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은 원래 자기 실력 아니면 다른 요소가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는 분야예요. 정정당당한 대결, 규칙의 준수, 팀워크, 공동체정신 같은 긍정적 정신이 가득하잖아요.” 스포츠로 공정한 대한민국을 만들고 싶었다는 노태강 전 문화체육관광부 국장은 정작 주무부서인 문체부가 권력비리에 말려든 현실을 매우 아쉬워했다. 지난 8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 스포츠안전재단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대통령은 그를 가리켜 ‘나쁜 사람’이라고 했다. 정유라의 편을 들지 않고 사실관계에 충실한 보고서를 제출한 것이 ‘윗선’의 심기를 건드렸다. 2013년 8월 박근혜 대통령은 수첩을 펼쳐 그의 이름을 콕 집어 경질할 것을 요구했다. 문화체육관광부 체육국장 노태강, 그는 그렇게 자신의 전공 분야인 체육행정에서 쫓겨나 좌천되었다.
3년 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고가의 프랑스 사치품을 시판하는 전시회는 할 수 없다고 버티다가 그는 다시 찍혔다. “이 사람이 아직도 있어요?”라고 대통령은 물었다. 공직생활 32년2개월 만에 그는 결국 사직서를 내야 했다. 그가 퇴직하고 몇 달 뒤, 대통령과 최순실 일파의 비리가 드러나고, 문체부 장차관들이 줄줄이 소환되고 일부는 구속되었다.
그러나 아직, 노태강의 좌천과 강제사직에 대해서 공식 해명이나 사과를 한 이는 아무도 없다. 노태강 국장과 진재수 체육정책과장뿐 아니라 유진룡 장관과 1급 공무원 세 명이 문체부에서 쫓겨났는데, 아무도 이 부당한 인사에 책임을 지지는 않는다. 사유화된 권력이 헌법 위에 군림하는 나라에서, 공무원들은 무력하고 왜소하다. 행정 권력의 충실한 집행자가 될 것인가, 개인의 양심을 따를 것인가?
역린의 대가는 혹독하고, 살아남은 공무원들은 ‘영혼이 없는 동물’ ‘권력의 하수인’으로 조롱당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을까?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은 상황, 아직 새로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시점에, 노태강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한학자였던 조부는 독립운동에 투신
3형제의 장남, 둘째도 공무원
평생 노동자로 사셨던 팔순의 아버지
“아침부터 기사 검색하는 게 일이더라”
‘네 일 네가 잘 알아서 할 것’ 믿어주셔
‘박원오가 승마협회 할 말 있다더라’
2013년 5월 청와대 교문수석의 전화
‘체육계 전반 개혁 필요’ 보고했더니
지체없이 박원오가 항의전화 해와
보안이 생명인 청와대 보고 유출된 것
체육국장 경질 직전 ‘스포츠 2018’ 추진
스포츠를 공정한 사회 동력 삼으려 했다
유독 자유롭고 소통 활발했던 문체부
권력비리 직격탄 맞은 건 너무 아쉬워
직원 없는 일요일날 혼자 짐싸서 나와
‘좀 더 용감했어야’ 촛불집회 보며 반성
“난 불의에 소신있게 저항한 사람 아냐”
증거인멸 지시 어기고 대비한 후배들
그들 덕에 블랙리스트도 밝혀진 것
묵묵히 애쓴 공무원들 격려해줬으면
남모르게 혼자 짐 싸서 퇴직한 날
지난 8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인근에 있는 노태강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입춘이 지났지만 쉽게 봄은 올 것 같지 않았다. 빌딩 사이로 부는 겨울바람이 날카로웠다. 그가 근무하는 ‘스포츠안전재단’의 출입문엔 보안장치가 달려 있었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기자들 때문에 최근에 달아놓은 것이라 했다. 직원 확인을 받고서야 그의 방에 들어설 수 있었다. 사무총장실 회의용 탁자에 그와 마주앉았다. 난방 온도를 낮춰놓은 탓인지, 실내는 서늘했다. 벗어놓았던 패딩점퍼를 다시 어깨에 걸쳤다.
