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털어놓는다.
1991년 대하드라마 <땅>은 첫회 방송부터 세 주인공의 기구한 인생유전만큼이나 파란의 운명을 겪어야 했다. ‘제2화 해방의 땅’은 1945년 해방 직후 ‘장건식’(길용우·맨오른쪽)이 학도병 시절의 친구 ‘윤기현’(최낙천·가운데)을 찾아갔다가 정체불명이나동성동본에 항렬까지 같은 ‘장대식’(오지명)을 만나 의형제를 맺으며 시작한다. 사진 엠비시가이드 제공
“대하드라마 <땅>은 1991년이 시작된 첫째 일요일인 1월6일 밤에 방송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두 개의 큰 명제에 당면해 있습니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민주화, 경제적으로는 분배구조의 개선이 그것입니다. 대하드라마 <땅>은 정치적으로 착실히 진행되고 있는 민주화 추세에 발 맞추어, 경제적 정의의 문제는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입니다. 21세기를 10년 앞둔 현재의 시점에서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발전과 분배가 균형을 이루는 건전한 체제의 구축입니다. 이 체제는 외부의 충격에 탄력적이며 자율적으로 안정지향적인 그런 체제가 될 것입니다. 대하드라마 <땅>은 이러한 전제와 소망하에 1945년부터 현재에 이르는 우리 현대사의 영욕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입니다. <땅>은 기본적으로, 사실을 객관적으로 제시하고, 체제의 중심부로 유도 통합하려는 입장을 취한 다큐드라마입니다. 정직하고 건강한 드라마입니다.”
1991년 1월17일 방송위원회 연예오락심의위원회에 출석한 <땅> 연출자(고석만)의 모두진술이다. 앞서 1월6일 대하드라마 <땅>(김기팔 극본)의 첫 방송 이튿날인 월요일 아침 ‘청와대 비상대책회의’가 소집됐다. 훗날의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애초 대부분은 심각하지 않게 참석했는데, 회의가 진행되면서 진지한 분위기로 전환되었다 한다. 정무·공안·문화 등이 참석했고, 정무 쪽이 회의를 주도했다. 핵심은 작가와 연출자. ‘두 사람에게 마당을 만들어준 방송사가 문제’라는 게 문공부 의견, ‘이 두 사람은 사상검증엔 문제가 없다. <제1공화국> 때 샅샅이 조사했다’는 게 안기부의 의견이었다. ‘최초 명령자’가 누군지 뻔히 알면서도, 왜 그랬을까? 한낱 드라마 한편이데…, 그것도 대하드라마의 프롤로그에 불과한데…, 3당합당이 빚은 정치 진공상태의 회의가 공허하게 열린 것이다.
대하드라마 <땅>은 1991년 1월 6일 첫회가 나가자마자 청와대 비상대책회의가 열렸고, 이어 1월17일 방송위원회 연예오락 심의위에 연출자가 호출받아 파문을 던졌다. <한겨레> 1991년 1월19일치.
이 시국의 핵심은 ‘5공’과 ‘6공’의 갈등 구조이지만 아무도 말 못할 처지다. 만연한 책임전가 풍토 속에서 결론은 무조건 조기종영으로 치닫는다. 이런 경위로 그날 방송위원회 연예오락심의위원회가 열린 것이다. 위원장은 팽원순 한양대 교수, 저쪽에 손봉호 교수도, 희곡 쓰는 이강백 작가도 보인다. 연출자의 진술은 계속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오늘 우리 사회에서 방송이 갖는 의미와 책무를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방송은 우리 사회의 기본가치인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며, 그 확대재생산에 봉사해야 하는 것이며, 동시에 우리 사회의 환경 감시자로서의 책무를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우리는 다양한 이익집단으로부터의 외압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외압을 효과적으로 배제 또는 겸허하게 수용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직업적인 윤리와 존엄을 확보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만나면 좋은 친구’, 그것이 오늘 우리가 지향하는 방송의 참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심의위원회의 출석 요청 공문을 받고 <땅> 제작진은 밤새워 ‘예상문제 50선’을 준비했다. 방송위에서 지적한 빈부갈등 문제, 사회불안 조성, 좌우 대립, 특정 인사 등장, 뉴스 화면 사용, 반미 감정, 부자의 사투리 문제 등등 소소한 문제에 대하여 치밀하게 준비한 예상 답변서였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한마디의 질문도 없이, 정해진 시간만큼의 진술만 허용했다. 논쟁 토론의 순서는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만의 비공개 심의위원회가 열리고, ‘의견’이 나왔다고 한다. ‘해명’. 아주 낮은 단계의 경징계였다. 특히 ‘담당 피디에 대한 징계는 있을 수 없다고 못박았다’고 들려왔다.
