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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여성들이 실리콘과 스티커를 가지고 다니는 이유

등록 2018-05-27 09:42수정 2018-05-28 11:19

[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서울지방경찰청에 압수된 불법촬영 장비들. 벽시계의 숫자 사이, 지갑의 지퍼 아래, 손전등의 램프 옆과 녹음기의 클립 등에 카메라 렌즈가 교묘하게 숨겨져 있어 불법촬영 사실을 알아채기 쉽지 않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서울지방경찰청에 압수된 불법촬영 장비들. 벽시계의 숫자 사이, 지갑의 지퍼 아래, 손전등의 램프 옆과 녹음기의 클립 등에 카메라 렌즈가 교묘하게 숨겨져 있어 불법촬영 사실을 알아채기 쉽지 않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집 창문 너머로 누군가 불법촬영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매일 고민한다. 나 같은 자취생들은 새로 이사 가는 집에 카메라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니 스위치나 전구 등을 챙겨봐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관음적 시선에 노출된 일상은 항상 긴장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이런 걱정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건 엄청나게 큰 폭력, 위협을 받는 거라고 생각한다.”(지난 16일 여성가족부 주최 ‘여성폭력 방지 정책간담회’에 참석한 한 대학생)

안녕하세요. 한달 전까지만 해도 토요판 지면을 통해 인사드렸던 <한겨레> 박현정입니다. 새로 담당하게 된 출입처 중 하나가 여성가족부인데요. 최근, 한 선배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여성들이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

지난 19일 오후,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에서 열린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에 대한 물음이었습니다. 이날 시위엔 주최 쪽이 예상한 참가자 수의 여섯 배인 여성 1만2천여명이 참여해 “남 피해자 쾌속 수사, 여 피해자 수사 거부”, “동일범죄 동일처벌” 등의 구호를 외쳤지요.

여성들의 집단적 분노를 유발한 발화점은, 홍익대학교 미대 수업에 참여한 남성 모델 불법촬영·유포 사건이었습니다. 경찰은 수사 착수 엿새 뒤인 10일 피의자를 긴급체포합니다. 수사가 빠르게 진척되면서 ‘여성이 피해자인 대다수의 불법촬영·유포 사건도 이렇게 적극적으로 수사하라’는 목소리가 터져나왔습니다. 10일 혜화역 시위를 주최한 인터넷 포털 다음카페(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가 개설됐고, 하루 뒤인 11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엔 “여성도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성별 관계없는 국가의 보호를 요청합니다”라는 청원 글이 올라와 사흘 만에 약 32만명의 동의를 얻었지요.

취재 과정에서 만난 젊은 여성들은, 누구나 불법촬영 피해를 겪을지 모른다는 불안이 있기 때문에 혜화역 시위 취지에 공감하고 함께 분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느끼는 불법촬영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했습니다. 카메라가 숨겨져 있을지 모를 학교나 직장 화장실, 탈의실 벽에 난 구멍을 막기 위해 휴대용 실리콘이나 스티커를 가지고 다니는 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2017년 서울시가 발간한 <사이버성폭력 피해자 지원을 위한 안내서>를 보면 불법촬영 등 사이버성폭력은 다른 범죄와 달리 가해자의 연령, 소속, 사회적 지위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익명 동조자들이 많기 때문에 가해자들이 느끼는 죄책감도 적은 편이고요. 반면 피해자에겐 극심한 정신적 고통이 남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찍힌 피해 촬영물을 지우기 위해 경제적 부담까지 안는 경우도 있고요. 불법촬영 피해는 모르는 사람들로부터만 당하는 게 아닙니다. 지난해 경기도가족여성연구원이 낸 자료를 보면 2012~2016년 불법촬영 범죄 11만6201건 중 연인, 주변 지인, 친구, 직장동료 등 피해자가 아는 사람이 가해자인 경우는 2259건(13.9%)이었습니다.

주로 여성을 불법촬영하고 그 촬영물을 소비·유포하는 사이버성폭력은 지난 10년 동안 줄곧 증가 추세에 있었습니다. 전문가들은 국가 권력이나 언론이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여러 폭력들을 심각한 범죄로 다루지 않고 방치해왔기에 결국 여성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어 문제를 해결하려는 상황이 이어지는 것이라고 짚었습니다.

19일 혜화역 시위는 생물학적 여성만 참여가 가능했습니다. 이러한 시위 방식이나, 홍대 모델 불법촬영 수사가 편파적이라는 구호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시선도 있는데요. 20년간 인권운동을 해온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는 혜화역 시위에 대해 “예상치 못하게 불특정 다수가 분노로 발화하는, 기존 운동단체를 배제하고 자신을 억누른 현실을 직접 이야기하는 민주주의 모습”이라며 “기존 운동권이나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데,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옳고 그름을 예단해버리면 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지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듣기 어려워진다”고 조언했습니다.

박현정 사회1에디터석 사회정책팀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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