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마트시티’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을 담는 도시를 변화시키겠단 이야기인데, 정작 시민들에겐 잘 와닿지 않는 말입니다. 때마침 지난 11월6일부터 24일까지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진행한 스마트시티 마스터 과정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는데요. 스마트시티 전략을 내놓았던 런던·바르셀로나·암스테르담 등 유럽 3개 도시를 돌아보는 일정이었습니다. 각 국가와 도시 상황에 따라 스마트시티에 대한 정의는 조금씩 다른데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더 나은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고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함으로서 궁극적으로 시민의 삶을 개선하고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각 도시에서 만난 이들이 보여주거나 들려준 새로운 움직임 가운데 ‘내 일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겠다’는 고민을 던져준 세 가지 장면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바르셀로나 ‘슈퍼블록’ 실험
최근 몇년간 공기질 악화
5천~6천명 거주 구역 내 도로
차량 억제하고 사람에게 우선권
사업 반대 펼침막도 곳곳에
하늘에서 바르셀로나를 내려다보면 네모반듯한 블록(113.3×113.3m)들이 차곡차곡 들어서 있는 걸 볼 수 있다. 1859년 이러한 도시계획을 제안한 토목기사 일데폰스 세르다는 블록 바깥 일부 면에 건물을 배치하고 비어 있는 중앙 공간은 모든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정원을 구상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블록에 자리잡은 건물 수와 크기는 커졌고, 중앙 공간은 주차장이나 쇼핑센터로 채워졌다. 게티이미지뱅크
11월11일 토요일 저녁,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의 영혼이 담긴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 성당 앞부터 지중해 해변에 이르는 도로는 시위대 75만명으로 가득 찼다. 스페인으로부터 카탈루냐 지방정부의 독립을 추진하다 수감된 지도자들의 석방을 외치는 인파였다. 앞서 스페인 정부는 독립을 선언한 카탈루냐 지방정부의 자치권을 몰수했지만 지역의 미래를 둘러싼 갈등과 여진은 계속되고 있었다. 13~14세기 해상제국으로 번영을 누리던 카탈루냐는 15세기 스페인 영토로 편입됐지만 지금까지 고유한 언어와 관습을 유지해왔다. 카탈루냐 지역 핵심 도시인 바르셀로나는 19세기 말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 운동의 중심지였으며,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에게 끈질기게 저항한 곳이다. 역사적 맥락에서 보인 바르셀로나의 ‘반골 기질’은 도시문제 해결 방식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첨단산업단지 길바닥에 탁구대?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된 13일 월요일 오전, 바르셀로나 도심 동남쪽 산마르티(Sant Marti) 지구 포블레노우(Poblenou) 지역으로 향했다. 1800년대 방직산업 단지였다가 1960년대 제조업 쇠퇴로 공장들이 대거 철수하면서 황폐해진 곳이다. 그렇게 버려진 땅이 생기를 되찾은 건 2000년 이후다. 당시 바르셀로나는 ‘22@프로젝트’라는 도심재생 사업을 통해 이곳을 지식기반산업·교육기관·주거 등 문화시설이 공존하는 혁신지구로 탈바꿈시켰다. 포블레노우는 공업전용 지구를 뜻하는 코드 ‘22a’로 불렸지만, 이제 ‘a’는 인터넷을 상징하는 ‘@’으로 대체됐다.
22@혁신지구의 중심 건물은 ‘녹색 곤충’이 연상되는 8층짜리 빌딩 메디아-틱(Media-TIC)이다. 기업 유치가 활발하다는데 거리가 주택가처럼 조용하고 한산했다. 그러고 보니 메디아-틱 건물 바로 앞 교차로엔 벤치들과 가로수, 놀이터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길바닥에는 아이들의 ‘땅따먹기’ 놀이용으로 짐작되는 하얀색 원 그림이 보인다. ‘여기서 놀다간 사고 나는 거 아닌가’란 걱정이 무색하게 달리는 차를 거의 볼 수 없었다. 차로를 따라 쭉 걷다 보니 ‘수페리야’(Superilla·슈퍼블록)라는 글자가 보인다. 그 표시 바깥 차로로 트럭 한 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블록 9개를 합친 슈퍼블록이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표시. 응급차나 주민 소유 차 이외 일반 차량은 슈퍼블록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슈퍼블록은 바르셀로나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인 만사나(Manzana·블록) 9개를 한데 묶은 것이다. 가로세로의 길이가 각각 400m로 5000~6000명이 생활하는 작은 마을이다. 슈퍼블록 안쪽 차로엔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쉽사리 들어올 수 없다. 주차도 정해진 공간에 해야 한다. 주민들이 소유한 차나 응급차 등의 공적 임무를 맡은 차들만 통행이 가능한데, 제한속도는 시속 10㎞다. 슈퍼블록 밖 도로의 제한속도는 보통 50㎞다. 포블레노우 지역 슈퍼블록은 지난해 9월 조성됐는데 건축학과 교수와 학생, 시민들이 자동차로부터 해방된 공간을 어떻게 사용할지 함께 논의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재활용 자재를 활용한 놀이터가 만들어졌다.
