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1991년 3월26일, 대구 성서초등학생 5명
와룡산에 도롱뇽 잡으러 갔다 실종돼
1991년 3월26일, 대구 성서초등학생 5명
와룡산에 도롱뇽 잡으러 갔다 실종돼
그날은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중단됐던 지방선거가 30년 만에 부활한 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로부터 27년 전인 1991년 3월26일은 지방선거로 인한 임시공휴일이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아침 일찍부터 투표를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등교하지 않았던 동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평소 놀이터와 다름없었던 동네 뒷산에 올랐습니다.
당시 대구 성서초등학교에 다니던 우철원 군(당시 13살, 6학년, 1979년생)을 비롯한 조호연(당시 12살, 5학년, 1980년생), 김영규(당시 11살, 4학년, 1981년생), 박찬인(당시 10살, 3학년, 1982년생), 김종식(당시 9살, 3학년, 1983년생) 등 5명의 아이들은 대구시 달서구 이곡동 와룡산에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을 나섰습니다. 이후 이들은 와룡산에 오르기 전 마을 주민에 두어 번 목격됐습니다. 이것이 아이들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국내 단일 실종사건으로는 최대 수색 규모인 연인원 32만 명의 인력이 동원돼 아이들의 행방을 찾으려 애썼습니다. 아울러 당시 CF는 물론이고 과자 포장지와 공중전화 카드 등에도 실종 전단이 실릴 만큼 전 국민적인 관심사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흔적을 찾는 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이들은 실종된 지 11년이 지난 2002년 9월26일 실종된 와룡산에서 유골로 발견되었습니다. 이어진 법의학 부검 결과 이들은 타살로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범인과 사망 원인 등 사건을 둘러싼 여러 의문점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2006년 3월25일로 공소시효도 만료되었습니다.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은 경찰 수사 과정이 미흡했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더했습니다. 그 수사과정의 기록들을 다시 짚었습니다.
미흡한 초동수사
-모험심에 의한 가출?
1991년 3월 26일 아이들이 실종된 이후 벌인 경찰의 초동 수사에 유독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아이들이 모험심에 집단 가출을 했다거나 성급하게 납치로 결론 내려 수사를 집중해야 할 초기에 수사력을 모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경찰은 아이들의 실종 40일째인 5월4일에는 “서울에 깡패와 함께있다”는 장난전화 한 통에 형사대를 서울로 보내 집중 수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근거로 부산과 대구 등 경남지역의 폭력배와 불량배에 대한 단속과 검문검색을 강화한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5개월이 지난 그해 10월16일 당시 검찰총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실종 어린이들을 돌려보내 주면 최대한 관용을 베풀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해 연말이 되어서도 아이들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경찰은 여전히 납치와 단순 가출로 보고 수사를 진행했습니다.
실종 아이들의 가족은 애가 탈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종식 군의 아버지는 당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5명의 아이들이 한꺼번에 없어졌는데도 경찰은 단순 가출로만 여기고 1년이 다 돼가도 생사조차 확인해주지 못 하고 있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실제 경찰은 사건 발생 반년이 지나서야 경찰청 차원의 수사본부를 마련해 늑장 대처라는 비판이 일었습니다.
-한센병 환자촌 수색
사건은 해를 넘겼지만 진척된 것이 없었습니다. 사건 발생 1년 6개월이 지난 1992년 8월21일 경찰은 실종 어린이들이 한센병 환자 재활촌에 암매장돼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며 현장 확인 수색에 나섰습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 한센병 환자들이 아이들을 유괴해서 죽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허위제보 전화로 밝혀졌고, 이를 보도한 지방의 한 언론사가 해당 마을의 주민들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소동은 일단락됐습니다.
-실종자 김종식 군 아버지 ‘토막살인’ 음모론
경찰 수사는 시름에 빠진 실종자 가족에까지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겼습니다. 1996년 1월에는 실종자 김종식 군의 아버지를 용의자로 몰아 그의 집 마당과 화장실, 심지어 구들장까지 파내어 물의를 일으킨 것입니다.
경찰은 자칭 프로파일러라는 김아무개 씨의 “김종식 군 아버지가 아이들을 살해해 토막 내 유기했다”는 일방적 주장만 믿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이었습니다. 결국 집안 곳곳을 수색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후 김종식 군의 아버지는 과도한 음주 탓에 암에 걸려 2001년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11년 만에 유골 발견
실종된 5명 아이들은 2002년 9월 26일 와룡산 중턱에서 등산객에 의해 유골로 발견됐습니다.
아이들이 실종된 지 11년이 지난 뒤였고, 실종된 장소에서 유골이 발견됐다는 사실에 국민들을 충격에 빠졌습니다. 사건 당시 32만명이나 동원되었던 수색이 부실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유골의 발견으로 자칫 미궁에 빠질 뻔했던 사건은 다시 진척되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경찰이 유골 발견 당시 법의학자 등 전문가의 도움 없이 현장을 파헤쳐 되레 진상 규명을 어렵게 했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유족들은 주검과 옷가지들이 한 곳에 엉켜 붙은 채 묻혀 있었던 상황이라 현장 보존이 중요한데도 경찰이 곡괭이와 삽으로 현장을 훼손했다고 반발했습니다.
게다가 경찰은 유골을 찾은 당일날 오후 바로 “탈진과 저체온증에 의한 사고사”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사건 현장에 탄두와 총알이 함께 발견됐고, 갈라진 두개골은 티셔츠에 싸여있는 등 타살의 정황이 비교적 뚜렷했는데도 말입니다. 이후 부검을 맡았던 법의학 팀은 “아이들은 예리한 흉기로 타살됐다”며 결론을 내렸습니다.
