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광화문캠핑촌 송경동 시인
광화문캠핑촌 송경동 시인
13일 오전 함박눈이 내리는 서울 광화문광장에 선 송경동 시인. 그는 이곳 ‘박근혜퇴진을 위한 문화예술인 캠핑촌’에서 지난해 11월 이후 노숙하고 있다. 그는 “87년 항쟁의 명동성당, 5·18의 전남도청, 2011년 미국 뉴욕 주코티공원의 ‘오큐파이 운동’처럼 지속적인 저항의 공간이 필요하다 생각했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박근혜 퇴진 광화문캠핑촌
은박지 돗자리 깔린 텐트 안엔
누에고치 같은 침낭과 담요
전등도 탁자도 노트북도 없다 명동성당이나 오큐파이운동 같은
지속적 저항공간 필요했다
두달간 집엔 딱 한번
거리, 광장, 농성장에서 노숙하며
현장에서 시 쓴다 ‘새마음애국퉤근혜자율청소봉사단’ “제 방 한번 보실랍니까?” 그가 자랑스럽게 안내한 그의 잠자리는 조금 특별했다. 일인용 텐트 바깥으로 스티로폼을 잇대어 사각의 구조물을 만들고 입구에는 미닫이문까지 해달았다. 목수 경력이 있어서 뚝딱 만들었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이 장난꾸러기 소년처럼 의기양양했다. 은박지 돗자리가 깔린 텐트 안에는 누에고치처럼 침낭과 담요가 돌돌 말려 있었다. 전등도 없고 탁자나 노트북도 없었다. -식사나 세면은 어디서 하세요? “모든 게 안 되는 공간이에요. 전기도 안 들어오는 암흑 세상인데요 뭐. 땅은 평당 1억원짜리인데 사회기반시설이 좀 부족합니다. 하하하….” -캠핑촌을 만들자는 제안은 어떻게 하게 된 거예요? “10월24일 <제이티비시>(JTBC) 보도를 보고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27일 동화면세점 앞에서 한 500명이 모여서 첫 집회랑 시위를 했어요. 며칠 지나면서 아무래도 좀더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하겠다 싶어서 ‘캠핑촌’ 제안을 하니, 사진가 노순택, 정택용, 판화가 이윤엽 같은 분들이 당장 보따리 싸서 나오겠다고 하더라고요. 블랙리스트에 항의하는 7500인 시국선언을 준비하던 ‘예술행동위원회’가 함께하겠다고 흔쾌히 결정을 해주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의 노동자들이 합류해서 11월4일 7500인 문화예술인 시국선언에 이어서 바로 연대농성에 들어갔지요.” 첫날은 텐트 20동을 몽땅 경찰에 빼앗기는 바람에, 하늘을 보며 한뎃잠을 잤다. 지금은 민예총, 문화연대, 여성영화인, 한국작가회의, 어린이책 작가모임, 전국풍물시국회의 등 문화예술인단체와 유성기업, 콜트콜텍, 쌍용차, 기륭전자, 현대차 직영 비정규직,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같은 노동자그룹이 입주해 있고, 음악인 손병휘, 문규현 신부 등 각계인사들까지 텐트 50여동이 들어서 있다.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세요? “매일 아침 9시에 ‘촌민회의’가 열려요. 하루 일정 같은 걸 공유하고 마을 일들 점검하죠.” -마을 일이라 함은…. “여기 캠핑촌을 우린 마을이라고 불러요.(웃음)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땐 마을총회를 소집해서 같이 의논하기도 하고요.” -세면이나 식사는 여기서 못하죠? “주변 건물에 가서 해결하죠. 점심 무렵엔 ‘새마음애국퉤근혜자율청소봉사단’이라고 해서,(웃음) 최태민이 했던 조직을 패러디해서, 새마을 모자 쓰고 빗자루 들고 한동안 청소도 다녔어요. 청와대 앞으로도 가고 총리공관 앞으로도 가고, ‘한국 사회의 쓰레기들 치우러, 재벌 청소도 가자!’ 해서 삼성 본사, 기아차 본사에도 다녀왔고요. 재벌 총수들이 국회 청문회 나왔을 땐 빗자루, 쓰레받기 들고 국회 갔다가 몽땅 끌려 나왔지만요.