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들이 가장 바라는 건 ‘명예회복’입니다. 국가에서 징병을 했는데 아이가 죽었으면 왜 죽었는지 확인을 해 달라는 거예요.”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에서 만난 고상만 전 군 의문사 조사관은 헌병대가 조사해서 군 검찰이 기소하고 군사법원이 판결 내리는 현재의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억울하다”는 우리말은 영어로 직역이 안 된다. 한영사전에선 ‘부당하다’(unfair) ‘무고하다’(innocent) 같은 말로 풀이해놨지만, 이런 단어론 억울한 사람의 복받치는 설움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응당 받아야 할 대우를 받지 못하고, 무고하게 누명을 쓰거나 오해받을 때, 죄지은 자가 오히려 떵떵거리고 으스댈 때, 사람들은 억울함에 억장이 막힌다.
적반하장(賊反荷杖), ‘도둑이 매를 들어 무고한 사람을 비난’하는 세상에서 억울한 사람은 늘 사회적 약자들이다. 법과 제도가 권력을 가진 자들의 도구가 될 때 억울한 사람은 합법적으로 양산된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은, 돈 없고 힘없어 억울한 일을 겪을 수밖에 없는 이들의 쓰디쓴 자조(自嘲)의 표현이다.
그러나 억울함에는, 호락호락 포기하지 않는 결기가 담겨 있다. 역사상 모든 민란은 억울한 자들의 집단행동이었다. 심판받아야 할 자가 심판자가 되고, 위로받아야 할 이가 죄인으로 낙인찍히는 부당함, 그 전도된 현실에 대한 깊은 분노가 억울한 사람들의 가슴에 차고 넘쳐, 하나둘 서로의 억울함에 공감하며 반응할 때 개인적 설움과 분노는 사회적 공분이 되고 감동적인 연대가 되고 불의를 거부하는 의거가 된다.
고상만(47)은 억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전한다. 그에겐 특별한 직함이나 소속단체도 없다. 인권운동단체 간사,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국회 보좌관 등으로 두루 일한 경력을 토대로 2014년부터 2년간 <고상만의 수사반장>이란 팟캐스트를 진행했고 올 2월엔 같은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요즘 그는 연극을 준비한다. <이등병의 엄마>란 제목으로 직접 연극 대본을 쓰고 지난 3월23일엔 제작발표회도 열었다. 이날 제작발표회장 분위기는 여느 공연과 달랐다. 행사장 앞줄에서 숨죽인 오열과 탄식을 토해내는 이들은, 군복무 중 사망한 사병의 유가족들이었다. 고상만은 유족이 직접 출연하는 연극, 그들의 억울한 사연을 담은 연극을 만들 거라고 했다. 이들은 연극을 통해서 어떤 얘길 전하고 싶은 걸까?
이등병의 엄마들, 무대에 서는 이유
지난 3일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에서 고상만을 만났다. 텅 빈 복도에 우리 일행의 발자국 소리만 메아리처럼 퍼져서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창밖엔 한껏 부푼 목련 꽃망울이 봄볕에 곧 터질 듯한데, 그늘진 실내는 시간이 멈춘 듯 적요했다. 납골당 102호실, 양쪽 벽면 가득 천정까지 이어진 유리 격자 사이에 그가 찾는 위패가 있었다.
“이 친구가 과 학생회장도 하고 굉장히 리더십 있는 친구였어요. 입대할 때도 친구들이 다 따라가 배웅할 정도로요.”
2014년 윤 일병 사건으로 세간에 알려진 청년 윤승주가 안치된 곳. 그의 작은 영정 앞, 약력도 간소했다. ‘1993. 6.13. 서울 출생 2014. 4.7. 경기 의정부 순직. 2012년 전남과학대학’.
대학을 다니다 입대한 청년 윤승주는 육군 28사단에 배치된 지 한 달 만에 죽었다. 거의 매일 이어진 체벌과 무차별 구타, 집단따돌림 속에서 그는 서서히 무너지고 죽어갔다. 바닥에 가래침을 뱉어 개처럼 핥게 하고, 치약 한 통을 먹게 하고, 성기에 안티프라민을 발라 놀림감으로 삼을 때도 윤 일병이 호소할 곳은 없었다.
군 의문사 조사관 거쳐 팟캐스트 진행
5월엔 <이등병의 엄마> 연극 무대 올려
500여명의 군 사고 유족 만나보고
그분들 얘기 중 공통적인 걸 엮어내
한 회 공연마다 유족 세 명씩 출연
참여정부 만든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
MB정부, ‘예산낭비’ 이유 내세워 해체
접수된 600건 중 절반은 손도 못 대
“아이들이 죽지 않게 하는 방법요?