노태강 전 문체부 국장이 지난 8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 스포츠안전재단 사무실에서 이진순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설은 잘 보내셨어요?
“예. 부모님이 대구에 계셔서 내려갔다 왔어요.”
-그동안 부모님도 마음고생이 심하셨겠네요.
“아버님이 여든넷이신데, 지난 3년 동안 아침에 일어나면 인터넷 열어서 기사 검색하는 게 일이셨어요.(웃음) 제가 삼형제의 장남인데, 제 아래 둘째도 공무원이라, 혹시 별일은 없는지 신경 쓰시느라.”
-혹시 아버님도 공무원 출신이신가요?
“아녜요. 저희 아버님은 평생 노동자로 사셨어요. 제일모직에 18살에 입사해서 정년퇴직하실 때까지 공장에서 염색 일을 하셨어요.”
-어려서부터 아버님의 큰 자랑이셨겠군요.
“뭐, 큰 자랑이랄 건 없고… 속은 많이 안 썩이는 편이었죠.”
-평생 속 썩일 걸 최근 몇 년간 한꺼번에 몰아서 걱정을 끼친 건가요?
“그런 셈이죠.(웃음) 그래도 특별히 뭐라 하시진 않고, ‘네 일 네가 알아서 잘할 거’라고 믿어주세요. 부모님 모두 많이 배우시지는 못했지만 자식을 믿고 지켜보는 편이라서.”
노태강은 대구 사람이다. 한학자였던 할아버지 노차갑은 신간회와 무장투쟁에 가담한 독립운동가였다. 할아버지가 가산을 털어 해외로 떠도는 통에 할머니와 아버지 형제들은 빈한한 생활을 면할 길이 없었다. 풍파를 겪으면서도 한평생 성실했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노태강도 반듯하고 듬직한 모범생으로 성장했다. 대구고등학교와 경북대 법정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일찌감치 행정고시에 합격해 20대 중반부터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지난해 5월 강제로 사직서를 내고 나올 때까지 꼬박 만 32년2개월을 공직자로 일했다.
-청춘을 다 바친 직장인데, 발길이 안 떨어졌을 것 같아요. 마지막 떠나던 날 기억하세요?
“직원들이 행여 동요할까봐 사표를 내고도 비밀에 부치고 퇴직하기 전 1~2주 휴가를 썼습니다. 직원들 마주치면 힘들까봐, 일요일날 아무도 없을 때 혼자 사무실 나가서 몰래 짐 싸고 차에 실었어요. ‘이렇게 나의 공무원 생활이 끝나는구나’ 싶어서 참 서글펐죠.”
-그럼 직원들과 작별인사도 못하고 나오신 거예요?
“나중에 했죠. 멀리 파주 저희 집까지 찾아와 주는 후배들이 있어서. 제가 대놓고 송별회를 하잘 수는 없었어요. 저 때문에 피해 볼 후배들이 있을까봐서요. 두 번이나 대통령한테 지적당한 사람인데, 괜히 저랑 친한 티 냈다가 후배들까지 무슨 영향 받지나 않을까 싶어서….”
“국민들 앞에 드러난 것 이상으로, 양심적으로 고민하고 저항했던 공무원들이 많다는 점을 기억해주세요. 그런 이들이 있어서 블랙리스트니 차은택 같은 존재가 밝혀질 수 있었던 거예요. 증거 없애라는데 안 없애고 언제든 밝혀져야 한다고 나름대로 준비를 한 거죠.” 노태강 전 문체부 국장은 제자리에서 자기 책임을 다한 공무원들도 많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 달라고 당부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공정한 대한민국 만들고 싶었다
노태강의 어릴 적 꿈은 판사였다. 생각이 바뀐 건 경북대 법정대에 진학한 뒤 행정학 강의를 접하고부터였다. 당시 40대 젊은 진용으로 짜인 행정학과 교수들은, 학생들과 야구나 축구를 같이 할 만큼 자유분방하고 격의가 없었지만, 공무원의 자세와 가치를 얘기할 땐 더없이 열정적이고 진지했다. 출세나 안정된 직장을 바라보고 공무원을 선택하면 인생이 불안정해지니, 공공적 가치를 중시하고 숙의적 역할을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공무원에 도전해야 한다는 믿음도, 그때 스승님들로부터 배운 것이다.