(웃음)” 12월6일 낮 12시, 청소봉사단이 국회 안으로 들어서려 하자 경찰들이 방패로 막아서며 이들을 끌어냈다. 10분 만에 쫓겨나온 청소봉사단은 굳게 닫힌 국회 정문 앞에서 빗자루를 치켜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여의도까지 출장봉사를 나왔으나, 아쉽게도 쓰레기는 수거하지 못했다. ‘맨 먼저 총 맞고 끌려가도 괜찮은가?’ -집에는 종종 들르세요? “딱 한번 다녀왔어요. 아들 수능 보는 날.” -저런… 두 달 동안 그날 한번 가고 못 갔다고요? “아이가 고3이니 곁에라도 있어줘야 하는데. 제가 다른 건 못해도 집에선 ‘송 기사’거든요. 20년 된 중고차 한 대 사서 새벽마다 아이 태워다 주는 일을 했어요. 아무리 술 먹고 늦게 들어가도 그건 꼬박꼬박 했는데….(한숨)” 외아들 관호는 피아노를 전공했다. 없는 살림에 뒷바라지도 변변히 못했는데 예고에 합격하고 혼자서 음대 준비까지 하는 아들이 한없이 대견하고 자랑스럽지만, 중요한 시기에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니 미안할 뿐이다. 아들 얘기를 하며 마른 손으로 얼굴을 부빌 때, 송경동은 시인도 투사도 아닌, 그저 평범한 아버지의 표정이었다. -처음 농성 시작할 때 이렇게 길어질 줄 아셨어요? 사실 장기적인 싸움이 될 거라고 첨부터 생각은 했어요. ‘광화문광장 프로젝트’를 하자고 할 때 저희가 생각한 건, 87년 항쟁에서 명동성당 같은 역할, 5·18 때 전남도청 같은 공간이 필요하단 거였어요. 2011년에 뉴욕 주코티공원에서 했던 오큐파이 운동처럼 지속적인 저항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2011년에 한진중공업 김진숙씨의 고공시위를 지지 방문하는 ‘희망버스’를 기획한 것 때문에 구속된 적 있으시죠? 이번엔 괜찮을까요? “희망버스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아직 안 나왔어요. 근래 몇 개 재판이 끝나긴 했지만 세월호 관련 재판도 있었고요. 이번에 연행되면 영장 청구될 수도 있는 상황이라, 사실 저도 거동을 조심해야 하는데…. 이명박 정부 때부터 공개적인 장소에서 천막 치고 농성하는 건 거의 연행을 각오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근데, 왜 나오셨어요? “저도 고민했어요. 박근혜 끌어내리겠다고 나오는 건데, 독재자가 호락호락 물러나는 경우는 없잖아요. 역사적 경험 속에서 보면 쿠데타나 계엄도 있을 수 있는 거고. 촛불집회 초기엔 그런 가능성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거든요. 만약 그런 경우엔 맨 먼저 총 맞아 죽어야 되는 자리인지도 모른다, 만에 하나 그런 상황이라면 먼저 끌려가거나 죽을 수도 있는 길인데, 그래도 좋은지, 나 자신한테 물어보고 나왔죠. 이번에 집 나오면서 신변정리 하고 왔어요. 다시 끌려갈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11월4일 그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원래 그날은, 파견노동을 주제로 한·일 변호사들의 합동 세미나에 초청을 받아 그가 일본으로 출국하기로 한 날이었다. 계류 중인 재판 때문에 해외여행이 쉽지 않아 관련 단체들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단기 여권도 만들고, 내친김에 호젓한 자신만의 휴가를 가질 생각에 부풀어 여행가방도 다 싸놓았다. 그 가방을 메고 송경동은 인천공항 대신 광화문광장으로 달려왔다. 늘 그랬듯이 그는 이번에도 심장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나올 때 아드님한텐 얘기하셨어요? “관호야, 미안한데 아빠가 좀 나가봐야 될 것 같다. 당분간 못 들어올 수도 있겠다, 하니까….” -뭐라던가요? “‘뭐, 맨날 그러잖아’ 하데요.(웃음) 그래서, ‘하여간 미안하고, 이번엔 아빠가 꼭! 박근혜 끌어내리고 들어올게, 좀 봐줘라’ 했지요. 하하하.”