150년 전에도 블록 쌓은 까닭
하늘에서 바르셀로나를 내려다보면 네모반듯한 블록(113.3×113.3m)이 차곡차곡 들어서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러한 블록은 1800년대 급속한 산업화에 따른 도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했다. 당시엔 성곽 안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는데 인구가 급증하자 주거 환경이 열악해졌고 전염병마저 창궐했다. 이에 바르셀로나는 1859년 토목기사 일데폰스 세르다가 제안한 설계안을 바탕으로 성곽을 무너뜨리고 도시를 확장한다. 세르다의 계획안을 보면, 네모난 블록 바깥 4개 면 가운데 일부 면에만 건물을 배치하고 비어 있는 중앙 공간은 모든 사람이 함께할 수 있는 정원으로 조성했다. 돈이 많든 적든 누구나 채광과 공기 순환이 이루어지는 열린 공간에서 살게 하자는 구상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블록에 자리잡은 건물 수와 크기는 커졌고, 중앙 공간은 주차장이나 쇼핑센터로 채워졌다.
바르셀로나 시의회 이동성 분야 위원인 메르세데스 비달 라고는 지난 3월 영국을 기반으로 한 도시 전문 잡지 <시티즈 투데이>와 한 인터뷰에서 슈퍼블록 추진 배경에 대해 “바르셀로나 운송수단 가운데 자동차·오토바이가 차지하는 비중은 20%이지만 전체 도로의 60%를 점유하고 있다. 우리는 보행자나 자전거, 대중교통 이용자들을 위해 (이러한 불균형을) 재조정해야 한다. 더 나아가 휴식과 여가, 스트리트 마켓과 같은 시민들 간 교류 활동을 위한 도시 공간을 회복시킬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바르셀로나는 슈퍼블록 사업이 성공할 경우 최대 160개 교차로를 시민 공유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올해 8월 초까지 슈퍼블록 4곳이 지정됐고, 향후 13개의 사업이 진행될 예정이다.
11월18일 오전, 바르셀로나 도심 동남쪽 산마르티 지구 포블레노우 지역 슈퍼블록 안 도로를 거닐었다. 도로 왼편에선 시민들이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부유먼지 탓 매년 3500명 조기 사망
바르셀로나에서 슈퍼블록 개념이 등장한 건 최근이 아니다. 1993년 구도심에 위치한 산타마리아 델마르 성당 인근, 2005년 그라시아 지구에 슈퍼블록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실험이 주요한 정책으로 자리잡은 건 2015년 아다 콜라우가 시장이 되면서부터다. 콜라우 시장은 은행 주택담보대출을 갚지 못해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놓인 사람들을 보호하는 운동을 해온 시민활동가 출신이다.
최근 수년간 공기 질이 악화하면서 바르셀로나는 오염물질을 내뿜고 소음공해를 유발하는 자동차 통행량을 2018년까지 21% 이상 줄이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웠다. 지난해 시의회가 발간한 보고서 ‘거리를 삶으로 채우자’(Let’s fill streets with life)를 보면 “지름 10㎛(마이크로미터) 이하 부유먼지(PM10) 공해로 인해 바르셀로나 도심에서 해마다 약 3500명이 조기 사망하고 있다. 또 최근 연구들은 대기오염이 취학연령 아동들의 두뇌 발달에 중대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짚었다. 런던을 포함해 다른 유럽 도시들도 차로 축소, 자전거 인프라 및 대중교통 확대, 교통부담금 부과, 노후차 통행 금지 등 다양한 정책을 동원해 자동차를 도심에서 몰아내고 있다.
포블레노우 인근에 위치한 한 공동주택을 올려다보니 카탈루냐 깃발과 함께 슈퍼블록 사업에 반대하는 펼침막이 보였다.
슈퍼블록이 점차 확대되고 있지만, 바르셀로나의 모든 시민들이 이런 변화를 환영하는 건 아니다. 포블레노우 인근 건물에선 슈퍼블록에 반대한다는 뜻의 ‘노 수페리야’(NO Superilla) 펼침막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올해 1월 주민 일부는 슈퍼블록 사업 추진에 항의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주민들의 경우 내 차를 집 앞에다 주차해놓지 못하고 지정된 구역에 해야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크다는 것이다. 지난 2월23일 영국 <로이터>는 슈퍼블록에 대한 찬반 의견을 자세히 보도했는데, 슈퍼블록 바깥에서 일하는 변호사 알리시아 아빌라는 이 사업을 ‘재앙’이라고 주장했다. 슈퍼블록 안쪽엔 자동차가 줄었을지 몰라도 바깥 지역은 그만큼 더 혼잡해졌다는 것이다. 반면, 포블레노우에 위치한 보험회사에서 일하는 에르네스토 알론소는 “슈퍼블록이 지역을 바꿀 것”이라며 “시는 자동차와 오토바이 수를 줄이기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바르셀로나/글·사진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참고자료: <스페인 바르셀로나 앙상쉐 블록의 변화 특성에 관한 연구>(한광야 등 3명·2008)
*취재지원: 한국언론진흥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