군에서 죽으면 국가 부담 커야 해요”
“비좁은 닭장 같은 데 동물들을 놔두면 스트레스가 쌓인 닭들이 그중에서 제일 여리고 약한 애를 밥도 못 먹게 괴롭혀서 도태시키거든요. 군대에서 바로 그런 일이 벌어진 거예요. 이 친구가 착해서. 착하니까 당한 거죠. 사건이 나고 달려간 부모들한텐, 군에서 수사 중이라고 사건 내용을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아 ‘음식 먹다가 질식사해서 죽은’ 걸로만 알고 있었다는 거예요.”
윤 일병의 죽음을 사고사로 위장하려던 기도는 수포로 돌아갔지만, 청년 윤승주를 죽음에 이르게 한 군 인권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지난해 7월 국회 국방위원회에 출석한 한민구 국방장관은 윤 일병 사건에 대한 질문을 받고 “많은 장병이 보람을 느끼면서 인격과 인권이 보장되는 가운데 근무하고 있는데 ‘작은 것’을 가지고 문제시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연극은 윤 일병 사건을 모티브로 한 건가요?
“그건 아니고요. 제가 지금까지 500여명의 군 사망사고 유족들을 만나봤는데 그분들 얘기 가운데 공통적인 걸 엮었어요. 자살로 인정하고 조용히 장례 치르면 ‘순직’ 처리 해주겠다고 해서, 시키는 대로 하고 나면 그 뒤론 아무도 연락하지 않고, 연락해도 받지를 않고. 그제서야 속았다는 걸 깨닫고 가족끼리 서로를 원망하고 증오해요. 한 아이의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가정 자체가 파괴되는 거죠.”
-연극 제목이 왜 <이등병의 엄마>지요?
“유족들이 자식을 잃은 사연은 다 다르지만 딱 한 가지 공통점이 있어요. ‘내가 이런 비극의 주인공이 될 줄 몰랐다’는 거예요. 대한민국에서 아들 둔 가정이면 특별한 소수를 제외하곤 다 이등병의 엄마가 될 수밖에 없어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 같은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는 얘길 하고 싶었어요.”
-연극해 본 적 있으세요?
“아뇨.”
-대본을 써 본 적은?
“처음이에요.”
-유족들도 연극에 직접 출연하신다면서요.
“지난번 모임에 서른 명 정도 모이셨는데, 태어나서 한 번도 연극을 본 적 없는 분들이 3분의 1 정도 되더라고요.”
-유족들이 연극 무대에 서는 걸 부담스러워하진 않던가요?
“연극은 생소하지만 아들 얘기를 직접 할 수 있단 생각에 오히려 ‘설렌다!’고들 하세요. 지나가는 사람한테 ‘내 얘기 좀 들어주세요’ 했더니 미친 사람 취급하고 도망가는 걸 보고 엉엉 울었다는 엄마도 있고, 가족들이 힘들어해서 집에서도 소리 내서 울지 못했다는 엄마도 계세요. 그분들이 무대에 올라 아들 돌 사진, 소풍 때 사진, 가족사진을 보여주면서 살아생전의 아들 얘길 하실 거예요.”
<이등병의 엄마>의 주요 배역은 전문배우들이 맡지만, 5월19일부터 28일까지 한 회 공연에 세 명씩 돌아가며 자식을 잃은 유족이 출연한다. 연출을 맡은 박장렬 감독(전 서울연극협회장)도 유족의 입장을 최대한 존중해 작위적 연출은 하지 않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연기의 완성도가 아니라, 유족의 진정성과 관객의 공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연간 150여명의 군 사망자 가운데 100명가량이 자살로 목숨을 잃는 게 현실이다. 고상만 전 군 의문사 조사관은 “군 수사기관이 결론을 냈는데 그것을 유족이 납득하고 동의할 수 없으면 의문사”라며 “그걸 속 시원히 규명해야 할 책임은 국가에 있다”고 강조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군대 내 자살이 부모 때문이라고?
-윤 일병처럼 구타와 가혹행위에 의한 사망도 있지만, 연간 150여명의 군 사망자 가운데 100명가량이 자살로 목숨을 잃는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자살사고 가운데 의문사가 있다고 보시는 건가요?
“국방부에선 공식적으로 ‘의문사’를 부정합니다. 의문사는 없다고 하죠.”