송경동 시인이 안내한 그의 잠자리는 텐트 바깥으로 스티로폼을 잇대어 사각의 구조물을 만들고 입구에 미닫이문까지 해 달았다. 은박지 돗자리가 깔린 텐트 안에는 누에고치처럼 침낭과 담요가 돌돌 말려 있었다. 전등도 없고 탁자나 노트북도 없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무뎌진 손톱을 가죽 자르는 쪽가위로 자르고 있는
사내의 뭉툭한 손을 훔쳐본다
그의 손톱 밑에 검은 시(詩)가 있다.
(송경동, <가두의 시> 중에서) 그는 거리에서, 광장에서, 농성장에서 일 년의 반을 살다시피 한다. 그에겐 따로 직함이 없다. 무슨 단체 대표도, 지부장도 아니고 그저 ‘시인’이다. 평택 대추리에서는 경찰이 던진 벽돌에 머리를 맞아 응급실에 실려 갔고,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포클레인에 올라 싸우다가 추락해 부상을 입었고, 희망버스를 기획해서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고공농성을 돕다가 구속되어 3개월간 감옥에 있다 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시인이다. “나도/ 여느 시인들처럼/ 꽃을, 사랑을 노래하고 싶다/ 한 잔의 진한 커피/ 한 잔의 맑은 녹차와 어우러지는/ 양장본 속 아름다운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다”(<한미FTA는 내 시도 빼앗아간다> 중에서)고 낮게 읊조리면서도 그는 노숙을 밥 먹듯이 하고 투쟁 현장에서 시를 쓴다. 송경동은 시가 팔리지 않는 시대에 시인으로 살면서, 가장 인기 없고 하나도 달달할 것 없는 ‘노동’을 주제로 삼는다. 누굴 이롭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 한계와 모순, 무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투쟁한다
‘나’는 수많은 사람의
꿈과 열망이 엮여 만들어진 것 왜 이렇게 거리로 쏟아져 나왔을까
1%가 독점한 특권사회 용납 못해
질적 전환, 의제 확장 이뤄져야
누가 정권 잡느냐 중요치 않다
어떤 정책, 어떤 의제냐가 더 중요 -노동자로 살면서 시를 쓸 수는 있지만, 시인으로 살면서 노동에 대한 시를 쓴다는 건 쉽지 않습니다. 노동자 출신 문인들은 명성을 얻으면 대개 중산층 지식인에 편입되어버리기 십상이니까요. ‘노동문학’은 90년대 이후로 거의 소멸했고 이제는 ‘철 지난 프로파간다 문학’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현실 사회주의권이 패망한 이후에 노동문학이라는 이름은 문학잡지에서도 사라졌고 근 20년 동안 폐기된 주제 취급을 받아왔어요. 그런데 전 그럴 수 없었어요. 제 삶이 바뀌지 않았으니까요. 우리 사회에 문민정부, 국민의정부, 참여정부 들어섰지만 실제로 내가 현장에서 봤던 사람들의 삶은 뭐가 바뀌었지? 그 사람들이 느끼는 억압된 삶의 감정이 얼마나 풀어졌지? 그런데 이걸 포기해야 되나? 접어야 되나? 내가 소년원에서, 밑바닥 노동자 생활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지금도 만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변한 게 별로 없어요. 오히려 80년대 태동해서 90년대 초반까지 반짝했던 노동문학, 과도하게 정치화되었던 문학이, 이제는 평범하게 일하면서 살아가는 개개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 한층 깊어져야 할 때라고 봅니다.” -시인이 되겠단 꿈은 언제부터 가진 거예요? 어려서부터 글쓰기에 재능이 있었나요? “전혀요. 가난한 집에 가정불화도 그치지 않는데다가 어려선 제가 심한 말더듬이여서 주위에서 놀림을 많이 당했어요. 공연히 자신을 학대하면서 위악적인 문제아로 지냈죠. 근데, 중2 국어시간에 ‘봄비’란 제목으로 시를 한 편 써내라는 숙제가 있었어요. 그땐 숙제 안 해 가면 때리잖아요?(웃음) 그래서 써 갔는데 국어선생님이 ‘송경동이 누구야? 넌 시를 정말 잘 쓰는구나’ 하신 거예요. 