-처음부터 체육행정에 관심이 있었나요?
“아뇨. 첨엔 노동부를 가려고 했어요. 막연하나마, 노동부에 가서 노동자 권리를 개선하는 일을 하면 보람 있겠다고 생각했지요.”
-혹시 운동권이셨어요?(웃음)
“아니요. 운동권은 아니지만 저희 아버님도 평생 염색공으로 일하고 퇴직하셨으니 그렇게 고생하시는 분들 도와드리고 싶다는 단순한 마음이었죠.(웃음)”
그러나 뜻한 대로 되진 않았다. 희망 부서와는 달리 보훈처에 배정을 받아 일하다가 군대 다녀온 뒤 체육부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88올림픽이 끝나고 처리할 업무가 많은 상태였다. 국제경기를 치르는 것 못지않게 그 뒤처리가 중요하단 선배의 권유에 그는 흔쾌히 합류했다. 김영삼 정부 들어 체육부가 문화부와 합쳐지면서 문체부 내의 체육 분야에서 줄곧 일해왔다.
-체육국장에서 경질되기 전, ‘스포츠 2018’이란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셨다던데, 그게 뭐죠?
“새 정부가 들어서면 분야별로 정부가 5년간 할 일의 청사진을 만들어 발표합니다. ‘스포츠 2018’은 박근혜 정부 스포츠정책의 방향을 수립한 건데, 우리는 좀 더 문화적인 시각에서 스포츠가 사회를 바꾸는 건강한 동력이 될 수 있다고 믿었어요. 스포츠는 집단주의나 국가주의로 흐를 위험도 있지만, 정정당당한 대결, 규칙의 준수, 팀워크, 공동체정신 같은 긍정적 정신이 가득하잖아요. 그걸 제대로 살려서 사회 전 분야에 파급되게 하자고 생각했죠. 그때 프로젝트의 부제가 ‘스포츠로 대한민국을 바꿉시다’였어요.”
-하이고! 참 아이러니네요. 그런 스포츠의 미덕은 다 어디 두고, 권력형 비리의 온상으로 삼았으니….
“그러니까요. 체육은 원래 자기 실력 아니면 다른 요소가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는 분야예요. 올림픽 금메달 몇 개 땄다, 올림픽 랭킹이 몇 위다 하면 대한민국 국력 자체가 올라간 것처럼 보는 시각을 바꾸고 싶었어요. 스포츠 선수들을 ‘운동 기계’로 만들지 않고, 정상적인 삶을 살면서 사회에 기여하는 건강한 자산이 되도록 지원하고 싶었고요.”
-아쉽습니다. 문체부가 소신껏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전 문체부에 애정이 많습니다. 제 직장이어서만이 아니고, 문체부 자체가 대한민국 공무원 사회에서 좀 특이한 조직입니다. 굉장히 자유롭고 상호간의 벽도 없고, 직급 간에 소통도 활발하고, 장관님한테도 얼마든지 농담하고, 아니다 싶으면 ‘이거 안 됩니다’ 의견도 낼 수 있고요. 몇몇 장관님들은 복장도 자유롭게 하라고 해서 한여름에 반바지 입고 오는 직원도 있었어요. 문체부 공무원으로 일한 게 참 즐거운 기억이었는데… 그랬던 문체부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걸 보고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그는 어떻게 ‘나쁜 사람’이 되었나
발단은 2013년 5월 그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였다. 당시 모철민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직접 전화를 해서는 “박원오라는 사람이 승마협회 관련해 할 말이 있다고 하니, 진재수 체육정책과장이 직접 만나보게 하라”고 했다. 대한체육회를 통하지 않고 문체부 체육국이 직접 경기단체를 상대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청와대 수석의 연락이니 무시하기도 난감했다. 그런데, 박원오를 만나고 온 진재수 과장의 첫마디는 ‘좀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뭐가 이상하단 겁니까?
