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살림의원 추혜인 원장
사탕수수에서 추출한 건강기능식품이 있다. 혈관 청소부라고 불리는 ‘폴리코사놀’은 쿠바산 사탕수수에서 추출한 고분자 알코올 물질로, 매일 꾸준히 섭취하면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가 개선된다고 알려져서 국내에서도 여러 회사 제품이 시판되고 있다. 그런데 폴리코사놀의 임상적 효용에 대해서는 다소 의견이 엇갈린다. 쿠바에서 폴리코사놀이 심혈관계 질환을 국가적으로 줄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보고가 있지만, 다른 나라에서 진행된 연구에서는 폴리코사놀의 약효가 미미하다는 보고도 있다. 왜 같은 약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엇갈리는 것일까?
서울 은평구 살림의원 추혜인(41) 원장은 이 차이를 쿠바의 ‘전국민 주치의 제도’에서 찾는다. 쿠바에서 폴리코사놀이 큰 효과를 낼 수 있었던 건, 주치의들이 자기가 담당한 환자를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심혈관계 질환 예방을 위한 건강교육과 함께 약을 나눠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쿠바에서는 전 국민이 지역별로 주치의를 가진다. 의사 한 사람이 대략 1천여명의 주민을 담당하는데, 주민의 건강 상태와 생활습관, 가족의 병력(病歷)까지 꿰뚫고 있어서 개개인의 특성에 맞는 진료와 처방을 할 수 있다.
나보다 내 몸을 더 잘 알고 내 삶과 건강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주치의를 두는 건 가능한 일일까? 환자가 돈으로 환산되고, 의사가 ‘병원 쇼핑’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주치의 제도는 정착하기 어렵다. 의사와 환자의 새로운 관계 맺기는 어떻게 시작되어야 할까? 살림의원 추혜인 원장을 찾아간 것은 그가 일반 개원의와 달리 2400여명의 은평구 주민 조합원을 위해 일하는 ‘동네 주치의’라는 점이 일차적 이유였지만, 살림의원이 ‘여성주의 병원’을 표방한다는 소개 글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2012년 설립된 살림의원은 ‘사람 중심의 의료와 복지’를 지향하는 비영리 의료협동조합으로 살림치과, 운동센터와 함께 통합적인 건강관리 서비스를 제공한다. 살림의원은 우리 사회 대안적 의료체계의 모델이 될 수 있을까? ‘여성주의 병원’이란 어떤 의미이고 어떻게 운영되는 걸까? 서울대 의대에서 가정의학과 전문의 과정을 마친 여성 의사가 이런 의료공동체 운동에 뛰어들게 된 동기도 궁금했다. 지난달 21일, 서울 은평구 구산동에 있는 살림의원에서 그를 만났다.
여성주의 병원, 모두를 위한 공동체
소박한 시골 보건소 같을 거란 예상은 빗나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바로 병원 로비였다. 살림의원과 살림치과, 운동센터 ‘다짐’은 110평 한 층을 통째로 쓰고 있었다. 입구에는 ‘살림 의료복지 사회적협동조합’에 대한 안내문구와 함께 조합원 가입을 권유하는 전단지와 안내문이 비치되어 있고, 이달의 행사를 알리는 벽보에는 건강학교 강좌와 동별 모임, 건강을 위한 소모임 일정이 빼곡히 표시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병원이 크네요.
“2012년에 처음 개원할 땐 22평에서 시작했어요. 2016년 7월에 따로 떨어져 있던 운동센터를 한 공간으로 합치고 치과를 개원하면서 좀 더 넓은 공간을 찾아 이리 옮겼죠. 지난해부터는 이 위층도 추가로 임대했어요. 주민모임이나 건강강좌, 조합원 행사를 여는 공간으로 쓰고 있어요.”
―그럼 110평짜리 두 층이니까 220평? 22평으로 시작해서 ‘사세’가 열 배나 ‘확장’되었네요?
“아이, 그런 건 아니고요….(웃음) 잘만 하면 365일 진료도 가능하지 않을까, 저도 잠시 야심찬 꿈을 꾸었는데. 그게 쉽지가 않더라고요.”
의료협동조합 전체에 30명 정도가 근무하는데, 살림의원에 근무하던 의사 4명 중 2명이 이달 말로 그만두게 되어 진료실을 줄여야 할 형편이라며 그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원장님은 처음 개원 준비 때부터 같이하신 건가요?
“네. 2009년에 준비모임 할 때부터 같이했죠. 3년간 준비하면서 2012년 2월 살림의료협동조합 창립총회를 열었는데 그때 조합원 수가 348명이었어요.”
―숫자를 정확히 기억하시네요.
“창립 때 숫자는 기억해요.(웃음) 창립총회 6개월 후에 살림의원 개원할 때는 700여명으로 늘었고 요즘은 2400명쯤 될 거예요.”
