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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정황 맞아도 ‘지원’ ‘기부’ 두 단어 다르면 위증죄 아니다?

등록 2018-02-08 18:42수정 2018-02-09 09:39

이재용 부회장 2심 판결문 ‘세 가지 오류’
박근혜 “기부 해달라” 요구에 이재용 “적극 지원”
두 단어 토씨 달라 “기억 없다” 증언은 위증 아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항소심 판결문을 뜯어보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곳곳에 등장한다. 법조인들조차 법리를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냐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부분도 있다.

2016년 12월6일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청문회’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안경을 고쳐쓰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2016년 12월6일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청문회’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안경을 고쳐쓰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 맥락 외면한 채 ‘기부’와 ‘지원’은 다르다? = 재판부는 이 부회장이 2016년 12월6일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거짓증언한 혐의를 일부 무죄로 봤다. 당시 이 부회장은 “(2015년 7월25일 단독면담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돈 내라, 기부 좀 해달라는 이야기 안했습니까”라는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그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없다”고 답했다. 재판부는 이 부회장이 면담 뒤 삼성 임원들에게 “대통령으로부터 문화·체육 분야 융성을 위해 적극 지원해달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전달한 점을 인정하면서도, “피고인으로서는 ‘지원’과 ‘기부’의 의미를 구분해 답변했을 가능성도 있다”며 무죄로 판단했다. 여러 정황이 들어맞아도 단어의 토씨 하나라도 틀리면 위증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다. 면담 전날 청와대에서 작성된 재단 관련 말씀자료에 대해서도 재판부가 “실제 박 전 대통령이 문건 내용대로 말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배척했다.

하지만 이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1·2심 재판부가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위증을 인정한 것과도 크게 다른 기준이다. 법원은 조 전 장관이 2016년 10월13일 국정감사에서 “블랙리스트가 존재하느냐”는 의원들의 질문에 “저는 없다고 보고받았다”고 답한 것을 거짓말이라고 봤다. 조 전 장관 쪽은 “언론에 보도된 리스트는 없다는 취지”라고 해명했지만, 재판부는 “질의 내용은 언론에 보도된 명단을 넘어 지원배제 시스템 실존 여부를 포함하는 것이었고, 조 전 장관도 이 시스템이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며 위증이라고 판단했다. 위증죄에선 단편적 구절에 구애되지 않고 전후 맥락을 보라는 것이 대법원 판례인데, 유독 이번 재판부만 특정 단어에 얽매였다는 비판이 나온다.

⊙ 승계작업 부정하다 보니…선후 뒤바뀐 결론 = 1심과 달리 청와대 민정수석실 등에서 작성된 삼성 승계작업 관련 보고서를 부정청탁 근거로 인정하지 않은 논리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2014년 7~9월 작성된 이 보고서에는 ‘이재용 체제에 대한 간접적·우회적 지지 표명’, ‘삼성의 당면과제는 이재용 체제의 안착’ 등 승계작업을 직접 가리키는 문구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재판부는 “작성자들이 삼성 승계와 관련된 사정을 추론해 작성한 의견서에 불과할 뿐, 박 전 대통령이 승계작업에 대해 인식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했다. 애초부터 승계작업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다 보니, 재판부가 청와대 문서를 ‘추론’으로 깎아내린 뒤 ‘추론에 불과하니 인식도 없었다’는 식의 선후가 뒤바뀐 결론을 내린 것이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지난해 1월 서울 강남구 대치동 특검사무실로 소환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지난해 1월 서울 강남구 대치동 특검사무실로 소환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 안종범 업무수첩 배제에 법조인들도 “해독 필요” =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업무수첩을 증거로 인정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법조인들 사이에서도 “해독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온다. 재판부는 “이 수첩이 박 전 대통령이 지시한 내용,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 사이 있었던 대화 내용 등을 입증하기 위한 증거라면 이는 요증사실과의 관계에 비춰 볼 때 원진술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 내용의 진실성이 문제 되는 경우에 해당하고, 그 기재 내용의 진실성과 관계없는 간접사실에 대한 정황증거라고 볼 수는 없다”고 했다. 이어 “(1심 판단대로라면) 요증사실인 그 기재 내용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한 직접 증거로는 사용될 수 없는 전문증거가 그 기재의 존재를 인정하는 증거로 사용될 수 있게 됨으로써 우회적으로 그 기재 내용의 진실성을 인정하는 증거로 사용되는 결과가 된다. 이는 전문증거의 증거능력을 배제하고자 하는 전문법칙의 취지를 잠탈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므로 허용될 수 없다”고 했다.

안 전 수석이 이 부회장과 단독면담 직후 박 전 대통령의 지시 사항이나 면담 내용을 받아적었다고 해도, 실제 수첩 내용대로 대화가 오갔는지 확인할 수 없는 이상 수첩을 대화나 지시 내용에 대한 간접증거로도 활용할 수 없다는 논리다. 한 판사는 이를 두고 “직접 발언한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이 자신들의 대화나 지시 내용을 법정에서 확인해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이런 경우 업무수첩 등을 증거로 활용하는 기존 판례와 배치된다”고 지적했다.

최순실씨가 지난해 5월23일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재판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최순실씨가 지난해 5월23일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재판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같은 사실 다른 용도로 써가며 이재용 두둔 = 재판부가 같은 사실을 서로 다른 용도로 활용한 부분도 눈에 띈다. 재판부는 삼성 쪽이 정유라씨 승마지원을 위해 최씨의 코어스포츠와 용역계약을 맺을 때 “(근거) 자료가 진실한지 검증 없이 내부품의서를 작성했다”는 삼성 직원의 증언을 언급하며, “최씨 요구대로 용역대금을 보내면서도 평가나 검증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형량 판단에서 이는 이 부회장에게 유리한 내용으로 둔갑했다. 재판부는 “승마지원금은 형식적으로나마 사회공헌활동의 일환으로서 내부 품의과정을 거쳐 지출됐다”고 했다. 또 “범행 방법을 보더라도, 재벌 총수 일가의 사익 추구를 위해 그룹 전체나 소속 계열사의 회계를 조작해 조성한 비자금으로 뇌물을 준 게 아니다”고 거들기도 했다. 뇌물로 사용돼도 형식적인 모양새만 갖추면 선처받을 수 있다고 읽힐 우려가 있다.

이 부회장에게 불리한 부분을 재판부가 나서 두둔하는 대목도 있다. 재판부는 “(뇌물 유죄) 36억여원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면서도 “기소금액 298억여원에 비교하면 공소사실이 상당 부분 안 받아들여졌으니 특검이 규정하는 사건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다”고 했다. 이어 “이 부회장 등에게 용역계약은 정씨 개인에 대한 지원을 가장하고 은폐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면서도 “계획대로 진행됐다면 다른 승마선수도 지원받았을 텐데 최씨 반대로 무산됐다”고 했다. 이 부회장이 2015년 7월 단독면담 이후 정씨 승마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선 부분에 이르면 재판부가 “박 전 대통령의 질책과 요구의 강도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며 이 부회장의 심경까지 대변하기도 한다. 고법의 한 판사는 “판사가 판결문에 피고인 심경을 대변하는 내용을 넣는 것은 적절치 못할 뿐 아니라 그만큼 본인 판단에 자신이 없다는 뜻으로 비칠 수 있다”고 했다.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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