1991년 1월22일 열린 방송위원회 본회의에서는 대하드라마 ‘땅’에 대해 연예오락 심의위의 경징계 방침을 뒤집고 최고 중징계인 ‘시청자에 대한 사과’ 명령을 내렸다. 강원용 위원장, 김한길 사무국장을 비롯한 방송위원들이 임시회의를 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1월22일 상위 개념의 방송위원회 본회의가 열렸다. 역시나 준비된 판결문을 통과시키는 요식행위였다고 한다. 방송통제의 최고 수위 ‘시청자에 대한 사과’ 명령이 떨어졌다. 주문에 따른 판결문을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규격대로 방송 고지하고, 담당 제작자는 소정의 징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결정은 비공개회의에서 다수결의 표결 절차조차 거치지 않은 채 나온 것이어서 방송위원들 사이에서도 공정성을 의심했다고 알려졌다. 그리고 방송위원회는 유례없이 긴(11쪽) ‘심의의결 통보문’을 발송해왔다. 이때 방송위원회 위원 명단은 이렇다. 위원장 강원용, 부위원장 김규, 위원 양호민·정의숙·이중식·최서영·정순일·이상신·박용상 그리고 사무총장 김한길.
‘시청자 여러분께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본 방송은 지난 1월6일 방송한 대하드라마 <땅―서막, 오늘의 땅> 프로그램 내용 중 국민 상호간의 불신과 계층간, 지역간의 갈등을 조장하고 방송의 품격을 손상시킨 부분이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에 위배되어 방송위원회로부터 ‘시청자에 대한 사과’의 제재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좋지 못한 내용을 방송한 데 대해 시청자 여러분께 정중히 사과드리며, 앞으로는 이러한 사례가 반복되지 않도록 프로그램의 공공성 제고와 품격 유지에 각별히 유의하겠습니다.’
누가 작성한 사과문인지 모르지만, ‘좋지 못한 내용’이란 문구에 대해서, 이 역설적인 교훈 앞에 방송 관계자들은 옷깃을 여미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문제는 방송위라는 독립된 국가 심의기구가 개개 프로그램에 대해서 이래라저래라하는 것은 위헌 소지가 있다는 점이다. 포괄적 심의 기능을 가진 방송위에 정책 심의 기능은 없고 프로그램 심의 기능만 있다 보니, 정부당국 또는 정치권에서 개별적으로나 집단으로, 방송위원이나 심의위원에게 불평을 했을 때, 이를 압력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심의에 반영하게 되는 것이다. 즉, 방송위원 스스로가 외압에 약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외압을 환영하고 초청하는 자세라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년 전 무리하게 방송법을 통과시킨 저의가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자 여론의 불이 붙었다. ‘<땅> 표현 ‘뉴스 삽입’으로 다양성 모색’(<중앙일보> 91년 1월 22일치), ‘제작진, 정부·회사로부터 궤도수정 압력받아’(<시사저널> 91년 1월24일치), ‘방송위 드라마 <땅>에 사과명령’(<조선일보> 91년 1월25일치), ‘빈부생활상 극단 묘사, 국민불화 조장 이유’(<세계일보> 91년 1월26일치’, ‘정부, 방송위에 잇단 압력’(<동아일보> 91년 1월26일치), ‘선거앞둔 정부 방송통제 의도’(<한겨레> 91년 1월26일치), ‘어떻게 피할까에 더 신경’(<시사토픽> 91년 1월26일치) ‘시험대에 오른 방송위’(<동아일보> 사설, 91년 1월27일치)
마침내 91년 1월27일 명령대로 ‘사과 방송’이 나가자 여론은 더 뜨거워졌다.