―조합원이 되려면 은평구 주민이어야 하나요?
“대다수가 은평구 주민이긴 하지만, 꼭 그래야만 조합원이 될 수 있는 건 아녜요. 지역 구분 없이 취지에 공감하고 가입출자금 5만원 이상 납입하면 조합원이 되죠.”
―조합원이 되면 어떤 혜택이 있죠? 진료비를 깎아주나요?
“건강보험 적용 항목은 저희가 함부로 할인을 해드릴 수 없어요. 할인하면 불법이에요. 비보험 항목에서 수면내시경이라든가 골밀도 검사, 예방접종이나 영양수액 같은 것들은 조합원 할인이 들어가죠. 운동수업 같은 건 할인폭이 좀 더 크고요. 근데 조합에 가입하시는 분들은 이런 할인혜택보다는 좀 더 관계적인 측면에 관심을 두시는 것 같아요.”
사람 중심의 의료와 복지를 지향
2012년 비영리의료협동조합 설립
‘여성주의 병원’도 더불어 표방
치과, 운동센터 등 통합건강관리
대안 의료체계 모델로 사회 관심 ―관계적인 측면이요? “의사와 환자의 관계요. 의사가 좀 더 밀착해서 관심을 가지고 케어할 거라고 기대하고 가입하시는 거죠.” ―여성주의 건강관을 바탕으로 하는 의료공동체를 표방했는데, 페미니스트들이 여성들만 전문으로 진료하는 곳인가요? “그건 물론 아니고요.(웃음) 남성 조합원들도 있고 남성을 위한 탈모클리닉도 있는걸요.” ―그럼 ‘여성주의 병원’이라는 게 뭡니까? “전 여성주의가 사회적 약자의 시선에서 세상을 재해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런 시각에서 보다 평등한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 실천하는 거’라고요. ‘남자들이 권력을 갖고 있으니 여자들도 권력을 갖자, 남자를 이겨보자’ 이런 게 아니고요. 누가 이기고 지는 개념이 없는, 그런 사회를 만들자는 거죠.” ―그런 여성주의가 병원 운영에 어떻게 반영되죠? “환자와 의사가 평등하게, 서로를 존중하고 신뢰하면서, 같이 참여하고 책임을 나누는 거죠. 단순한 소비자로서의 환자나, 병원 소유자나 의료서비스 판매자로서의 의사가 아니라, ‘서로 돌보고 돌봄을 받는 마을공동체를 만들자’는 뜻을 공유하고 협력하면서 의사결정 과정에 같이 참여하는 거예요.” 살림의료협동조합에서는 모든 조합원이 출자액이나 가입 시기에 관계없이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조합원의 투표로 선출된 대의원 110명이 총회를 열어 이사와 임원을 선출하고 사업계획을 승인한다. 병원에서 수익이 나도 배당은 하지 않으며 환자 수가 많아졌다고 의사에게 따로 인센티브를 주지도 않는다. 살림의료협동조합의 기본 사명은 ‘민간병원을 대신하는 공동소유의 병원’이 아니라 ‘민간병원이 할 수 없는 건강한 지역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살림의원이 다문화여성을 위해 그들의 언어로 만들어진 문진표를 쓰거나 문자서비스를 보내는 것, 트랜스젠더 환자들에게 따뜻한 병원이 되도록 ‘인권진료’를 하기로 결정한 것은 모두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진 결정이다. 살림의원 로비 벽면에는 ‘서로 돌보고 돌봄 받는 좋은 이웃이 되자’는 살림조합원의 약속이 붙어 있다. 살림의원에 없는 것과 있는 것 ―개원 초기 기사를 보니 ‘살림의원은 3분 진료를 하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아, (가슴에 손을 얹으며) 3분 진료는 정말 안 하고 싶은데, 요즘은 환자분들이 너무 많이 오셔서 대기 시간이 한 시간, 두 시간 길어지니까 예전보다는 여유가 없어진 것 같아요. 대기환자 생각하면 아무래도 서두르게 되죠.” ―저도 의사 만나서 3분 정도 짧게 얘기하고 끝내는 건 불만이지만, 제 앞의 환자가 의사 붙들고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는데 의사가 가만히 들어주고 있으면 슬며시 짜증이 나기도 해요.(웃음) “하하, 그렇죠. 그래도 뒤에 대기하는 환자가 없으면 전 길게 다 들으려고 노력합니다. 환자가 자꾸 반복적으로 말하는 건 환자 기분이 불안해서 그러는 경우가 많고요, 간혹 인지 기능상의 문제가 있어서 그럴 수도 있거든요. 가만히 들어드리는 게 필요하죠. 개원 초엔 환자가 많지 않아서 한 시간씩 온갖 얘기 다 하기도 했는데, 요즘은 그러지 못하고 있어서 저도 아쉬워요.” 처음 개원 때 22평, 현재는 220평
