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18일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37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기념사 도중 4명의 ‘광주 열사’ 이름을 호명했다. 공동취재사진
▶ 박관현·표정두·조성만·박래전. 문재인 대통령은 제37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사 연설 도중 ‘광주 열사’ 4명의 이름을 호명했다. 1970년 노동자 전태일이 제 몸을 불사른 이래 이 땅에 숱한 ‘열사’들이 이어졌다. ‘열사’는 어떤 상황에서 탄생해서 사회적 함의를 획득했고, 어떻게 소멸해간 것일까.
지난달 18일 문재인 대통령의 제37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사는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광주의 아픔을 끌어안는 내용도 그랬지만 연설 도중 4명의 ‘광주 열사’ 이름을 부른 게 마음을 흔들었다.
“저는 오늘, 오월의 죽음과 광주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세상에 알리려 했던 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도 함께 기리고 싶습니다. 1982년 광주교도소에서 광주진상규명을 위해 40일간의 단식으로 옥사한 스물아홉 살 전남대생 박관현, 1987년 ‘광주사태 책임자 처벌’을 외치며 분신 사망한 스물다섯 살 노동자 표정두, 1988년 ‘광주학살 진상규명’을 외치며 명동성당 교육관 4층에서 투신 사망한 스물네 살 서울대생 조성만, 1988년 ‘광주는 살아있다’ 외치며 숭실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분신 사망한 스물다섯 살 숭실대생 박래전. 수많은 젊음들이 5월 영령의 넋을 위로하며 자신을 던졌습니다.”
문 대통령이 ‘광주 열사’ 이름을 부른 건, 1987년 6월항쟁 직후 열린 이한열씨 장례식에서 문익환 목사가 열사들의 이름을 목놓아 외친 걸 오마주한 것이었다. 문 대통령 말처럼, 수많은 젊음이 ‘광주학살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몸을 던지던 시절이 있었다. ‘열사’라는 호칭이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던 시절이었다.
‘열사의 시대’는 갔다. ‘열사’라는 단어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시대다. ‘열사’는 어떤 상황에서 탄생해서 사회적 함의를 획득했고, 어떻게 소멸해간 것일까. 임미리 박사(정치학)가 곧 출간하는 책 <열사, 분노와 슬픔의 정치학>은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임 박사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열사’는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집권과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중요한 정치·사회적 현상으로 등장했다. 문 대통령의 5·18 기념사처럼 ‘열사’와 ‘광주’는 뗄레야 뗄 수가 없다.
한국 사회에서 ‘열사’는 폭압적인 정권 또는 체제에 맞선 ‘저항적 자살’에 부여된, 저항의 상징이며 추모의 대상을 뜻한다. ‘열사’의 호명은 1980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특정 시점에 일어난 사회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1980년 이전의 열사는 두명뿐이라고 임 박사는 밝혔다.
70년 분신 전태일, 76년에 첫 ‘열사’ 호칭
열사의 시초는 1970년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분신한 전태일이다. 70년 11월13일 평화시장 재단사였던 전태일은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려다 경찰에 막히자 휘발유로 몸을 적시고 라이터 불을 당겼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가 그가 외친 구호였다. 전태일 분신사건은 1970년대 노동운동사의 한 획을 그었을 뿐 아니라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전태일’을 열사로 부르기 시작한 건 한참 뒤의 일이다. 그의 사망 직후 열린 추도식에선 ‘전태일씨’라고 불렀다. 또 ‘전우여 잘 자라’를 개사한 전태일 추모가에서도 처음엔 ‘선생’ 또는 ‘동지’라는 호칭을 썼다. ‘열사’라는 호칭을 처음 사용한 건 1976년 청계피복노조의 야학교사들이었다. 1975년 박정희 유신체제를 비판하며 할복자살한 서울대생 김상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사회에서 ‘열사’는 폭압적인 정권 또는 체제에 맞선 ‘저항적 자살’에 부여된, 저항의 상징이며 추모의 대상을 뜻한다. 전태일 열사 45주기를 앞둔 2015년 11월 서울 종로구 종로5가 버들다리 고인 물에 비친 전태일 동상.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김상진은 75년 4월11일 대학동료 2명이 구속된 걸 규탄하는 집회에서 양심선언문을 낭독하고 할복했다. 8일 뒤인 4월19일 열린 4·19 기념행사에서 신민당 김영삼 총재는 자유민주주의 토착화를 역설하며 “김상진 열사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말했다. ‘저항적 자살’에 열사라는 호칭이 등장하는 첫 사례로 보인다. 김상진이 초기부터 ‘열사’라 불린 데 반해 전태일은 수년이 흐른 뒤 ‘열사’라는 호칭을 얻었다. 그 이유를 임 박사는 저항적 자살의 성격 차이로 분석했다. 김상진의 저항은 추상적 충돌상황에서 도덕률에 의해 마땅히 해야 할 실천을 하는 ‘당위적 자살’이다. 역사적으로 유관순·이준처럼 이런 유형의 저항엔 쉽게 열사의 표현을 썼다. 반면 구체적인 충돌상황에서 강하게 분노를 표출하는 전태일과 같은 ‘실존적 자살’에 열사란 호칭을 붙이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라 한다.