“박원오란 사람이 승마협회 관계자 명단을 들고 와서는 이 사람, 저 사람 문제가 있다고 제보했는데, 두루 확인해 보니 자기들 파벌싸움에 우리를 끌어들이려는 거 같단 거예요. 게다가 박원오란 사람을 알아봤더니, 승마협회 일을 하면서 횡령, 사기 미수, 배임, 사문서 위조 같은 전과가 있다고….”
-사문서 위조까지요?
“법정에 제출하는 서류를 조작했대요. 서울시 승마협회 부회장인가 할 때. 그래서 실형을 살았고요. 그런 사람 말이니 곧이곧대로 신뢰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우린, 양쪽에서 제기한 얘기들이 다 문제라고 보고 체육계 전반에 대한 개혁 방안이 필요하다고 보고서에 썼죠. 그걸 모철민 수석에게 보냈어요. 보고서 끝에는 박원오의 판결문 사본까지 첨부했고요.”
-그런데 보고서를 올린 뒤, 곧바로 박원오의 항의전화를 받으셨다고요?
“그게 지금 생각해도 황당하고, 말이 안 되는 일이지요. 7월5일 모철민 수석에게 보고서를 보내고 하룬가 이틀 후에, 박원오가 진재수 과장한테 바로 전화해서 ‘보고서를 그렇게 쓰면 어떡하냐? 두고 보자’ 뭐 이런 식으로 얘길 하더래요. 진재수 과장이 ‘지금 날 협박하는 거냐?’ 하고 호통을 치곤 전화를 끊긴 했다지만, 아니 이거, 정말 황당한 일 아닙니까? 청와대에 보고하는 문서는 보안이 유지되어야 하잖아요. 그래야 개인이나 단체에 대한 문제점도 얘기하지. 그렇게 올린 보고서가 이틀 만에 당사자한테 넘어가서 항의전화를 받게 하다니.”
-이 일이 정유라와 관련된 것 같단 얘기는 언제 들으셨어요?
“진재수 과장이 승마협회 사람들 만나는 과정에서, 이 사건이 정윤회씨 딸과 관계있단 얘길 들었대요. 청와대에 보고서 제출하기 전, 그 문제에 대해 저희도 내부적으로 상의를 했는데, 당시 박종길 차관은 ‘원칙대로 하라’고 하셨고 유진룡 장관님은 ‘정윤회씨 딸이면 그냥 메달 줘야 하냐?’고 하셨어요. 정윤회가 관련이 있다 해도, 아니 그러면 더더욱 대통령에게 그 사실을 알려서 호가호위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판단했지요. 우린 대통령이 공언하던 국정원칙을 지킬 거라 믿었거든요.”
믿음은 허무하게 깨졌다. 다음달인 8월 유진룡 장관이 대통령에게 체육계 개혁방안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대통령은 수첩을 펼쳐들며 ‘노태강, 진재수가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며 인사 조치를 할 것을 지시했다.
-대통령이 실무 국/과장급을 지명해서 ‘나쁜 사람’이라고 얘기하는 게 통상적인 일인가요?
“(곰곰 생각) 공무원 생활 30년 동안 처음 본 것 같아요. 제가 그 첫 사례가 된 거죠. 허허….”
-그 무렵, 홍경식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 노태강과 진재수 두 사람에 대해서 공직감찰을 하고는 ‘체육개혁에 대한 의지가 부족하고 공무원으로서 품위 유지에 문제가 있다’고 결론 내렸다는데, 그게 경질의 근거인가요?
“유진룡 장관에게도 그 감찰 결과가 사전에 통보되지 않은 걸로 압니다. 대통령도 감찰 내용 언급 없이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는 얘기만 했다고 들었고요. 정확한 건 알 수 없지만, 인사 조치를 하기로 결정한 상태에서 그 근거를 찾기 위해서 직무감찰을 한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결론이 먼저, 근거는 나중?