살림의원 조합원 2400명으로 늘어
취지 공감하면 누구나 조합원 가능
가입출자금 5만원 이상 납입해야
비보험항목 중 조합원에 할인 혜택 ―항생제 과잉처방을 안 하는 것도 살림의원 방침 중 하나라고 들었어요. 항생제를 남용하면 내성이 생겨서 나쁘다는 건 알지만, 정작 내 몸이 아플 때는 ‘독하게 약 지어먹고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 싶어요. “약을 ‘세게 지어 달라’는 분들이 있어요.(웃음) 다른 데선 8~9알씩 약을 ‘한 움큼씩’ 주는데, 여긴 너무 적게 준다고 불평도 하고요. 약을 많이 먹는다고 좋은 건 아닌데 말이죠.” ―감기 걸렸을 때 의사들이 하는 말은 비슷해요. “물 많이 마시고 충분히 쉬세요.” 근데 그게 되냐고요?(웃음) “맞아요. 사실 이건 우리나라 노동시장 문제랑 관련되어 있어요. 직장에서 연차나 병가를 내기가 쉽지 않잖아요. 일단은 빨리 증상이 호전되어야 일을 계속 할 수 있으니까…. 충분히 쉬면 나을 수 있는 걸 쉬지 못하고 약에 의존해서 가는 거죠.” ―사회적 맥락을 거세하고 환자의 몸만 보면 놓치는 부분들이 생기는군요. “그렇죠. 젊은 여성들이 여기저기가 아프다고 하면, 남성 중심적인 진단시스템에서는 기질적 문제가 없는데 젊은 여성들이 아픈 건 그들이 불안하고 예민하고 정신적으로 취약한 존재라서 그렇다고 보는 경향이 있어요. 의사들이 남성 환자에 비해 여성 환자의 통증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건 외국에서 나온 연구 결과에도 있어요. 실제로 젊은 여성들이 처해 있는 불안정한 노동시장, 성폭력적인 사회 환경 같은 사회적 조건은 도외시하고, ‘젊은 여자들은 툭하면 아프다고 해’라고 하는 건 잘못이죠.” “의사가 좀 더 밀착해서 관심 갖고
케어할 거라고 기대하고 가입하죠”
남성조합원 탈모클리닉도 운영
여성주의는 사회 약자 시선 대변
서로 돌보고 돌봄 받는 마을공동체 ―그래서 단순한 증상 확인이 아니라 의사와 환자 간의 깊은 대화가 필요하겠군요. 살림의원에서 없애고자 하는 게 3분 진료와 항생제 남용이라면, 살림의원에만 있는 것, 특별한 프로그램은 뭐가 있습니까? “운동처방이요. 운동에 대한 처방전이 따로 있어요. 두통이나 소화불량을 해결하기 위해서 운동처방을 할 때도 있고 만성질환, 고혈압, 퇴행성 관절염 같은 걸 관리하기 위해서도 운동처방을 할 때가 있어요.” 그가 보여준 ‘운동처방전’ 용지에는 주치의가 권장하는 유산소운동의 종류, 근력운동의 유형과 시간, 횟수 등을 상세히 체크하도록 되어 있었다. 운동처방전을 받은 환자는 각자 집에서 권장받은 운동을 할 수도 있지만, 살림의원에 붙어 있는 운동센터에서 운동처방사의 코칭을 받아 자기 몸에 맞는 운동을 익히거나 여럿이 함께하는 건강강좌를 수강하기도 한다. 추혜인 원장이 운동센터 ‘다짐’(다-Gym)으로 우릴 안내했다. 커다란 거울이 달린 15평 정도의 공간에 별다른 운동기계는 놓여 있지 않았다. 집에서 언제든 기계 없이 할 수 있도록 고무밴드나 요가매트, 아령과 같이 구하기 쉬운 기구들만 비치해 두고 사용법을 익히게 한다. 다짐이란 이름답게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운동공간’, ‘함께 건강해지자고 다짐’하는 주민들의 공간이다.
의사란 직업으로 할 수 있는 일
환자 진료를 마치고 바로 우리 일행을 맞이하느라 추혜인은 저녁도 거른 모양이었다. 잠시 인터뷰를 멈추고 식사를 하시라고 했다가 돌아오니 테이블 위에 과자와 음료수를 놓고 먹고 있었다. 3층 주민 소모임실에서 열리는 일본어교실에서 얻어 왔다며 우리에게도 나눠 먹자고 간식을 내밀었다. 살림의료협동조합은 조합원들이 주체가 되어 다양한 건강모임을 운영하는데, 같이 음식을 만들어 먹는 ‘밥앤찬’, 산행모임인 ‘오투’, 텃밭농사를 함께하는 ‘주렁주렁’, 외국어를 공부하거나 여성주의 책 읽기를 하는 공부모임도 있고, 주민 간의 친교를 위한 ‘친구야 놀자’ 같은 프로그램도 있다.