유골 상태로 보는 의혹 5가지와 경찰 설명
유골이 발견됐지만 범인이 누구인지 아이들의 사망원인이 무엇인지 등이 밝혀지지 않자 지금도 여러 의문점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조난
앞서 언급했듯이 경찰은 유골이 발견된 당일부터 아이들의 사망 원인은 ‘조난에 의한 탈진과 저체온증’이라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실종 당시 아이들은 근처 지리에 매우 익숙했으며, 높은 산이 아닌 만큼 초등학교 3~6학년생 5명이 동시에 길을 잃어버릴 수 있냐는 의문점은 지울 수 없습니다.
-강제로 묶여진 매듭
마지막에 발견된 유골의 윗도리가 완전히 뒤집어진 채로 팔 부분이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묶여있었습니다. 경찰은 이에 대해 “팔은 빠진 채 옷만 느슨히 묶여 있었고, 이는 착란상태에서 소매를 스스로 묶을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단단히 매듭까지 지어진 채 발견된 바지는 경찰의 설명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분명 존재합니다. 경찰의 설명대로 “착란 상태에서 묶었다”라면 굳이 매듭까지 지을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유탄에 의한 사망 가능성
유골 발견 현장에서는 탄두와 실탄 등이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유탄에 맞아 사망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실제 지난 1994년 말까지 유골 발견 현장에서 직선거리로 250m 떨어진 곳에 군 사격장이 있었습니다. 경찰은 “아이들이 실종된 날은 지방선거일이라 임시 공휴일이었기 때문에 사격훈련은 없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군에서 장부상 탄환 수량을 맞추기 위해 남은 탄환을 사격장에 임의 발사해 소진하는 경우가 있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게다가 유골이 발견된 직후인 9월 30일, 당시 구두닦이 한아무개 씨는 “지난 7월 30일 35살의 남자 1명이 구두를 닦으면서 ‘군 생활 당시 어린이 5명을 총으로 쏴 죽였다’는 말을 했다”며 구체적인 내용을 경찰에 제보했습니다. 이런 내용이 알려지자,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범인의 암매장 증거
발견될 당시 유골은 30~40㎝ 크기의 네모난 돌에 눌려 있었는데, 이를 두고 범인이 아이들을 죽이고 암매장했다는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이에 대해 경찰은 “돌을 지팡이로 밀어도 흔들릴 정도였으므로 주위에서 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며 암매장 의혹을 일축했습니다.
-두개골에 생긴 구멍
아이들 가운데 한 명의 두개골에서는 왼쪽 귀 위에 100원짜리 동전만 한 구멍이, 오른쪽 귀 옆에 500원짜리 동전보다 조금 큰 구멍이 발견됐습니다. 또 다른 두개골 목 왼쪽 위에서는 가로 4㎝, 세로 5㎝ 정도로 찢어져 있어 총상이나 외부 충격에 의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습니다. 이에 경찰은 “부패과정에서 그랬는지 외부 충격인지 알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결국 사건은 수많은 의혹만 남긴 채 2006년 3월 25일로 공소시효가 만료됐습니다. 실종 아이들의 부모님들은 범인의 몽타주나 아이들의 사망 원인조차도 모른 채 이들을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당시 대구 성서초등학교에 다니던 우철원 군(당시 13살, 6학년, 1979년생)을 비롯한 조호연(당시 12살, 5학년, 1980년생), 김종식(당시 9살, 3학년, 1983년생), 박찬인(당시 10살, 3학년, 1982년생), 김영규(당시 11살, 4학년, 1981년생) 등 5명의 아이들. <한겨레> 자료 사진.
<한겨레> 1991년 5월 3일 치(왼쪽), <한겨레>1992년 1월 31일 치.
대구 달서구 와룡산 자락에서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 감식이 진행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한겨레> 1991년 5월 5일 치.
실종된 개구리소년 가족과 개구리소년찾기 후원회 회원들이 서울 종로구 종로5가 동대문시장 입구에서 소년들의 얼굴사진이 들어있는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개구리소년 암매장 거짓 제보에 생계 끊기고 가슴에 피멍 들었던 한센인들. 1992년 문제의 사건을 보도한 신문기사들. <한겨레> 자료 사진.
<한겨레> 1992년 8월 22일 치.
<한겨레> 1996년 1월 13일 치.
실종된 ‘개구리 소년’들의 유골이 발견된 대구 와룡산 현장. <한겨레> 자료 사진.
대구 성서초등학생들의 유해에서 큰 의문점 가운데 하나인 김영규 군의 윗도리와 체육복 바지의 매듭(사진)은 어른이 묶은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한겨레> 자료 사진.
와룡산 현장에서 경찰이 탄피가 붙은 총알 1개를 찾아내 취재진에게 공개했다. 경찰은 소년들이 유탄에 맞았을 가능성은 없다고 설명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성서초등학생들의 타살 추정에 중요한 근거로 제시된, 소년들의 두개골에 있는 외상. 약 1.4~2.0mm 정도의 크기인 이 외상들은 사각형의 예리한 모서리를 가진 물체에 의해 찍힌 흔적이 역력하다. <경북대 법의학팀> 제공.
‘대구 성서초등생 실종·사망사건’ 공소시효 만료를 이틀 앞둔 2006년 3월 23일, 실종 초등생 5명의 유족들이 달서구 용산동 와룡산 유골 발굴 현장에서 마지막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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