‘방송위 독단, 방송사에 격려전화 빗발’(<한겨레> 91년 1월30일치), ‘방송위원회 독립성 유지 장치를’(<한겨레> 91년 1월31일치), ‘김태동 기고 <땅>이 땅에 매장! 빈곤세습’(<언론노보> 91년 1월31일치) ‘부패현실 인정한 정부, 방송위 자충수’ ‘국민이 할 판단, 왜 방송위가 하나’ ‘빈부격차 현실, 드라마보다 심각’(<한겨레> 91년 2월1일치), ‘오늘의 초점―공익성 보호 대 자율성 침해 팽팽’(<동아일보> 91년 1월29일치).
드라마 <땅>에 대한 방송위의 징계 결정은 ‘자율성 침해-공익성 보호’ 주장이 팽팽히 맞서며 논쟁도 달구었다. <동아일보> 91년 1월29일치.
대하드라마 <땅> 제3회째인 1월27일 ‘사과 방송’이 나가자 여론은 방송위원회에 대한 비판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한겨레> 91년 1월30일치.
방송 첫회부터 조기종영된 15회까지 넉달간의 ‘현대사 속 현대사’로 들어가 본다.
#제2화 ‘해방의 땅’(1월13일 방영)
해방된 1945년 겨울, 일본이 망하자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갈라지고, 찬탁과 반탁의 갈등 정국, 학병에서 돌아온 장건식(길용우)과 친구 윤기현(최낙천)은 의문의 사내 장대식(오지명)과 조우. 지주 집안 건식의 집안 풍모와 아들 귀환 소식.
#제3화 ‘땅의 이데올로기’(1월20일 방영)
미군정시대 개막. 바야흐로 영어시대. 통역정치시대. 일제 잔재와 친일파 척결 문제 대두. 토지개혁을 앞둔 이념의 충돌. 좌우의 대립. 로맨티시스트 건식의 서순영(한혜경)을 향한 그리움. 첫눈 오는 날 만나자던 삼청공원의 엇갈림. 서순영은 소식 끊겨 결혼했으나 곧 실패. 숨는다.
#제4화 ‘분배되는 땅―상’(2월3일 방영)
토지개혁 방향. 무상분배와 무상몰수를 선언하는 건식. 지주 아버지와의 논쟁. 건식 부모 위기. 국대안 반대. 대구 10·1사태. 좌우익 피 흘리는 싸움의 시작. 토지개혁 논쟁.
#제5화 ‘분배되는 땅―하’(2월10일 방영)
우익의 토지개혁을 앞둔 영년식물 전략. 대식(오지명)과 건식 아버지(최명수)의 술책. 대식의 건국청년단 활약. 기현(최낙천)은 앞잡이에 나서고…건식과 대식의 좌우갈등 극명.
#해설 “논쟁은 계속되었습니다. 그 논쟁의 전말을 자세히 기록하고 드라마로 만들어, 시청자 여러분들이 보고 판단하게 만들어 드리는 것이 엠비시 대하드라마 <땅>의 본분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청자 여러분… 그러나 시청자 여러분….”(해설자)
#제6화 ‘피 흘리는 땅―상’(2월17일 방영)
6·25 한국전쟁 전야. 기습 남침과 건식 집안의 피난 행로. 민주주의 신봉자 건식과 안영자(오연수)의 만남. 안영자를 찾아 빨치산이 된 건식과 토벌대장 대식의 충돌.
#제7화 ‘피 흘리는 땅―중’(2월24일 방영)
적 치하 90일의 서울. 고향의 보도연맹. 건식과 안영자의 뜨거운 사랑.