―원장님도 소모임에 참여하나요?
“저는 등산하는 오투 멤버인데, 자주 못 가요. 1년에 한 번 정도?(웃음)”
―의사라고 하면 고액 연봉에 안정된 직업으로 선망받는데, 여기서 일하는 거 재미있으세요?
“나의 진료를 기본적으로 신뢰해주는 사람들 만날 수 있다는 게 큰 기쁨이죠. 어차피 제 월급과 제가 내는 매출이 전혀 관계없다는 걸 다들 아시기 때문에 제가 ‘무슨 검사를 해봅시다’, ‘무슨 주사를 맞는 게 좋겠습니다’ 하면 ‘네가 돈 벌려고 그러지?’ 하는 사람은 정말 아무도 없거든요. 그런 관계에서 일하는 게 의사에겐 축복인 것 같아요. 내가 내 양심에 맞게 어떤 진료를 권했을 때 그게 의심 없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활짝 웃는 그의 표정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그가 ‘축복받은’ 의사로 자기 자리를 찾기까지는 남다른 우여곡절이 있었다. 추혜인은 진주에서 1남4녀의 둘째 딸로 태어나 그곳에서 초중고를 마치고 1996년 서울대 공대에 입학했다. 도시공학을 전공하고 싶어서 토목건축계열로 입학했는데 1학년 겨울방학 때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인턴십을 하러 들어갔다가 진로를 바꿀 결심을 했다.
―의사가 되겠다고 생각한 게 그때인가요?
“네. 그게 1997년 1월쯤이었는데, 성폭력특별법이 1995년 제정되었지만 아직 충분한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았을 때거든요. 상담소 선생님들이 성폭력 피해자의 입장에서 진료해줄 의사가 필요하단 얘기를 입에 달고 사셨어요. 그게 계기가 돼서 의사가 돼야겠다 생각했죠.”
―의대에 들어갈 땐 가난한 사람을 치료하는 슈바이처 같은 의사가 되겠다고 모두들 장대한 꿈을 이야기하지만, 막상 졸업하고 진로를 정할 때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은 드물어요. 의대 다니면서 마음이 바뀌지 않았어요?
“별로 그러진 않은 것 같아요. 제가 삼수생 나이로 들어갔으니까 입학할 때부터 동기들보다 나이가 많았던데다, 남들 2년 다니는 예과를 5년이나 다니느라고 본과에 올라갈 때 동급생보다 나이가 꽤 들었거든요.”
―왜 예과를 5년이나 다녔어요?
“그게….”
―말씀하시기 곤란한가요?
“그런 건 아닌데, 지금까지 별로 얘기하지 않은 거라서.(웃음) 대단한 건 아니고요.”
추혜인은 의대 입학 이듬해인 99년 시위 준비를 하다가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한 달 만에 풀려나왔지만, 딸이 학생운동을 할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부모님에겐 큰 충격이었다.
“경찰을 만나서도 우리 아이는 절대 그런 애가 아니라고,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그랬을 거라고 하셨대요.(웃음)”
구속 때문에 휴학을 하게 되었지만 풀려난 뒤에도 복학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를 위한 ‘서울여성노동조합’에서 반상근으로 일하고 ‘여성해방연대’에서 활동했다. 의사가 되기보다는 시민단체 직업활동가가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일부러 전공을 바꿔 여성을 위한 의사가 되겠다고 선택한 길인데 왜 의대를 포기하려고 했어요?
“2000년에 의약분업이 있었는데 거기 반대해서 의대 선배들이 파업을 했어요. 그때 의사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처참하게 무너지는 걸 봤죠. 본과에 진학해서 의사가 되는 게 정말 내가 원하는 일인가? 앞으로 뭘 하고 살까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그땐 의사가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던 것 같아요.”
―의사를 어떻게 봤길래요? 기득권자?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 집단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느꼈어요.”
―서울 의대생이 학교 그만두고 기층 여성 문제에 꽂혀서 지냈다는 걸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땐 그런 선배들이 많았으니까요. 좋은 학벌 있어도 직업활동가가 되고, 대학 그만두고 공장에 가기도 하고. 특별한 선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다시 의대로 복귀한 이유는 뭐예요?