임미리 박사, <열사, 분노와 슬픔의 정치학>
‘저항적 자살’에 부여된 ‘열사’ 함의 분석
80년대 전두환 정권 들어서 본격적 사용
1980년~2000년대 초 나타난 사회현상
86년 이후 집단적·연쇄적 현상 두드러져
“산 자가 죽은 자 따르는 것으로 계승”
‘강경대 사건’ 91년엔 11명이나 분신
“1991년은 열사 의례가 집단화된 때”
독재정권에 맞서 스스로를 던진 이들에 ‘열사’란 호칭을 본격 사용한 건 1980년 전두환 정권 때부터다. 1970년대엔 전태일 김상진 단 두명뿐이던 열사의 수가 크게 늘었고, ‘열사’란 호칭이 사회적 의미로 사람들 마음속에 자리잡았다. 임미리 박사는 “전태일의 분신이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가는 예수의 대속(代贖)으로 해석됐다면, 1980년대의 죽음은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과 ‘희생’의 의미를 띠게 됐다”고 말했다. 수백명의 시민이 숨진 광주항쟁이 그 기폭제가 됐다.
1980년 광주항쟁이 유혈 진압된 직후인 5월30일, 서강대 학생 김의기가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6층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뿌린 뒤 투신 사망했다. 김의기는 5월19일 광주 북동성당 행사 참석을 위해 광주에 갔다가 계엄군의 만행을 목격하고 서울로 돌아와 “광주의 진상을 알려야겠다”고 주변에 말했다. 그는 유인물에서 “무참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뜨거운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유신잔당들의 악랄한 언론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 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외쳤다. 거리의 계엄군들이 곧바로 달려왔지만, 유인물을 수거하느라 땅에 떨어진 김의기는 20여분간 그대로 방치됐다고 한다. 김의기 투신 열흘 뒤인 6월9일엔 성남의 노동자 김종태가 서울 신촌사거리에서 분신 사망했다. 김종태는 성남에서 이해학 목사가 세운 주민교회를 다녔는데, 소책자 형태로 돌아다니던 <전태일 평전>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는 분신하기 전 이해학 목사에게 “내 작은 몸뚱아리를 불 싸질러서 광주 시민 학생들의 의로운 넋을 위로해 드리고 싶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남겼다. 김종태의 분신 1년 뒤인 1981년엔 서울대 경제학과 학생 김태훈이 교내 도서관 6층에서 “전두환 물러가라”를 세번 외치고 투신했다. 세 사람의 죽음은 ‘저항적 자살’의 지향이 분명하게 ‘독재정권 타도’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열사’를 한국 민주주의운동사에서 중요한 지점에 자리매김해야 하는 이유다.
송광영, 85년 대학생 첫 분신자살
1982년 10월12일엔 5·18항쟁 때 전남대 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이 ‘광주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40일간 단식투쟁을 하다 교도소에서 사망했다. 언론 통제에 막혀 비보도 또는 단신 처리됐던 김의기·김종태·김태훈의 죽음과 달리, 박관현의 죽음은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전국 교도소에서 박관현 열사를 추모하는 동조 단식이 일어났고 광주에선 거리시위가 벌어졌다. 85년 8월15일엔 광주 전남도청 앞에서 노동자 홍기일이 분신했다. 홍기일은 광주항쟁에 참여했다가 총상을 입은 시민군 출신으로, 건설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홍기일은 숨지기 전 전남대병원에서 “5·18에서 살아남았다는 게 부끄럽고 제국주의 침략에 항의하고자 8월15일을 (분신 거사일로) 선택했다”고 말했다. 홍기일의 죽음은 재야세력이 처음으로 공동 대응에 나선 ‘저항적 자살’ 사건이었다. 경찰은 홍기일이 낮에 숨지면 시신을 빼돌리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강제로 산소호흡을 시키다 새벽에 호흡기를 제거하고, 부친을 동행시켜 홍기일의 시신을 야산에 몰래 매장해버렸다. 그로부터 한달 뒤인 9월17일엔 성남 경원대 학생 송광영이 교내 집회 중 온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학원안정법 반대’를 외치며 분신했다. 대학생으로는 첫번째 분신자살이었다.
