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진
사회에디터석 24시팀 기자 jjinpd@hani.co.kr
“항상 화면 속 작은 창으로 수화 통역을 봐오셨잖아요. 오늘은 바꿔서 해보면 어떨까요?”
지난달 21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13차 촛불집회에서 박미애 장애인정보문화누리 간사가 무대에 올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평소 집회에선 발언자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수화통역사는 화면 오른쪽 하단 작은 창에 비칩니다. 이날 박 간사가 발언한 4분30초 동안은 수화통역사의 모습이 화면 전체를 꽉 채웠습니다. 상상만 했던 일이 눈앞에 펼쳐진 순간, 넋을 놓고 바라봤습니다. 촛불 시민들도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박 간사는 “청각장애인들이 ‘그동안 한국 사회 현실을 잘 몰랐는데, 뉴스보다 (촛불집회 수화 통역을 통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들어서 좋았다’고 하더라”며 “화면 속에 작은 창이 있어서 청각장애인들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다고 한다”고 전했습니다. 그는 “다른 나라 영상을 보면 대통령이 발언할 때 늘 옆에 수화통역사가 있는데, 한국은 티브이 화면에 작게 나온다. 이런 사실을 아무도 인지하지 못한다. 함께 목소리를 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박 간사뿐만 아니라, ‘촛불 수화 재능기부팀’에서 활동하는 자원봉사자들은 매주 촛불집회에서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수화 통역을 합니다. 집회 중 공연이 열릴 때마다 온몸으로 신나게 통역하는 봉사자들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취재를 하던 중, 이번 집회를 계기로 수화를 배우려는 시민들까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수소문 끝에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서울특별시농아인협회 서울수화전문교육원(이하 교육원)을 찾았습니다. 2009년 문을 연 교육원은 해마다 수강생이 늘어 지난해엔 약 7000여명이 교육원을 찾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교육원에는 수화 기본동작과 표정을 배우는 입문반부터 국가공인 수화통역사 자격증을 준비하는 전문영역반까지 5개 반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지난달 23일 저녁 7시. 수업 시간이 가까워오자, 다양한 연령대의 수강생이 하나둘 강의실로 모였습니다. 저는 입문반 수업을 참관했습니다.
수업 내내 강의실은 고요합니다. 수업을 진행하는 이은영 강사는 수업 시작 전, 주먹 쥔 양손을 바닥 쪽으로 향한 뒤 고개를 숙였습니다. 수화로 “안녕하세요”라는 인사입니다. 수강생들은 강사의 표정과 손짓을 따라 하느라 바쁩니다. 수화 사전에 올라 있는 단어만 6000여개, 실제로 청각장애인이 쓰는 단어는 3만8000개 이상이라고 합니다.
수화는 표정으로 마음을 전달하는 언어이기 때문에 표정을 잘 지어야 하는데요. 청각장애인인 이 강사는 수업 중 잔뜩 찌푸린 얼굴로 고약한 냄새를 표현했다가 금세 웃는 얼굴로 향기로운 냄새를 설명했습니다. 열정적인 강의만큼이나 주중 2시간씩 시간을 내서 수화를 배우는 이들의 눈빛도 뜨겁습니다. 사연도 다양합니다.
“촛불집회 때 수화통역사가 연설이나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해서 온몸으로 말하는 모습을 보고 왈칵 눈물이 났어요.” 30대 직장인 김아무개씨는 촛불집회를 계기로 수화를 배우게 됐다고 합니다. 퇴근하자마자 교육원으로 달려온 김씨는 “수화를 배우는 건 처음이라 어렵지만, 어떤 언어든 배우는 데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라고 말했습니다.
김진태 경기대학교 스포츠과학대학원 교수는 2015년에 교육원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는 올해 교양 과목으로 수화교육을 개설했고, 함께 공부할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 교수는 “학생들이 수화를 배워두면 청각장애인이 급하게 도움을 요청할 때 도움을 줄 수 있어서 수업을 개설하게 됐다”고 말합니다.
지난해 2월, 청각장애인들의 오랜 꿈이었던 ‘한국수화언어법’이 제정됐는데요. 수화를 가르칠 교원의 자격도 명시적으로 규정했고, 일정 조건을 갖춘 수화 교육기관은 정부 예산도 지원받게 됩니다. 공공행사나 공영방송 등은 물론, 공공기관이나 병원 등에서 수화 통역을 제공하는 의무를 지움으로써 수화 통역 수요도 늘어났습니다. 교육원 관계자는 “수화통역사를 직업으로 삼으려는 이들도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청각장애인들의 눈과 귀가 돼주실 독자분이 계신가요? 힘껏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