“같이 활동하던 분들의 권유도 있었고요. 한 사람의 활동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 같은 걸 느꼈달까, 이전에는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다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이 있었는데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는 의사’가 되어 할 수 있는 일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추혜인에게 ‘의사’는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 의미 있는 일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였는지도 모른다. 의료협동조합에 대한 꿈을 구체화한 건, 본과 4학년 의사고시를 앞두고 있던 때였다. 시험 준비를 하라고 학교에서 수업을 많이 빼주던 때라 시간적 여유가 생겼고, 여름방학 동안 ‘언니네트워크’에서 진행하는 페미니즘 캠프 기획단에 참여했다. 여성주의적인 시각에서 대안적인 질서로 운영되는 병원을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추혜인은 본과 졸업 후 서울대병원에서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거쳐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되었다. 동네 주치의를 하기에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한 전공을 고른 것이다. 2009년부터 의료협동조합 설립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고 그 결실은 3년 후 살림의원 개원으로 이어졌다.
다문화여성·트랜스젠더 인권 치료
남성 중심 시스템이 여성 통증 무시
‘밥앤찬’ ‘주렁주렁’ 건강 모임도
월 1만원에 주치의 제도 실험 예정
“환자 건강이 의사에게도 이득 돼야” 의사와 환자는 대립적 관계가 아니어야 ―요즘 ‘문재인케어’에 반대하는 의사들의 시위와 집회가 계속되고 있어요. 낮은 의료보험 수가를 개선하라고 주장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수가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동의해요. 우리나라에서 위내시경 한번 하면 건강보험공단에 청구해서 받는 것까지 합해서 7만원 정도를 받는데, 미국은 보통 500달러, 유럽 같은 경우도 10만~15만원 정도 하거든요. 수가가 워낙 낮으니까 박리다매를 하거나 수면마취 같은 비보험으로 수가를 보전하는 기형적인 구조가 되어온 거죠.” ―하지만 국민들의 반응은 싸늘합니다. 의사들이 환자를 돈으로 본다는 불신감이 깊이 깔려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불신감이 부당하다고 볼 순 없죠. 사실 지금 같은 ‘행위별 수가제’ 아래에서는, 검사나 치료를 많이 하면 할수록 의사나 병원이 돈을 버는 구조니까요. 그런데 환자와 의사 관계를 대립각으로만 이해해선 해법을 찾기 힘들다고 봐요. 다른 나라에서처럼 주치의 제도를 운영하거나 ‘총액 계약’을 하는 방식으로 행위별 수가제의 대안이 되는 제도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금연캠페인을 잘해서 우리 마을에 금연자가 많아졌다, 그러면 의사한테 인센티브를 주는 나라들도 있거든요. 환자가 아플수록 의사가 이득을 보는 게 아니라, 환자가 건강해지는 게 의사한테도 이득이 되게 만든다면 의사와 환자가 대립적 관계가 될 이유가 없죠.” ―우리 실정에 맞는 대안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저희가 다음달 중으로 서울혁신파크 안에 조금 실험적인 클리닉을 개원하려고 해요. 지금 살림의원을 ‘마을 주치의’라고 칭하고 있지만, 실제로 주치의로 활동하는 데는 상당한 제약이 있거든요. 환자 수도 너무 많고 충분한 시간을 들여 진료하기도 벅차고요. 그래서 지금 살림의원과는 조금 다른 모델로 월 1만원 정도의 회비를 내고 예약제를 기본으로 충분한 상담시간을 보장하는 주치의 제도를 운영해 보려고 해요.” ―월 1만원으로 수지타산이 맞을까요? “그걸로 감당이 안 될 거예요. 그래도 실제로 운영을 해봐야 어느 정도 비용이 드는지 정확히 추산해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실험을 통해서 주치의 제도를 정책으로 제안할 때 어느 정도의 예산이 필요한지 구체적인 근거로 삼을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우리나라에 의료협동조합 형태의 주민참여형 주치의 제도가 처음 등장한 게 1994년인데, 지금도 전국에 25개에 불과해요. 이렇게 성장이 저조한 이유가 뭘까요? “사람들이 의료협동조합에 대해서 너무 몰라요. 