“사는 게 드라마 같아요.(웃음) 제가 체육국장에서 경질되고 국립중앙박물관 대기발령을 받는 날, 감찰 보고서와 함께 이걸 받았어요.(서류를 내밀며) ‘2013년도 고위직 청렴도 평가 결과’인데, 유진룡 장관이 부임한 뒤 첫 내부 과제를 부패 청산으로 잡고, 실국장급 고위 간부에 대해서 직원들이 익명으로 평가하게 한 결과지요.”
그가 내민 평가서에서 노태강의 종합점수는 10점 만점에 9.98이었다. ‘부당이득 수수 금지’와 ‘건전한 공직풍토 조성’, ‘직무수행능력 및 민주적 리더십’ 세 분야는 10점 만점이었고 모든 항목에서 평균점수를 크게 웃돌았다.
-문체부 내부의 평가는 청와대 감찰 내용과 완전히 상반되는군요.
“청와대 공직감찰이 이루어진 것과 비슷한 기간에 문체부 내부 평가도 이뤄졌어요. 서로 극명하게 엇갈린 평가 결과와 인사조치를 동시에 접하면서 정말 착잡했습니다. 전 제 선배, 동료와 후배들이 제게 내린 이 평가를 제 공무원 생활에 대한 훈장으로 생각합니다. 소중하게 간직할 거예요.”
술, 골프, 스키, 동문회는 멀리한다
-누가 봐도 부당한 인사인데, 그 울화를 어떻게 삭이셨어요?
“제 스트레스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유진룡 장관은 어떻게든 저를 보호하려고 했지만 그러면 장관이 대통령에 맞서는 꼴이 되고, 문체부 전체에 악영향이 올 수도 있는 상황이라, 제가 말렸습니다.”
-혼자서 술 좀 드셨겠어요.
“술은 한 잔도 안 합니다. 원래 술이 잘 안 받는 체질이기도 하고, 공무원이 자제력을 잃으면 안 되는데, 술 먹으면 사고 치게 될까봐서.(웃음)”
-종교가 있으세요?
“아뇨, 종교랑은 관계없고요.(웃음) 체육부 공무원으로 일하다 보니, 골프랑 스키도 안 합니다. 1980~90년대만 해도 골프나 스키는 고급 스포츠여서… ‘아예 저 세계는 가지 말자’ 결심했죠.”
-체육행정 하시는 분이 골프장 한 번 안 가셨다고요?
“자기 돈 내고 가면 문제가 없는데 공무원 봉급으로 감당되는 것도 아니고…. 술 안 먹고 골프, 스키 안 하는 게 제가 공무원 생활 하는 데는 상당히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명색이 티케이(TK) 출신인데 학교 동문회에도 안 가신다면서요?
“제가 공무원 된 뒤로 동문회 행사는 한 번도 안 갔습니다. 회비도 낸 적 없고요. 모교 발전기금 안 낸다고 욕도 많이 먹었어요.(웃음) 아무리 좋은 뜻으로 한다해도 결국은 패거리문화가 되기 쉽잖아요.”
-곧은 성격 때문에 오해를 받는 일도 있겠어요. 부인은 뭐라고 안 하세요?
“저하고 가치관은 크게 다르지 않아요. 돈을 많이 벌라든가 출세하면 좋겠다는 욕심은 전혀 없어요. 성격은 저보다 훨씬 활달하고 융통성 있습니다만.(웃음) 저희가 경기도 파주의 단독주택 모인 마을에 사는데, 집사람은 동네도서관 일도 열심히 돕고 마을위원회 맡아서 청소도 열심히 하고, 몸살림운동 해서 사람들한테 가르쳐주기도 하고, 아주 바쁘게 살아요. 딸들도 사교육 열풍에서 자유로운 곳에서 학교 다니게 하고요.”
부인과 두 딸 이야기를 하며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가 37살에 “배운 게 거덜 나서 재충전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독일로 5년간 유학을 갔을 때도, 혼자 직장생활을 하며 뒷바라지를 해준 아내였다. 덕분에 2001년 그는 ‘유럽연합의 초국가성과 개별 국가의 관련성’이란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나는 더 용감했어야 했다
-근데 좌천되어서 내려간 자리가 하필이면 국립중앙박물관 교육문화교류단장이었을까요? 거기서 프랑스 장식미술전 문제가 불거지는 바람에 또다시 대통령의 뜻을 거슬렀어요.