-그러면 선생님은 ‘군 의문사’라는 용어를 어떤 의미로 쓰시죠?
“간단합니다. 군 수사기관이 결론을 냈는데 그것을 유족이 납득하고 동의할 수 없으면 의문사예요. 합당한 의문점이 있으면 의문사죠. 그걸 속 시원히 규명해야 할 책임은 국가에 있어요. 국가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훌륭한 현역자원이라고 해서 데려갔는데, 그 청년들이 군에서 죽었다면 둘 중의 하납니다. 징병을 잘못한 거거나 관리를 잘못한 것. 의무복무로 간 아이들은 자기가 가고 싶어서 간 게 아니고 부모도 보내고 싶어서 보낸 게 아니니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녜요? 우리가 흉악범이라고 하는 사형수도,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죽으면 큰일 나요. 교도소 다 처벌받고 징계받습니다. 근데 군에서 군인이 자살하면 아무도 처벌을 안 받아요. 부대관리 훈령에 ‘자해로 사망한 군인에 대해선 그 지휘관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라고 돼 있거든요. 그러니 모든 군인이 죽으면 ‘자살로 처리’하는 게 최고인 거예요. 자살 이유는 군부대와는 무관하고, ‘아버지가 실직해서’ ‘엄마 아빠가 이혼해서’ ‘대학에 떨어져서’ ‘여자친구랑 헤어져서’ 이렇게 처리하죠. 자살의 원인은 모두 당사자와 가족들한테 있는 겁니다.”
-근데 실제 이유는 그게 아니란 말씀이세요?
“이번에 연극에 출연하는 유족 중에 손형주 이병 어머니가 있어요. 손형주 이병은 부산과학고를 나오고 어려서부터 영재 소리 듣던 친구예요. 이 친구가 100㎏이 넘는 거구인데 입대하고 대대장이 30㎏을 빼라고 지시했대요. 급식량은 대폭 줄이고, 하루에 다른 동료들 3배로 구보를 시켰는데 손 이병은 모범생답게 그 지시를 묵묵히 따랐대요. 동료들은 손 이병이 ‘늘 땀에 젖어 있는 아이였다’고 증언합니다. 근데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게 이 친구가 시력이 아주 나빠요. 이 친구의 사격수첩 메모를 보면 ‘150미터 표적지 잘 안보임. 200미터 표적지 안 보임’이라고 써 있어요. 안 보이는데 표적을 맞힐 수가 있겠어요? 게다가 더 치명적인 건 수전증이었어요. 눈도 안 보이는데 수전증이 있으니 사격 성적이 나쁜 건 당연하죠.”
-그런 신체조건인데 어떻게 현역판정을 받았죠?
“10년 전 입대기준으로 보면 현역을 갈 수 없는 조건인데, 군인 수를 맞추기 위해서 신체판정 등위를 엄청 완화했어요. 결국 뚱뚱하고 사격 못한다고 군대에서 매일 바보 취급받고 놀림받다가, 사격장에서 30발을 쏘고 31발째엔 자기 이마에 대고 사격을 해서 죽었어요.”
-저런….
“군 헌병대에서도 손 이병의 사망 원인을 ‘지휘관들의 무리한 요구와 관리 소홀’로 보고 육군참모총장에게 순직 처리하도록 권고했대요. 근데 이래저래 결정이 늦춰지다가, 2014년 3월 정확히 손 이병의 3주기가 되던 날, 순직 처리가 불가능하다고 기각되었대요.”
-왜요?
“손 이병이 죽기 며칠 전 죽음을 암시하는 메모를 남겼는데 ‘중2 때, 고1 때… 대학 1, 2 때도 허무했지’라고 썼다고요. 사람이 자살까지 생각할 때에는 정신적으로 암에 걸린 거나 마찬가지 상태잖아요. 근데 이걸 근거로 부대는 아무 책임이 없다고 나온 거죠. 중학교 때부터 자살을 생각해 왔으니 군대 책임이 아니라고.”
-다른 나라에선 이런 사건을 어떻게 다룹니까?
“외국에선 부대 내 요인에 대한 조사가 기본이에요. 부대 안에서 부당행위나 부조리한 일은 없었는지 중점 조사하죠. 우리나라는 개인적 요인에 방점을 두고 사인을 조사해요. 군에 입대하면 제일 먼저 자기소개서를 쓰게 해요. 성장과정, 부모문제, 가정형편…. 제 아들도 군에 다녀왔지만 저는 아이한테 ‘뭐든지 좋았고 행복했고 우리 집은 아무 문제 없다’고 쓰라고 했어요. 어려서 부모 사이가 안 좋았고 동생이 아팠고 실직했고… 이런 얘기 쓰면 다 집안문제 때문에 아이가 죽었다고 하거든요.”