아, 정말 좋은 건데, 설명할 방법이 없네.(웃음)” ―많이 듣던 광고카피인데요.(웃음) “그간 불법적인 사무장병원을 의료생협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있어서, 주민참여형 의료협동조합이 오해도 많이 받았어요. 의사들도 주민참여형 모델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가 많고요.” ―앞으로 이런 일을 하는 의사들이 많아지면 좋겠네요. 의료협동조합에서 일하는 선배로서 이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우선, 짧게 일할 생각으론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주민들과의 관계에 기반해서 진료를 하는 건데, 그 관계가 형성되기까진 초기 투자 시간이 좀 필요해요. 그런 관계를 맺는 데 재능이 있는 사람이면 좋겠고요. 어떤 의사들은 자기가 진료하는 동네에 살지 않으려 하거든요. 환자들 앞에서 자기 일상을 드러내는 게 부담스럽기 때문에. 근데 나도 한 명의 마을 주민으로 같이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야 할 것 같아요. (갑자기 얼굴을 두 손으로 싸쥐며) 아, 아녜요. 내가 너무 많이 바란다. 그냥 아무나 오시면 환영할 게요. 제가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닌데.(웃음)” ―원장님은 이 동네 사세요? “2009년 설립준비모임 시작할 때 바로 이사했어요.” ―동네에서 주민들 마주치는 거 불편하지 않으세요? 더구나 비혼여성인데 프라이버시도 있고. “처음엔 목욕탕에서 마주치는 게 너무 불편했어요. 다들 아는 척하고 거기서 상담을 청하고, 욕탕 안에서 친구 불러다가 소개해주고.(웃음) 정말 몸 둘 바를 몰랐는데, 이젠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해요. 주민들이랑 부대끼면서 살다 보니까 여기가 고향이 된 것 같아요.” ―끝으로 덧붙일 말씀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의사의 조건은 잊어주세요. 일하고 싶은 생각만 있다면 누구든 환영합니다.(웃음)” 살림의원의 운동센터 다짐에는 ‘기계가 아니라 관계로 건강해집시다’라는 표어가 붙어 있다. “정말 좋은데 설명할 길이 없다”던 추혜인이 말하고 싶어 한 것도 결국 그것이었을 것이다. ‘사람끼리 돌보는 관계에서 누리는 기쁨과 보람.’ 건강한 삶이란 약과 의학기술로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녹취 이수현
추혜인을 만든 시간들
살림의원 추혜인 원장
지난달 21일 서울 은평구 구산동에 있는 살림의원에서 인터뷰 질문에 답하고 있는 추혜인 살림의원 원장.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추혜인 살림의원 원장이 지난달 21일 서울 은평구 구산동에 있는 살림의원 진료실에서 환자와 상담을 하던 중 함께 웃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2012년 비영리의료협동조합 설립
‘여성주의 병원’도 더불어 표방
치과, 운동센터 등 통합건강관리
대안 의료체계 모델로 사회 관심 ―관계적인 측면이요? “의사와 환자의 관계요. 의사가 좀 더 밀착해서 관심을 가지고 케어할 거라고 기대하고 가입하시는 거죠.” ―여성주의 건강관을 바탕으로 하는 의료공동체를 표방했는데, 페미니스트들이 여성들만 전문으로 진료하는 곳인가요? “그건 물론 아니고요.(웃음) 남성 조합원들도 있고 남성을 위한 탈모클리닉도 있는걸요.” ―그럼 ‘여성주의 병원’이라는 게 뭡니까? “전 여성주의가 사회적 약자의 시선에서 세상을 재해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런 시각에서 보다 평등한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 실천하는 거’라고요. ‘남자들이 권력을 갖고 있으니 여자들도 권력을 갖자, 남자를 이겨보자’ 이런 게 아니고요. 누가 이기고 지는 개념이 없는, 그런 사회를 만들자는 거죠.” ―그런 여성주의가 병원 운영에 어떻게 반영되죠? “환자와 의사가 평등하게, 서로를 존중하고 신뢰하면서, 같이 참여하고 책임을 나누는 거죠. 단순한 소비자로서의 환자나, 병원 소유자나 의료서비스 판매자로서의 의사가 아니라, ‘서로 돌보고 돌봄을 받는 마을공동체를 만들자’는 뜻을 공유하고 협력하면서 의사결정 과정에 같이 참여하는 거예요.” 살림의료협동조합에서는 모든 조합원이 출자액이나 가입 시기에 관계없이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조합원의 투표로 선출된 대의원 110명이 총회를 열어 이사와 임원을 선출하고 사업계획을 승인한다. 병원에서 수익이 나도 배당은 하지 않으며 환자 수가 많아졌다고 의사에게 따로 인센티브를 주지도 않는다. 