“원래 그 전시는 2016년 한불수교 13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프랑스 측이 우리 박물관에 제안한 거였어요. 순조롭게 협조가 잘 되고 있었는데 2015년 연말에 전시품 리스트를 일일이 확인하다 보니 이상한 거예요. 270점 가운데 52점이 시중에서 판매되는 고가품이더라고요. 이게 파리국립장식미술관하고 ‘콜베르재단’이라고 불리는 곳이 같이 하는 행사인데, 콜베르재단이란 게 프랑스 사치품회사들의 조합입니다. 무슨, 무슨 명품회사들 말이에요! 시판중인 고가 상품을 전시하는 것도 문제인데 전시회 기간 중에 박물관에서 판촉행사까지 하겠다는 거예요. 김영나 관장님이 ‘학자적 양심을 걸고 받아들일 수 없다’고 얘기하셨고 학예직 공무원들도 ‘이건 무례한 일’이라며 거세게 반대했지요.”
-그러게요!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을 뭘로 보고!
“근데 문체부하고 청와대가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전시를 성사시키라고 계속 압력을 넣는 거예요. 대통령 관심사항이라고.”
-단순히 대통령 취향과 관심 때문인가요? 이권이 걸려 있는 사안인가요?
“글쎄요. 미르재단이 프랑스 측하고 관계가 깊은 걸로 봐서 무슨 이권이 있었을 수도 있겠지요. 추정만 할 뿐이고요. 그보다도, 대통령이 관심을 보이면 문체부 장차관이건 교문수석실이건 누구도 안 된다는 얘길 못하는 게 더 문제죠. 김영나 관장님이 ‘아무도 말을 못하면 나라도 대통령 만나 얘기하겠다’고 하실 정도였어요.”
-근데 대통령 독대는 무산되고 김영나 관장은 경질되었지요.
“전 김영나 관장님 정말 존경합니다. 그 과정에서 한 번도 흔들림이 없으셨어요. 조선시대 선비정신이 있었다면 그런 모습이었을 거예요. 부끄럽지만, 저는 ‘대충 타협할 수도 있지 않겠냐’고 말씀드렸는데, 관장님은 ‘타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건 우리의 정신에 대한 문제다’라고 딱 잘라 말씀하셨어요. 적어도 학자로서 공무를 담당할 때는 이런 자세가 필요하구나, 그걸 깨우쳐주는 롤모델이라고 전 느꼈습니다.”
꿋꿋이 버텨준 이들 덕에 국제사회에 웃음거리가 될 뻔한 전례를 남기는 오욕은 피할 수 있었지만 노태강은 다시 한번 대통령에게 미운털이 박혔다. 박물관으로 올 때는 좌천이었지만 이번엔 아예 사직 압력이 가해졌다. 공무원법상 정년이 보장되는 ‘나’급 공무원이라고 버텼지만, 함께 일하던 과장이나 학예연구원들까지 징계한다는 소문이 도는 걸 보면서 그는 마음을 접었다. ‘같이 일한 직원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달라’는 조건을 걸고, 지난해 5월 사직서를 냈다.
지난해 5월30일 노태강 전 문체부 국장이 32년2개월의 공직생활 마지막날 쓴 업무수첩. 문체부 체육국장에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좌천’된 그는 “이 사람이 아직도 있어요?”란 박근혜 대통령의 한마디에 타의로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사표 낸 거, 후회 안 하세요?
“(한숨) 당연히 후회하죠! 공무원으로 하고 싶었던 일을 못하고 나왔으니…. 촛불집회 보면서, ‘내가 좀 더 용감했어야 했는데’ 싶었어요. 저로 인해서 피해 보게 될 문체부 동료나 후배만 생각했지, 우리 곁에 이렇게 같이 고민해 주시는 국민들이 있다는 걸 몰랐으니까요.”
-몇 달만 더 버티셨으면 좋았을걸.
