현씨가 육교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수원/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23일 오후 경기 수원 권선구에서 아빠 최윤(왼쪽)씨와 20대 딸 최지현씨가 육교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수원/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이것은 마치 부녀간의 ‘썰전’ 같았다. 아버지 최윤(56)씨와 딸 최지현(23)씨는 목소리를 높이며 맞서기도 했고, 의외라는 듯 놀란 표정을 짓기도 했다. 가깝고도 먼 부녀 사이는 ‘민주화 세대’와 ‘엔(N)포 세대’의 갈등과 공존을 고스란히 압축시켜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23일 경기 수원시 한 커피숍에서 진행한 아빠와 딸의 ‘광장 대담’은 탐색전으로 시작했다. 기자를 사이에 두고 각자의 학창 생활을 이야기하는데, 처음 듣는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 이야기 왜 안 했었니?” “아빠 저 이야기는 정말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네요.” 다소 민망한 삼자간 대화는 한참을 이어졌다. 공부를 잘했던 아빠는 지역 명문고로 진학하고 나서 ‘논두렁 깡패’가 됐다고 한다. “경찰 출신이셨던 엄한 아버님한테 벗어나면서 놀기 좋아하는 성미가 나왔던 것 같아요.” 지역에서 힘깨나 쓴다는 건달들이 스포츠와 공부에 능한 학생들을 아우로 데리고 다니며 폼 잡던 시절이었다. 최씨는 명문고에 다니면서도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케이스로 섭외된 상황이었다. 딸이 보는 앞이라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꽤나 ‘놀았던’ 눈치다.

그렇게 놀고도 지역 국립대 화공과에 입학한 최씨는 2학년 때 ‘광주 민주화 항쟁’을 경험했다. 운동권에 낄 자신이 없어, “대학에 와서도 시골 친구들하고 놀기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 시절의 기억은 압도적이었다. “대학 친구들이 상무대에 끌려갔어요. 학생운동을 조금이라도 했던 친구들은 최전방으로 강제징집됐어요. 저는 광주에 있던 누님 댁에 숨어 있다가 공수부대가 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화순 쪽으로 도망쳤어요. 화순 넘어 순천까지 도망쳤는데도, 특전사 개구리복을 닮은 예비군복을 보면 심장부터 뛰었습니다. 사태가 다 진정되고 나서야 광주로 돌아갔는데 콜레라가 돌았어요. 시체가 쌓여서 전염병이 도는 거라고….” 최씨는 학교생활을 이어갈 자신이 없었고, 군대에 다녀온 뒤 무작정 상경해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아빠 최윤씨
광주 민주화운동이 전환기
그때는 놀아도 취직은 편해
광장 이후 ‘제도 민주주의’로

딸 최지현씨
박근혜 하야 촛불 경험
막상 취직할 때 되니 막막해
‘광장 민주주의’ 순수한 힘 믿어

아버지의 경험담에 딸이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아버지는 “남들처럼 광주항쟁이라도 참여하고 중퇴했다면 부끄럽지는 않았을 텐데, 그저 놀다가 중도 포기한 셈이라서 집에서는 이야기를 별로 안 했어요”라고 말했다. 대학을 졸업했다면 아버지의 삶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화공과를 졸업하면 여천 석유화학단지로, 기계과를 졸업하면 광주 아시아자동차(기아차) 공장으로 곧장 취업하던 시절이었거든요.” “그래도 그때는 취직은 편했네요.” 이번엔 딸 차례다. 대학 졸업을 내년 1학기 뒤로 늦췄다는 딸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막막함에 힘겨워하고 있다. “고전을 읽고 인문학적 가치에 대해 토론하고, 자유전공학부에 입학하고 나서 배운 공부 자체는 정말 좋았거든요. 그런데 막상 취업할 때가 되니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선배들 봐도 공무원 시험에 통과한 사람 말고는 취직한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예요.” 2학기 기말고사를 마친 딸은 겨울방학부터 본격적인 취업 준비에 나설 예정이다. 일찌감치 취업전선에 뛰어든 공대 친구들한테 사전 조사도 했다. 자격증, 한국사(공기업용), 토익, 오픽(국제공인외국어회화시험)…. 대전·충남권 중소기업을 포함해 여러 취업정보를 알아보던 지현씨는 어떡해야 할지 엄두가 안 나, 오랜 꿈을 향해 제대로 뛰어보기로 결심했다. “‘언론고시라고 하죠. 기자 되는 시험을 준비해보려고요. 아무래도 (학교가 있는) 대전에서 준비하기는 어려워서, 서울에서 스터디도 하고 언론고시 관련 학원도 다녀보려고요. 아, 근데 이건 아직 아빠한테는 이야기 안 했던 건데.” 잠시 아버지의 표정이 꿈틀한다. 정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보니 둘 사이 생각의 차이가 좀더 극적으로 노출됐다. 이번에도 아버지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바쁘고 힘들다고 자기 권리를 행사 못 하면 그건 바보가 되는 거 아닌가요? 젊은이들은 투표권이나 참정권이라는 것 자체가 얼마나 엄청난 힘인지 모르는 것 같아요. 그게 어떻게 따낸 건데.” 딸이 바로 반격에 나섰다. “왜 젊은이들한테만 책임을 돌리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젊은이들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편견 아닌가? 아빠는 다양성을 인정한다면서 꼭 그렇게 말하더라.”