1982년 옥중 단식투쟁을 벌이다 숨진 박관현 열사가 5·18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연설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988년 명동성당에서 투신자살한 조성만 열사. <한겨레> 자료사진
1986년부터 ‘저항적 자살’의 형태는 약간 달라진다. 그 이전엔 개별적·분산적이었다면, 86년부터는 집단적이고 연쇄적인 ‘저항적 자살’이 잇따랐다. 1986년 4월부터 6월 사이에 6명, 1987년 2월에서 5월 사이에 4명의 ‘열사’가 출현했다. 임미리 박사는 “그 시기 많이 불린 노래 가사처럼, 산 자가 죽은 자를 따르는 것으로 죽은 자의 투쟁을 계승했다”고 말했다. 시작은 1986년 4월28일 서울대생 김세진과 이재호의 분신이었다. 오전 9시30분 서울 관악구 신림사거리 가야쇼핑센터 맞은편 3층 건물 옥상에서 두개의 불길이 솟아올랐다. 현장에 있었던 장유식 변호사는 이렇게 기억했다. “가야쇼핑센터 앞에 모인 전방 입소 대상 85학번 400여명은 도로에 연좌했다. 건물 옥상에서 이재호·김세진 두 열사가 핸드마이크를 손에 쥐고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를 선창하면 도로의 학생들이 따라 외쳤다. 경찰이 학생들을 무차별 구타하며 연행하기 시작했다. 일부 경찰은 3층 건물 옥상으로 뛰어올라갔다. 두 열사는 시너를 온몸에 끼얹고 외쳤다. ‘시위대에 덤벼들지 말라. 우리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가까이 오면 분신할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망설임 없이 옥상으로 진입했고, 두 열사는 라이터로 불을 당겼다. 김세진·이재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게 아니다. 명백한 타살이라고 본다.” 김세진·이재호의 분신은 한국전쟁 이후 첫 대중적인 반미 투쟁의 서막이었다. 두 사람의 죽음은 전두환 독재정권이 무너지기 직전, 폭압통치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에 출현했다. 그랬기에 인화력 강한 도화선과 같았다. 한달도 채 못 된 5월20일 서울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이동수가 몸에 불을 붙이고 뛰어내렸다. 건너편 광장에서 문익환 목사가 연설하던 중이었다. 다음날인 5월21일엔 서울대생 4학년 박혜정이 이동수의 분신현장을 목격하고 괴로워하다 한강에 투신해 숨졌다. 6월5일엔 고교생 이경환이 서울 청량리 맘모스호텔 옥상에서 투신했다. 신문에선 이경환의 죽음을 ‘성적 비관’ 탓으로 돌렸지만, 투신 당시 옥상에 놓아둔 가방 안에선 정권을 비판하는 글과 복사물이 발견됐다. 6월26일엔 목포의 사회운동가 강상철이 분신했다. 그는 사망 직전 비교적 또렷한 목소리로 “독재가 어떤 것인가를 온 국민에게 알리고 더 멀리 국제적으로 알려서 우리의 뜻인 민주화, 우리의 꿈인 민족의 통일을 이룩하고자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86년 봄 두달 사이에 여섯명이 스스로를 민주주의 불꽃으로 산화시켰다.
‘분신정국’이라 불린 91년 5월
‘저항적 자살’이 잇따른 또다른 시기는 1991년이었다. 그해에 모두 11명이 분신했고, 그중 9명은 흔히 ‘분신정국’이라 불린 5월 투쟁 기간에 몸을 살랐다. 4월26일 명지대생 강경대씨가 교내시위 도중 경찰 폭행에 의해 숨졌다. 강씨의 죽음은 5월 내내 87년 6월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거리시위를 불러왔다. 또 이 기간에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김기설, 윤용하, 이정순, 차태권, 김철수, 정상순이 분신했다. 그중 대학생은 박승희, 김용균, 천세용 세명뿐이었다. 임미리 박사는 “1991년은 열사 의례가 집단화된 때였다. 1990년 처음으로 열사 합동추모제가 열려, 이전까지 개별적으로 치러지던 추모행사가 집단화·조직화했다. 87년과 달리 91년엔 타살이 자살을 불러왔고, 대학생의 죽음이 노동자와 시민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연이은 9명의 분신은 대학생뿐 아니라 노동자와 시민도 죽음을 하나의 실천으로 인식했다는 걸 의미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5월 투쟁과 잇따른 분신은 오히려 학생운동을 비롯한 전체 저항운동의 약화와 고립을 가져왔다. 공안세력은 ‘김기설 유서대필 사건’을 조작해냈고, “분신의 조직적 배후가 있다”는 프레임으로 대중과 운동권을 분리했다. 폭압적 독재정권 아래선 운동을 확산하는 역할을 했던 ‘저항적 자살’은 이제 그 의미를 다해가고 있었다.
1991년 시위 도중 경찰 폭행으로 숨진 명지대생 강경대 열사의 노제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임미리 박사는 “김대중 정권 이후 1998~2012년의 시기는 ‘열사의 해체기’에 해당한다. ‘열사’의 숫자는 눈에 띄게 줄었다. 열사로 호명됐더라도 예전의 의미를 획득하진 못했다. 죽음의 양상은 점차 고립되어갔고 추모집단도 해체되기 시작했다. 1998년 이후 ‘정권 타도’ 구호는 사라졌다. ‘열사 호명’의 해체는 기본적으로 민주 대 반민주 전선의 붕괴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밝혔다.
박찬수 기자
pc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