살림의료협동조합의 기본 사명은 ‘민간병원을 대신하는 공동소유의 병원’이 아니라 ‘민간병원이 할 수 없는 건강한 지역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살림의원이 다문화여성을 위해 그들의 언어로 만들어진 문진표를 쓰거나 문자서비스를 보내는 것, 트랜스젠더 환자들에게 따뜻한 병원이 되도록 ‘인권진료’를 하기로 결정한 것은 모두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진 결정이다. 살림의원 로비 벽면에는 ‘서로 돌보고 돌봄 받는 좋은 이웃이 되자’는 살림조합원의 약속이 붙어 있다. 살림의원에 없는 것과 있는 것 ―개원 초기 기사를 보니 ‘살림의원은 3분 진료를 하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아, (가슴에 손을 얹으며) 3분 진료는 정말 안 하고 싶은데, 요즘은 환자분들이 너무 많이 오셔서 대기 시간이 한 시간, 두 시간 길어지니까 예전보다는 여유가 없어진 것 같아요. 대기환자 생각하면 아무래도 서두르게 되죠.” ―저도 의사 만나서 3분 정도 짧게 얘기하고 끝내는 건 불만이지만, 제 앞의 환자가 의사 붙들고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는데 의사가 가만히 들어주고 있으면 슬며시 짜증이 나기도 해요.(웃음) “하하, 그렇죠. 그래도 뒤에 대기하는 환자가 없으면 전 길게 다 들으려고 노력합니다. 환자가 자꾸 반복적으로 말하는 건 환자 기분이 불안해서 그러는 경우가 많고요, 간혹 인지 기능상의 문제가 있어서 그럴 수도 있거든요. 가만히 들어드리는 게 필요하죠. 개원 초엔 환자가 많지 않아서 한 시간씩 온갖 얘기 다 하기도 했는데, 요즘은 그러지 못하고 있어서 저도 아쉬워요.” 처음 개원 때 22평, 현재는 220평
살림의원 조합원 2400명으로 늘어
취지 공감하면 누구나 조합원 가능
가입출자금 5만원 이상 납입해야
비보험항목 중 조합원에 할인 혜택 ―항생제 과잉처방을 안 하는 것도 살림의원 방침 중 하나라고 들었어요. 항생제를 남용하면 내성이 생겨서 나쁘다는 건 알지만, 정작 내 몸이 아플 때는 ‘독하게 약 지어먹고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 싶어요. “약을 ‘세게 지어 달라’는 분들이 있어요.(웃음) 다른 데선 8~9알씩 약을 ‘한 움큼씩’ 주는데, 여긴 너무 적게 준다고 불평도 하고요. 약을 많이 먹는다고 좋은 건 아닌데 말이죠.” ―감기 걸렸을 때 의사들이 하는 말은 비슷해요. “물 많이 마시고 충분히 쉬세요.” 근데 그게 되냐고요?(웃음) “맞아요. 사실 이건 우리나라 노동시장 문제랑 관련되어 있어요. 직장에서 연차나 병가를 내기가 쉽지 않잖아요. 일단은 빨리 증상이 호전되어야 일을 계속 할 수 있으니까…. 충분히 쉬면 나을 수 있는 걸 쉬지 못하고 약에 의존해서 가는 거죠.” ―사회적 맥락을 거세하고 환자의 몸만 보면 놓치는 부분들이 생기는군요. “그렇죠. 젊은 여성들이 여기저기가 아프다고 하면, 남성 중심적인 진단시스템에서는 기질적 문제가 없는데 젊은 여성들이 아픈 건 그들이 불안하고 예민하고 정신적으로 취약한 존재라서 그렇다고 보는 경향이 있어요. 의사들이 남성 환자에 비해 여성 환자의 통증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건 외국에서 나온 연구 결과에도 있어요. 실제로 젊은 여성들이 처해 있는 불안정한 노동시장, 성폭력적인 사회 환경 같은 사회적 조건은 도외시하고, ‘젊은 여자들은 툭하면 아프다고 해’라고 하는 건 잘못이죠.” “의사가 좀 더 밀착해서 관심 갖고
케어할 거라고 기대하고 가입하죠”
남성조합원 탈모클리닉도 운영
여성주의는 사회 약자 시선 대변
서로 돌보고 돌봄 받는 마을공동체 ―그래서 단순한 증상 확인이 아니라 의사와 환자 간의 깊은 대화가 필요하겠군요. 살림의원에서 없애고자 하는 게 3분 진료와 항생제 남용이라면, 살림의원에만 있는 것, 특별한 프로그램은 뭐가 있습니까? “운동처방이요. 운동에 대한 처방전이 따로 있어요. 두통이나 소화불량을 해결하기 위해서 운동처방을 할 때도 있고 만성질환, 고혈압, 퇴행성 관절염 같은 걸 관리하기 위해서도 운동처방을 할 때가 있어요.” 그가 보여준 ‘운동처방전’ 용지에는 주치의가 권장하는 유산소운동의 종류, 근력운동의 유형과 시간, 횟수 등을 상세히 체크하도록 되어 있었다. 운동처방전을 받은 환자는 각자 집에서 권장받은 운동을 할 수도 있지만, 살림의원에 붙어 있는 운동센터에서 운동처방사의 코칭을 받아 자기 몸에 맞는 운동을 익히거나 여럿이 함께하는 건강강좌를 수강하기도 한다. 추혜인 원장이 운동센터 ‘다짐’(다-Gym)으로 우릴 안내했다. 커다란 거울이 달린 15평 정도의 공간에 별다른 운동기계는 놓여 있지 않았다. 집에서 언제든 기계 없이 할 수 있도록 고무밴드나 요가매트, 아령과 같이 구하기 쉬운 기구들만 비치해 두고 사용법을 익히게 한다. 다짐이란 이름답게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운동공간’, ‘함께 건강해지자고 다짐’하는 주민들의 공간이다.
