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군사동맹·외화획득’을 위해 미군 기지촌을 운영·관리하면서 성매매를 적극적으로 정당화하거나 조장했다고 인정한 첫 판결이 나왔다. 법원은 “국가가 기지촌 위안부의 성적 자기결정권 나아가 성으로 표상되는 원고들의 인격 자체를 국가적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 인권존중 의무를 위반했다”며 원고 117명 모두에게 반인권적 불법행위에 대한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서울고법 민사22부(재판장 이범균)는 8일 기지촌 위안부 117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74명에게 각 700만원, 43명에게 각 300만원의 위자료와 그 이자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먼저 ‘군사동맹, 외화획득’을 위해 국가가 기지촌을 운영·관리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복건부 공문 등에 비추어보면 (국가가) 기지촌 위안부들에게 외국군을 상대로 한 ‘친절한 서비스’, 즉 외국군이 안심하고 기지촌 위안부들과 기분 좋게 성매매를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외국군을 상대로 한 성매매를 요구하고, 이를 통하여 외국군들의 ‘사기를 진작·양양’함으로써 국가안보에 필수적인 군사동맹 유지에 기여하는 한편 외화획득과 같은 경제적 목적에 위안부들을 동원하겠다는 의도나 목적으로 기지촌을 운영·관리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국가가 전국 기지촌을 운영·관리하는 과정에서 영업시설 개선, 애국 교육, 위법한 성병 치료 등으로 성매매를 적극적으로 조장·정당화해 인권존중 의무를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국가는 기지촌 내 성매매를 방치·묵인하거나 기지촌의 운영·관리를 위해 최소한도로 개입·관리한 데 그치지 않고 위안부들을 ‘외화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라고 치켜세우는 등의 애국 교육을 통해 기지촌 내 성매매 행위를 능동적·적극적으로 조장·정당화했다”고 밝혔다. 또 재판부는 “국가는 성병 치료를 내세워 ‘토벌(단속)’이나 ‘컨택(성병에 걸린 외국군이 지목하면 수용소로 끌고 감)’ 등으로 기지촌 위안부들을 ‘낙검자수용소’ 같은 강제 수용시설에 격리수용하거나 신체적 부작용이 클 수 있는 페니실린을 무차별적으로 투여해 신체의 자유 등 기본권을 직접적으로 침해했다”며 “위법한 성병치료가 행해진 데에는 국가안보나 외화획득을 위해 위안부들을 활용할 목적에 차질을 우려해 위안부들의 신체의 자유 등 기본권이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등한시한 채 기지촌 내의 성병 근절에만 치중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런 위법한 성병 치료가 “적극적인 성매매 정당화·조장행위와 동전의 양면관계에 있다”고 재판부는 지적했다.
법원에서 ‘국가의 미군 기지촌 성매매 책임’을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주한미군 주둔지 주변에 미군을 상대로 하는 상업지구인 ‘기지촌’은 1950년대부터 만들어졌고 이곳에서 성매매도 벌어졌다. 기지촌 ‘위안부’ 피해자들은 ‘성매매’뿐 아니라 ‘성병 관리’를 내세운 강제 격리수용의 이중 고통에 시달렸다. 이들은 2014년 6월에야 오랜 침묵에 마침표를 찍고 국가의 사과를 받고 책임을 묻기 위해 법원에 국가배상을 청구했다. 그러나 1심인 서울중앙지법 민사22부(재판장 전지원)는 지난해 1월 1977년 8월19일 전염병 예방법 시행규칙 이전에 기지촌 위안부를 강제 격리한 것만 위법하다며 국가 책임을 크게 제한해 원고 120명 중 57명에게만 5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국가 책임을 확대 인정한 2심은 기지촌 위안부 강제 격리로 인한 정신적·육체적 피해도 시기와 관계없이 모두 인정했다. 2심 재판부는 “1977년 8월19일 이후라도 이사 등의 진단 없이 강제 격리 수용한 행위는 여전히 법령에 위배된 것으로 위법하다”며 이와 관련한 원고 모두의 위자료를 인정했다.
2심 재판부는 이 같은 국가의 위법행위를 지적한 뒤 “피고의 담당 공무원 등이 성매매를 정당화·조장함으로써 기지촌 위안부는 기본적 인권인 인격권, 넓게는 인간적 존엄성을 침해당했다”며 “국가기관에 의해 불법 수용돼 부적절한 치료를 받아 성매매 정당화·조장 행위로 인한 정신적 피해에 더해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그런데도 “성매매 정당화·조장, 진단 없는 강제 격리 수용 치료조치는 정당하고 적법한 국가의 행위로 인식되고 오히려 원고들은 성매매 여성으로 취급돼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감내했다”며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재판부는 선고했다. 기지촌 위안부들이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시작했다 해도 재판부는 “국가가 이를 기화로 기지촌 위안부들의 성 내지 인간적 존엄성을 군사동맹의 공고화 또는 외화획득의 수단으로 삼은 이상 그로 인한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고 봐야 한다”고 반박했다.
소송을 대리한 하주희 변호사는 “국가가 사실상 포주 노릇을 했다는 원고들의 증언과 변호사들의 주장을 법원이 받아들였다”며 “내가 잘못한 게 아니고 국가폭력의 피해자였다고 인정된 것이 큰 성과다”라고 말했다. 소송에 참여한 박영자(62)씨는 “3년 7개월을 기다려 오늘 판결을 얻었다. 우리와 함께 착취와 수치를 벗어나지 못한 기지촌 동료, 언니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아픔이 치유되고 정부가 사과하는 그 날까지 계속 싸우겠다”고 말했다.
글·사진 김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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