학교 다니면서 처음으로 들어본 공개적인 칭찬이었어요. ‘아, 나도 할 줄 아는 게 하나는 있는가 보다’ 했죠.” -그럼 특별히 독서를 많이 한다거나 습작을 열심히 하는 문학소년은 아니었고요? “아이고, 그런 거 없었어요. 문제적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주먹질하다가 소년원까지 갔는데요 뭐. 무협지, 만화책 같은 거나 읽었을까.(웃음) 책 외판원 하던 큰아버지가 강매로 떠넘기고 간 한국문학전집, 세계문학전집이 유일한 읽을거리였어요.” 그가 다시 문학에 뜻을 품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소년원에서 출소해서 밑바닥 노동자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새끼목수, 여천 석유화학단지 배관공, 일용직 잡부 등을 전전하다가 문학을 배워보겠다는 일념으로 돈 3만원을 들고 서울로 올라왔다. 잡역부 노동자 숙소에서 생활하면서 한길사에서 운영하는 한국문학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문인들을 만났고, ‘구로노동자문학회’란 곳이 있단 소문을 듣고 찾아가 거기서 시를 배우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진보적 월간지 <길>의 기자로 지내던 박수정을 만난 것도 그 문학회에서였다. 96년 결혼한 이후 지금까지, 박수정은 그의 가장 믿음직한 동료이자 ‘삶의 멘토’이다. 10여년째 부부는 ‘여성노동자를 위한 글쓰기 교실’을 함께 꾸려가고 있다. -문학에 본격적으로 입문을 한 곳이 구로노동자문학회 같은 곳이 아니었다면, 송경동의 시는 전혀 다른 유가 되었을까요? 시쳇말로 ‘운동권 만나서 운동권 시인 된 거 아니냐?’고 묻는다면요? “그러진 않았을 것 같아요. 그 당시, 90년대 초반에 ‘선진적 노동문학’이란 게 있었잖아요. 박노해 시인으로부터 죽 이어지는… 오히려 그런 문학에 전 거리감을 느꼈어요. 노동자 당파성, 전형성을 바탕으로 투쟁에 나서서 선진노동자로 변해간다는 얘기들이 노동문학의 주류를 이뤘죠. 그런 해방감을 느끼지 못하는 노동자들, 사회적으로 가장 천대받는 하층민이 가지는 연대의식과 간절함에 대해서 전 더 많은 얘길 하고 싶었어요. 따뜻한 말 한마디, 잠깐 껴안아주는 행위 하나가 그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난 따로 배울 필요가 없었거든요.” 야참 사오는 신참 발소리가
안전계단을 철렁철렁 울리면
한참 두고 느긋하게 “어이! 참 먹세!” 하고
옆 조들을 불렀다. 정적 속
단내 나는 사람의 목소리가 사과향처럼 다디달아
“어이!” 하고
괜스레 한번 더 불러보았다.
(송경동, <어이!> 중에서) -상당히 비타협적이고 전투적인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산문집 <꿈꾸는 자 잡혀간다>(2011)에서 “해방은 내 안에서 오지, 밖에서 오지 않는다”고 쓰신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나는 누구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한계와 모순과 무지와 딜레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투쟁한다”고 쓰셨던데요. “‘지금까지 날 버티게 해준 힘이 뭘까?’ 생각해보면, 어쭙잖은 사회과학적 지식이나 전망이 아니더라고요. 그보다는, 더 나은 삶을 실현해 보려고 부단히 꿈꾸고 실천하는 친구들, 내 곁의 사람들이 젤 큰 힘이었어요. ‘나’라는 존재는 혼자 잘나고 똑똑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수많은 사람들의 꿈과 열망이 유기적으로 엮여서 만들어지는 거라는 걸 새삼 깨칩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을 패러디해 서울 광화문광장에 천막을 치고 지은 ‘궁핍현대미술광장’ 내에서 송 시인이 판화로 제작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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