-부모 가슴에 두 번 못을 박는군요.
“부모들이 가장 바라는 건 ‘명예회복’입니다. 국가에서 징병을 했는데 아이가 죽었으면 왜 죽었는지 확인을 해 달라는 거예요. 원래 아이의 의지가 나약해서, 집에 뭔가 문제가 있어서 그랬다고 몰지 말고. 국방부에서 사인을 조사할 때 누가 방아쇠를 당기고 누가 줄을 맸느냐를 기준으로 자기 손으로 했으면 자살이라고 규정해요. 저나 유족들이 보는 시각은 달라요. 당겼다면 왜 당겼고, 맸으면 왜 맸는지 밝혀 달라는 거예요.”
-너무나 당연한 요구 같은데.
“군 헌병대가 조사해서 군 검찰이 기소하고 군사법원이 판결 내리니 그게 되나요? 전 군사법원을 폐지해야 한다고 봅니다. 전시 상황이 아닌 평시 상황에선 민간법원에서 군의 잘못을 다뤄야 해요.”
-그럼 좀 달라질까요?
“지금 한해 국방예산이 40조원인데 방산비리로 큰돈을 쓰면서 인건비는 너무 싸요. 아이들을 거의 공짜로 쓰다, 죽으면 버리는 거죠. 자살이나 자해, 사고로 죽으면 ‘비전투 손실’로 처리합니다. 한 명 죽으면 그냥 ‘마이너스 1’이에요. 아이들이 죽지 않게 하는 방법은 한가집니다. 군에서 죽으면 국가 부담이 커야 해요. 그래야만, ‘얘 죽으면 부담이 크니 그냥 제대시켜 내보내자’는 생각을 하지요. 지금은 그냥 죽을 때까지 놔둬요.”
노무현 정부 때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설치한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민관합동의 독립기구로 출범해서 600여건의 진정을 접수하고 활동을 벌였지만, 2009년 이명박 정부는 예산 낭비를 이유로 이 기관을 해체했다. 600여건 가운데 조사 완료된 332건을 제외하고 나머지 절반 정도는 손도 못 댄 채였다. 죽은 사병들은 말이 없고 그 유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다.
고상만 전 군 의문사 조사관과 이진순씨가 국립서울현충원을 살펴보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억울함은 나의 힘
“우리 주변에는 억울한 이들의 호소가 남아 있고, 그 억울함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는 살아갈 힘을 얻는다고 믿는다.”(<고상만의 수사반장> 서문 중에서)
고상만은 최근 출간한 <고상만의 수사반장>에서 군 의문사뿐 아니라 공권력과 사회적 편견으로 억울한 피해자가 된 사람들의 사례를 조목조목 소개하고 반박했다. 그는 법률 전문가도 전업 저널리스트도 아니지만, ‘억울한 누군가의 스피커 역할’을 자신의 업으로 삼겠노라고 했다. 그가 이런 삶의 좌표를 정하게 된 것은 청년 시절 그 자신이 폭력과 제도의 억울한 희생자가 되었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1989년 속초 동우대학에 입학한 그는 2학년이 되던 봄, 절친한 선배 김용갑의 죽음을 목도했다. 사학 비리에 대항하는 총학생회를 궤멸시키기 위해서 학교 쪽은 지역의 조직폭력배를 동원했다. 그와 김용갑은 다른 학생운동 동료들과 함께 조직폭력배에게 끌려가 감금된 채 쇠파이프와 각목으로 무차별 구타를 당하곤 했다. 그런 폭행을 당하면서도 총학생회장에서 사퇴할 것을 끝내 거부하던 김용갑은 봄비 내리던 새벽 한적한 도로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1990년 3월28일 실종된 지 2시간35분 만이었다. 그의 사인은 지금도 미궁 속에 있다.
-스무 살 청년에겐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었겠어요.
“제일 큰 충격은 세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간다는 거였어요. 매일 오가던 버스는 그대로 다니고, 테니스장에서 테니스 치는 애들, 식당에서 밥 먹는 애들 모두 그대로 웃고 떠들고 하는 게 너무나 충격적이고 슬펐어요. 형은 죽었는데 세상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걸 보고 내가 뭘 해야 할까 하다가 울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울어요?