#제8화 ‘피 흘리는 땅―하’(3월3일 방영)
한국전쟁. 좌우대립의 민족상잔. 안영자의 죽음. 팔공산 빨치산에서 지리산 빨치산으로 옮겨간 건식의 갈등.
#제9화 ‘유형의 땅’(3월17일 방영)
광주 빨치산 수용소의 건식, 부상으로 사경을 헤매고…. 아들을 찾기 위해 전 재산을 ‘쇼부 치는’ 아버지. 전향 거부하는 건식. 죄 받은 땅의 사람들, 그들에게 내려진 유형의 슬픈 역사.
대하드라마 <땅>의 ‘제9화-유형의 땅’에서 빨치산 수용소에서 사경을 헤매는 아들 장건식(길용우)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최명수·왼쪽)는 전 재산을 걸고 장대식(오지명·가운데)의 주선으로 ‘우익 실세’를 만난다. 사진 엠비시가이드 제공
#제10화 ‘격동의 땅―상’(3월24일 방영)
드라마는 조지훈의 시 ‘터져나오는 함성’부터 시작된다. ‘민주주의여 절망하지 말아라./ 이대로 바윗 속에 끼여 화석이 될지라도/ 1960년대의 포악한 정치를 네가 증거하리라./ 권력의 구둣발이 네 머리를 짓밟을지라도/ 잔인한 총알이 네 등허리를 꿰뚫을지라도/ 절망하지 말아라/ 절망하진 말아라/ 민주주의여! 민주주의여!’
#해설 “1960년 4월에 민중의 봉기가 있었습니다. 4·19! 욕심 많은 팔십 노인과 그 수하의 자유당 정권이 영구집권을 음모하면서 온갖 못된 짓 다 하는 데 대한,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전 민중의 분노가 폭발한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1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 폭압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은 이 땅의 민중은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시키자 들고일어섰고 독재정권의 하수인인 경찰은 총까지 쏘아 동족은 피를 흘렸습니다. 그러나 민중은 굴하지 않고 싸웠습니다. 그래서 이승만 정권은 12년의 장기독재를 끝내고 물러났습니다. 엠비시 대하드라마 <땅> 제10화는 ‘격동의 땅’ 1960년 전후의 이야기올시다.”
#제11화 ‘격동의 땅―하’(3월31일 방영)
학생혁명 직후, 방종과 무법천지로 단죄되던 시대 이야기. 기회주의자들의 변신. 우종민의 회유, 민족통일전선과 대식의 관망. 건식의 가난한 출판사 경영.
#제12화 ‘5월의 땅’(4월7일 방영)
5·16 군사쿠데타.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반공제일주의 시대의 민족주의자들. 이념갈등에 세대갈등까지. 갈등의 세월.
#제13화 ‘사랑과 미움의 땅―상’(4월14일 방영)
박정희 시대를 맞이한 기회주의자들의 발빠른 부동산 투기. 건식과 무등산 여인 한씨(김해숙)의 눈물겨운 결혼식. 건식의 재기 몸부림.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사건에 연루된 장강(조경환)의 재판.
#제14화 ‘사랑과 미움의 땅―하’(4월21일 방영)
땅투기 열풍 속에서 순댓국 장사에 나선 건식과 한씨, 득남. 화폐개혁. 장대식의 요정 파티에 초청된 박정희.
대하드라마 <땅>은 4개월째 <엠비시> 사전심의에서 제14화 장대식(오지명·왼쪽)이 운영하는 요정의 파티에 박정희가 등장하는 장면을 문제 삼으면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사진 엠비시가이드 제공
문제의 ‘제14화’ 대본을 받아든 엠비시 심의실. 사전심의 강화. 삭제, 삭제, 또 삭제, 표면적 악역을 자처한 심의실은 고위층과 드라마국 간부와 결탁되어 구조적으로 압력을 행사해온 터이다. 심의실에서는 작가와 연출자를 적대시하는 듯 보였다. 심의실은 대본 내용을 대내외에 퍼뜨리기 시작한다. “박정희가 나왔다!”, “정경유착이 시작되었다!”
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