이제 기자는 안중에도 없다. “야, 이명박·박근혜가 당선되는 거 봐봐. 말도 안 되게 후퇴하고 있는데, 그 원인이 뭐냐는 거지. 국민들 가운데 상당수는 제대로 교육도 못 받고, 언론에 이용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야. 대학 교육도 받고 똑똑한 젊은이들이 나서야지.” “아빠,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매하다고 생각 안 해요. 87년 6월 항쟁도 그렇고, 광주 민주화 운동도 그래요. 이번 촛불집회도 봐봐. 얼마나 위대해요.”

예상치 못한 딸의 대거리에 당황했던 아버지는 다시 한번 고삐를 죈다. “결국은 정치의 문제로 간다는 거야. 지금 새누리당 욕하는 사람들 많지만 선거 때 새누리당 찍은 사람이 절반이 넘잖아. 군중 속에 섞여 있을 땐 군중심리에 뭐든지 바꿀 수 있을 것 같지만, 결국은 투표로 결정되는 거야.” 딸도 만만찮다. “청년 세대도 그들 나름대로 정치적 의사 표시를 하겠죠. 다만 매번 적극적으로 의사 표시 하기엔 너무 바쁘고, 힘들고 현실도 팍팍한 거예요. 그럼 386세대들은 다 그렇게 정치적이었어요? 그때도 운동권들이 대표했던 거 아니에요?”

“아니, 아빠 이야기는 박근혜 대통령이 51% 지지율을 받았는데 도대체 누가 찍었을까 궁금하다는 거야. 정치가 바뀌어야 살기 좋아질 것 아니냐. 왜 젊은이들은 그걸 모르냐고.” “내 생활이 좋아지기 위해서는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는 점은 100% 동의해요. 그런데 개인의 삶을 먼저 생각하자는 거예요. 아빠는 늘 히어로만 찾는 거 같아. 아빠가 그렇게 좋아하는 유시민 작가 봐봐요. 개인의 행복을 먼저 이야기하잖아요.” “그 사람도 우리 세대의 영웅이었단다.”

다툼이 이어졌지만 사실 아버지와 딸의 정치 성향은 비슷했다. 지난 4·13 총선 때 지역구 후보로 더불어민주당을, 비례대표로는 정의당을 뽑았다. 결국 이들의 차이는 광장 이후 ‘제도 민주주의’에 시선을 두느냐, ‘광장 민주주의’ 자체의 순수한 에너지를 믿느냐로 갈라지는 듯했다. 말싸움으로 번지기 전에 마무리 멘트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로서 제일 원하는 게 가족들한테 존경받는 것이겠죠. 나쁜 아버지라고 생각은 않는데 존경받는 것까지는 안 된 것 같기도 하고요. 우리 세대가 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저는 우리 아빠 존경해요. 아빠는 젊은 사람들 생각을 많이 궁금해하세요. 요즘 애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많이 물어보시기도 하고. 그런데 지금처럼 터놓고 말씀하신 적이 많진 않으셨던 것 같아요. 그게 오히려 답답했던 것 같아요.”

기자를 사이에 둔 아빠와 딸의 ‘고해성사’는 두시간여 만에 마무리됐다. 서로의 공통점을 확인하고, 다른 점은 더 많이 찾아낸 드물었던 기회. 딸은 겨울방학을 맞아 당분간 수원 집에 머물 예정이다. 민주화 세대와 엔포 세대를 대리한 이들의 ‘썰전’은 당분간 계속될 듯하다.

노현웅 기자 golok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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