“두 번 다시 그렇게 울라고 해도 할 수 없을 만큼, 발버둥치고 막 토하면서 울었어요. 그렇게라도 울지 않으면 그 형의 죽음이 너무 불쌍할 것 같아서. 형이 스물다섯 해를 살고 죽었는데 그를 위해 서럽게 울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요. 그렇게 울고 난 후에 제가 느낀 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었어요. 형은 죽었는데 난 살아 있고 밥을 먹고 학점을 받기 위해 뭔가를 한다는 게 너무 죄책감이 드는 거예요. 형의 영정 앞에서 왼손을 찔러서 혈서를 썼어요. ‘김용갑’이라고. (손가락 흉터 보이며) 여기 하얀 자국 보이시죠?”
-독하게 맘먹었군요.
“전 겁쟁이예요. 겁도 많고 의지도 약하고. 내가 살아 있는 동안 형을 잊지 않고 형 제사를 치르겠다고 약속했지만, 내심 형의 1주기가 되었을 때 난 어디 있을까 스스로도 궁금했어요.”
그는 곧 제적당했고 교내에서 치르려던 1주기 추모제는 다시금 깡패들에 의해 무산되었다. 학교 쪽이 사주하고 경찰이 방관하는 가운데, 무차별 폭행을 당하던 고상만은 분신을 기도하다 실패했다. 대신 그의 친구 정연석이 분신해서 병원에 실려 갔다. 학교는 휴교령을 발표하고 농성하던 학생들은 모두 쫓겨났다. 아무 데도 기댈 데 없는 처절한 패배였다.
-그래서 김용갑의 1주기가 되던 날, 어디 계셨나요?
“감옥에요.(웃음) 감옥 들어가 첫날 눈을 뜨니 형의 기일이었어요. 보리밥에 숟가락 꽂아놓고 혼자 추모제를 지냈지요. 그 뒤로 27년째 형 어머님 모시고 추모제를 지내고 있어요. 엊그제가 27주기였네요.”
-출소한 뒤에 여러 사회운동단체나 공공기관의 인권 분야에서 주로 활동하셨죠? 어떤 기사에서 보니 15번 이직했다고 하던데, 지금 더 늘었나요?
“늘었겠죠?(웃음) 그 뒤로도 취직과 이직을 반복했으니. 그래도 사표를 낼 때마다 제 아내가 한 번도 반대한 적 없어요. ‘당신이 하고 싶은 얘기 못하고 죽으면 지나온 삶이 의미가 없지 않으냐?’고 격려해주죠. 제가 그나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아내 덕분입니다.”
사학비리 맞서던 대학시절 운동 선배
실종됐다 도로변에서 변사체로 발견
폭력과 제도의 억울한 희생 지켜본 것
“세상은 아무 일 없는 듯 돌아가더라
그대로 웃고 떠드는 게 너무 슬펐다”
“사형수도 사형 집행 전 죽으면 큰일
교도소 다 처벌받고 징계받잖아요
군대 안에서 군인이 자살하면
정작 아무도 처벌 안 받아요”
당사자와 가족 탓으로 책임 미뤄
이게 무슨 군대입니까?
-늘 억울한 사람 편에 서 오셨지만, 사실 억울함이라는 건 주관적인 감정이잖아요? 억울해 죽겠다고 하는 사람들 얘기를 곧이곧대로 믿었다가 낭패를 볼 수도 있고요. 그런 문제로 갈등을 겪은 적은 없나요?
“사실은 늘 갈등해요. 진실이 뭔지 찾으려고 굉장히 노력하죠. 누군가가 억울하다고 하면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인권운동가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만으로 진실 여부를 판단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억울한 사연을 듣고 경찰, 검찰, 법원이 수사한 기록을 입수해서 꼼꼼히 살펴보죠. 제가 공부는 잘 못하는데(웃음) 관심 있는 사안에 대해선 특이하게 기억을 잘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아요. 수사기록 십몇 페이지에서 본 것과 이천몇백 페이지에서 본 것에 차이가 있다는 걸 금방 찾아내죠. 어? 이상하다 싶으면 거기서부터 따지고 들어가요. 누군가의 주관적인 억울함을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의혹으로 정의해 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생각하고 있어요.”