“버틴다기보다 용감하게 대들었어야 했어요. 제가 유진룡 장관님을 존경하는 이유가 그분은 눈치 살피지 않고 정면으로 맞부딪힌다는 점이에요. 대학 때 한완상 교수가 쓴 <민중사회학>이란 책을 읽었는데, 한완상 교수가 사표 제출을 요구받았을 때, ‘사표 안 낸다. 차라리 날 파면시켜라’ 하셨다는 대목이 가슴 깊이 남아 있어요. 전 그렇게 못했죠. 언론에 당부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 ‘제 사례를 상징조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솔직히 전 불의에 대항하거나 소신 있게 저항한 사람이 아녜요. 그냥 공무원으로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한 것뿐인데 이름이 노출된 것뿐이지요. 제가 사실보다 미화될까봐 두렵습니다.”
-유의하겠습니다.(웃음) 공무원을 ‘영혼 없는 동물’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어요. 위에서 시키면 뭐든 한다고.
“‘영혼 없는’ 공무원은 위에서 시키면 옳은지 그른지 의도적으로 판단을 안 하지요. 여러 가지 불이익을 고려해서 스스로 판단능력을 닫아버리는 거예요. 국민들은 이런 공무원들이 미우시겠죠. 하지만 공무원들이 밉다고 그들이 가진 ‘공공성’까지 미워하면 안 됩니다. 일 안 하고 복지부동하는 공무원이 있으면 국민들이 당당하게 항의하고 따져야 하지만, 공무원들이 불합리한 지시에 대해 자유롭게 자기 판단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지켜줘야 해요.”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소신 있는 의견으로 부당하게 공무원 신분을 박탈당할 때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가 없어요. 법적 제도적으로 기댈 데가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들을 지원하고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겠고요, 두 번째로 공무원에 대한 평가와 감시에 시민들이 개방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하면 좋겠어요. 지금도 그런 절차가 있긴 한데, 누가 참여할지는 공무원들이 결정해요. 평가자 선정 자체를 민간에 맡겨서 운영되도록 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제가 오늘 인터뷰에서 꼭 빠뜨리지 않아야 할 얘기가 있다면요?
“국민들 앞에 드러난 것 이상으로, 양심적으로 고민하고 저항했던 공무원들이 많다는 점을 기억해주세요. ‘이런 거 하면 안 됩니다’ 하고 지시사항 거부하다가 소속기관으로 좌천된 직원들이 너무 많아서 나중엔 본부에서 근무할 사람이 없어 다시 부르는 사태까지 벌어졌어요. 물론 몇몇은 개인 욕심에 취해서 잘못한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공무원은 마지못해 일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고민했어요. 그런 이들이 있어서 블랙리스트니 차은택 같은 존재가 밝혀질 수 있었던 거예요. 증거 없애라는데 안 없애고 언제든 밝혀져야 한다고 나름대로 준비를 한 거죠. 책임은 권한에 비례하는 것이니 고위직은 당당하게 자기 책임을 인정해야 하겠지만, 대다수 공무원들은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어요. 그들을 이해하고 격려해 주세요.”
녹취 심지연
노태강을 만든 시간들
1990년 공무원이 된 뒤 첫 해외 출장지로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독일체육협회(DSB)를 방문했습니다.
1997년 마흔의 나이를 눈앞에 두고 자기계발의 필요성을 느껴 휴직 후 자비로 독일 유학을 떠났습니다. 4년간 시간을 보냈던 대학 기숙사 방.
2001년 유럽 청소년 정책을 배우기 위한 출장 때 진재수 과장과 함께. 이때 이미 우리 두 사람이 엮인 게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봅니다.
독일 문화원장으로 재직할 때 핀란드, 노르웨이와 함께 연 ‘레드 드레스’ 행사. 핀란드에서 활동하는 한국 디자이너의 작품을 노르웨이의 원단으로 제작해 한국 성악가(강요셉)가 착용하고 공연한 모습.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뒤 처음으로 평창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IOC) 조정위원회에 참석한 모습입니다.
문체부 체육국장 시절 많은 기자간담회를 했습니다. 국장 부임 첫날부터 승부조작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밤을 새운 기억이 생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