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철 대학가에서 오프라인 ‘미투’ 지지 시위가 확산하고 있다. 지난 29일 저녁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이시시(ECC) 계단에 학생 2800여명이 모여 ‘당신과 우리를 위한 행진’이라는 제목의 집회를 열고 있다. 학생들은 성폭력 가해 교수의 파면을 요구하며 미온적인 학교 당국의 대처를 비판했다. 황금비 기자 withbee@hani.co.kr
“2차 피해 방지하라!” “가해 교수 파면하라!”
29일 저녁 7시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조형예술대학·음악대학 건물 앞은 학생들이 쏟아낸 ‘거대한 외침’으로 포위되어 있었다. 페미니즘을 상징하는 보라색 의상을 맞춰 입은 이화여대 학생 2800여명의 눈빛은 변화에 대한 갈망으로 반짝이는 듯했다. 학생들은 “학교 차원에서 성폭력 사실을 고발한 피해 학생을 보호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지난 19일과 22일 각각 조형예술대학 ㄱ교수와 음악대학 관현악과 ㅅ교수에게 상습적으로 성폭력을 당했다는 ‘#미투’ 폭로가 잇따르자 시위에 나섰다.
서울 성신여대와 덕성여대에서도 성폭력 가해자로 고발된 교수실 앞에 ‘포스트잇 대자보’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학생들은 “직위해제 부족하다”, “증언으로 충분하다” 등의 문구가 적인 손팻말과 포스트잇으로 교수실을 포위했다. 학생들의 ‘미투’ 운동은 대학의 담을 넘어서고 있다. 국민대, 서울대 등 8개 대학 학생들이 대학 내 반성폭력과 평등문화를 위해 모여 활동하고 있는 ‘펭귄프로젝트’는 30일 저녁 서울 동숭동 마로니에공원에서 ‘대학 내 미투’에 연대하는 ‘함께 말하면 비로소 바뀐다’ 집회를 열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산발적 폭로 형태로 진행돼온 미투 흐름이 개강을 맞은 대학생들의 집단적 연대 행동과 결합하며 대중운동으로 번져가는 모양새다. 행진·집회 등 대학 내 오프라인 공간의 집단행동이 이어지면서, 매년 봄 대학 곳곳에서 벌어지던 등록금 투쟁 대신 올해에는 ‘미투’가 대학가 핵심 의제로 자리잡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학생들은 미투 폭로에 대한 대학의 무딘 대응과 사회 일각의 차가운 시선 탓에 집단행동을 통해 피해자와 연대할 수밖에 없다며 절박함을 강조했다. 항의 포스트잇 붙이기에 동참한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박하영(23)씨는 “학교에서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않는 것 같다고 느껴왔고, 행동을 해 바꿔야겠다는 얘기를 친구들과 했다”고 말했다. 29일 저녁 이화여대의 ‘당신과 우리를 위한 행진’을 이끈 차안나 총학생회장은 “가해 교수는 사임이 아니라 이화여대 교수로서 어떠한 혜택도 받지 못하도록 파면해야 한다”며 학교의 적극적 대응을 촉구했다. 이 학교 인문대 김아무개(21)씨는 “지금은 조형대랑 음대에서 문제가 터졌지만 다른 단과대, 다른 대학들도 마찬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이런 문제가 되풀이돼선 안 된다고 생각해서 친구들과 같이 오게 됐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미투 운동이 한국에서 오프라인 대중운동으로 확산하는 흐름에 대해 ‘촛불혁명’을 이뤄낸 시민사회의 자신감이 그간 수면 아래서 성숙해온 ‘젠더 민주주의’ 의식과 결합해 한국적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진옥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는 “이제는 젊은층을 중심으로 반복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강력하고 조직된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잡은 것 같다. 특히 대통령 탄핵으로 연결된 학내 비리에 저항한 역사가 있는 학교의 학생들이 자신감을 갖고 싸우는 듯하다. 미투가 미국에서 수입된 채 머무른 게 아니라 우리 안에서 진화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평가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과거보다 훨씬 발전한 요즘 학생들의 성폭력과 젠더 문제에 대한 의식이 실천적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수십년간 이어져온 대학 내 성폭력적 문화와 구조를 바꾸려는 ‘미투’ 목소리에 대학이 한층 적극적으로 화답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윤김지영 교수는 “학생을 보호하는 주체가 대학 당국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대학이 나서서 성폭력 교수를 중징계하고, 성평등한 문화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 노선이 활동가는 “각 학교 성희롱·성폭력 심의위원회에 피해자나 피해자 상담가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도록 공식적인 의결권이 주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황금비 최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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