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23일 구속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승용차를 타고 서울 동부구치소(송파구)에 도착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단
눅눅한 비음이 섞인 특유의 쉰 목소리가 준비한 글을 읽어내려갔다.
“적폐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검찰 수사에 대하여 많은 국민이 보수를 괴멸시키기 위한 정치공작이자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정치 보복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지난 1월17일, 기자회견을 자청한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검찰이 “짜맞추기식 수사”를 하고 있다고 매도했다. 열두 번도 더 고쳤을 회견문에서 가장 원색적인 표현으로 검찰을 비난했던 그가 최근 전혀 뜻밖의 선택을 했다. 23일 열릴 첫 공판을 앞두고 검찰 쪽 증거에 전부 동의한다는 의견서를 법원에 제출한 것이다. 전직 대통령이 여러 명 법정에 섰지만, 이런 사례는 없었다. 검찰은 큰 짐 덜었다는 표정이다.
이 전 대통령이 받고 있는 혐의는 녹록지 않다. 349억원 횡령(다스 비자금 조성)에 31억원 조세포탈, 110억원 뇌물 등 죄명만 7가지에다 혐의사실은 16개나 된다. 모두 유죄가 인정된다면 어림잡아도 10년 이상의 징역형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일흔일곱 나이에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유리해 보이는 ‘증거 부동의, 증인 심문’ 카드를 포기했다니 화제가 될 수밖에 없다.
변호인들은 전직 대통령의 ‘금도’라는 말로 설명했다. 부동의하는 것이 맞다고 의견을 냈으나 이 전 대통령이 반대했다는 사연도 공개했다. 검찰에서 불리한 진술을 한 부하나 측근, 예를 들면 ‘평생 집사’ 김백준씨 같은 이들과 법정에서 얼굴 붉히는 장면을 피하려고 불리한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일견 대인의 풍모처럼 보이지만, 그럴듯한 포장일 뿐이다.
‘조기 사면’을 기대해서라는 분석이 있다. 검찰 쪽 증거에 피고인이 동의하면 증인심문이 생략돼 재판 기간이 줄어든다. 이 전 대통령 스스로 형을 일찍 확정시켜 특별사면을 기대하는 것 아니냐는 것인데, 사면권을 가진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을 보면 가능성은 크지 않을 것 같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후보 시절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되자마자 사면이니 용서니 말이 나온다는 건 참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의 사면권은 국민의 뜻에 어긋나게 행사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피고인이 증거에 부동의하면 법원은 검찰 수사 때 조사받은 사람들을 법정에 증인으로 부른다. 검찰에서 한 진술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서 검사와 변호인, 때때로 재판장이 돌아가며 증인을 심문한다. 이 과정에서 증인이 위증죄로 처벌받을 각오를 하고 검찰 진술을 번복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되레 조서에 활자로 찍혀 있던 진술이 증인의 육성으로 조용한 법정에 울려 퍼진다. 법관이 어떤 인상(심증)을 받게 될지는 자명하다. 수사 과정에서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던 한마디 한마디가 언론을 통해 ‘중계’되면서 부정적 여론은 더 강해질 수밖에 없다. 이 전 대통령으로서는 득보다 실이 크다.
증인심문을 배제하면 증인의 ‘목소리’가 사라진다. 대신 검찰이 제출한 수사기록을 놓고 법률 전문가들끼리 공방이 벌어진다. 변호인은 검찰 쪽 증거의 증명력을 다투면서 취약점을 공략할 기회를 노릴 수 있다. 이 전 대통령의 변호인이 “(증거 동의는) 죄를 인정한다는 취지가 아니다. 객관적인 자료를 가지고 (검찰 쪽 증거를) 반박할 계획”이라고 한 것이 그런 맥락이다. 유불리를 냉정하게 따져 본 계산의 결과이고, 나름의 재판 전략인 셈이다.
검찰이 진행 중인 추가 수사도 주요 변수로 고려했음 직하다. 서울중앙지검은 이 전 대통령을 기소한 뒤에도 그의 집권 시기에 벌어진 여러 댓글 공작을 계속 수사하고 있다. 수사의 종착점은 이 전 대통령일 공산이 크다. 그의 입장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는 이번 재판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추가 기소가 이뤄지는 경우다. 반대로 검찰의 추가 기소 이전에 1심 판결이 끝나야 여러모로 유리하다. 쟁점 분산 효과를 기대할 수 있어서다.
“그 양반, 평생 장사하신 분이잖아요.” 이 전 대통령의 증거 동의 사실이 알려진 날, 어느 검찰 간부가 툭 던진 말이다. 탁월한 장사 감각으로 샐러리맨의 성공신화를 썼다는 그가 밤잠과 맞바꿨을 승부수의 성패는 재판에서 판가름날 것이다. 첫 공판이 나흘 앞으로 다가왔다.
강희철 사회에디터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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