-변호사나 사설탐정처럼 그런 일로 보수를 받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는 캠페인을 하는 사람이죠. 억울한 누군가와 함께 하는 인권 캠페인? 30대까지는 제가 만난 사람들을 돕는 데 최선을 다하자 다짐하곤 했는데, 지금은 제도를 바꾸고 법과 시스템을 바꿔서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구제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군복무 중 사고를 방지한다고 보호·관심병사 제도가 도입되었는데 이건 효과가 있는 거예요? 아들이 관심병사로 분류돼서 군대생활 힘들어질까봐 걱정하는 엄마들을 많이 봤어요.
“관심병사로 선정이 됐다면 제대시키는 게 답이에요. 자살 우려가 있는 정신질환 병력자들은 관심병사 A급, 이혼한 가정의 자녀들은 B급이고요, 입대 100일 미만자들은 무조건 C급인데….”
-이혼한 부모를 뒀으면 B급이라고요? 도대체 그런 기준은 누가 만든 거예요?
“군대가 만들었겠죠.(웃음) 아이가 죽었는데, 부모가 이혼해서 자살한 거니까 부대 책임이 없다고 하길래 제가 그랬어요. ‘답 나왔네. 그럼 이혼한 부모의 애들은 입대시키지 마시오. 실직한 아버지를 둔 아들도, 대학 떨어진 애들도 징병하지 마시오’ 했어요. 군대에 자식 보낸 부모는 죄가 없어요. 아이를 많이 낳으라고 난리인데, 낳은 아이들을 죽지 않게 해야 하잖아요. 국가가 책임질 수 없으면 징병을 하지 말아야죠.”
-예전에 군대 다녀오신 분들은 요즘 청년들이 유약해서 그렇다고 한탄하죠.
“그렇게 의지 강한 분들만 가라고 하세요. 지금 1급 17만명, 2급 12만명, 3급 7만명인데, 자살자가 3급에서 제일 많아요. 뛰라는데 못 뛰고 쏘라는데 못 쏘는 친구들을 지오피(GOP) 보내서 힘들게 굴리니까 그래요. 젊은층 인구는 줄어들고, 지난 5년간 외국 국적으로 1만7천명이 병역면제 받았는데 그 숫자를 채우려고 10년 전 기준으로 군대 면제해야 할 청년들까지 징병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손 이병 같은 친구도 군대 가고.
“전 군대가 아무나 갈 수 없는 데가 되어야 진짜 강군(强軍)이 된다고 생각해요. 군인 출신 탈북자들 얘기가 대한민국 군대는 전쟁 나면 다 죽을 거라는 거예요. 정말 참담한 얘기가 있어요. 2014년에 임 병장 총기난사 사건이 났을 때 임 병장이 총 들고 도주해서 수색작전이 벌어졌잖아요. 그때 그 부대 관심사병들을 따로 모아서 수색에 내보내면서 그 친구들한테는 총을 안 주고 빈손으로 추적하라고 시켰대요. 임 병장이 관심사병인데 총 쏘고 갔으니까 얘네들도 또 총 쏠까봐서.”
-그럴 거면 왜 투입시켜요?
“그러게요. 실제 교전까지 벌어진 상황에 관심사병 애들을 비무장 상태로 내보내고. 이게 무슨 군댑니까? 그래서 제가 계속 얘기하는 거예요. 자기들이 책임 안 질 거면 왜 징병해서 죽게 하냐고요. 실제로 대대장들이 하는 얘기가, 일개 대대 관리하는 것보다 관심사병 하나 관리하는 게 더 힘들대요.”
-그러면서 왜 데리고 있죠?
“이유는 하나예요. 병력자원을 유지해야만 별(군 장성)의 숫자가 유지되니까요. 진짜 ‘싸우는 군대’가 아니라, 전쟁과는 상관없이 군대 내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무현 정부 때 장성들 수를 20명 줄인다 해놓고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남북관계가 위험하고 어쩌고 하면서 실제론 세 명밖에 안 줄이고 또 여기까지 온 거예요.(한숨)”
안보는 군 고위층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명분이나 보수층을 잡기 위한 정치공학으로 이용되어선 안 된다. 대선후보들이 경쟁적으로 안보 공약을 쏟아내고 있지만, 사병의 인권과 존엄을 강조하는 공약은 보이지 않는다. 정말로 안보가 걱정이다.
녹취 심지연
▶ 이진순 풀뿌리정치실험실 ‘와글’ 대표. 언론학 박사. 새로운 소통기술과 시민참여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연구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다. 사람 사이의 수평적 그물망이 어떻게 거대한 수직의 권력을 제어하는지, 평범한 사람들의 따뜻함이 어떻게 얼어붙은 세상을 되살리는지 찾아내는 일에 큰 기쁨을 느낀다.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