추혜인 살림의원 원장과 직원들이 지난달 21일 서울 은평구 구산동에 있는 살림의원 사무실 책상에서 서류를 정리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남성 중심 시스템이 여성 통증 무시
‘밥앤찬’ ‘주렁주렁’ 건강 모임도
월 1만원에 주치의 제도 실험 예정
“환자 건강이 의사에게도 이득 돼야” 의사와 환자는 대립적 관계가 아니어야 ―요즘 ‘문재인케어’에 반대하는 의사들의 시위와 집회가 계속되고 있어요. 낮은 의료보험 수가를 개선하라고 주장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수가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동의해요. 우리나라에서 위내시경 한번 하면 건강보험공단에 청구해서 받는 것까지 합해서 7만원 정도를 받는데, 미국은 보통 500달러, 유럽 같은 경우도 10만~15만원 정도 하거든요. 수가가 워낙 낮으니까 박리다매를 하거나 수면마취 같은 비보험으로 수가를 보전하는 기형적인 구조가 되어온 거죠.” ―하지만 국민들의 반응은 싸늘합니다. 의사들이 환자를 돈으로 본다는 불신감이 깊이 깔려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불신감이 부당하다고 볼 순 없죠. 사실 지금 같은 ‘행위별 수가제’ 아래에서는, 검사나 치료를 많이 하면 할수록 의사나 병원이 돈을 버는 구조니까요. 그런데 환자와 의사 관계를 대립각으로만 이해해선 해법을 찾기 힘들다고 봐요. 다른 나라에서처럼 주치의 제도를 운영하거나 ‘총액 계약’을 하는 방식으로 행위별 수가제의 대안이 되는 제도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금연캠페인을 잘해서 우리 마을에 금연자가 많아졌다, 그러면 의사한테 인센티브를 주는 나라들도 있거든요. 환자가 아플수록 의사가 이득을 보는 게 아니라, 환자가 건강해지는 게 의사한테도 이득이 되게 만든다면 의사와 환자가 대립적 관계가 될 이유가 없죠.” ―우리 실정에 맞는 대안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저희가 다음달 중으로 서울혁신파크 안에 조금 실험적인 클리닉을 개원하려고 해요. 지금 살림의원을 ‘마을 주치의’라고 칭하고 있지만, 실제로 주치의로 활동하는 데는 상당한 제약이 있거든요. 환자 수도 너무 많고 충분한 시간을 들여 진료하기도 벅차고요. 그래서 지금 살림의원과는 조금 다른 모델로 월 1만원 정도의 회비를 내고 예약제를 기본으로 충분한 상담시간을 보장하는 주치의 제도를 운영해 보려고 해요.” ―월 1만원으로 수지타산이 맞을까요? “그걸로 감당이 안 될 거예요. 그래도 실제로 운영을 해봐야 어느 정도 비용이 드는지 정확히 추산해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실험을 통해서 주치의 제도를 정책으로 제안할 때 어느 정도의 예산이 필요한지 구체적인 근거로 삼을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우리나라에 의료협동조합 형태의 주민참여형 주치의 제도가 처음 등장한 게 1994년인데, 지금도 전국에 25개에 불과해요. 이렇게 성장이 저조한 이유가 뭘까요? “사람들이 의료협동조합에 대해서 너무 몰라요. 아, 정말 좋은 건데, 설명할 방법이 없네.(웃음)” ―많이 듣던 광고카피인데요.(웃음) “그간 불법적인 사무장병원을 의료생협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있어서, 주민참여형 의료협동조합이 오해도 많이 받았어요. 의사들도 주민참여형 모델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가 많고요.” ―앞으로 이런 일을 하는 의사들이 많아지면 좋겠네요. 의료협동조합에서 일하는 선배로서 이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우선, 짧게 일할 생각으론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주민들과의 관계에 기반해서 진료를 하는 건데, 그 관계가 형성되기까진 초기 투자 시간이 좀 필요해요. 그런 관계를 맺는 데 재능이 있는 사람이면 좋겠고요. 어떤 의사들은 자기가 진료하는 동네에 살지 않으려 하거든요. 환자들 앞에서 자기 일상을 드러내는 게 부담스럽기 때문에. 근데 나도 한 명의 마을 주민으로 같이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야 할 것 같아요. (갑자기 얼굴을 두 손으로 싸쥐며) 아, 아녜요. 내가 너무 많이 바란다. 그냥 아무나 오시면 환영할 게요. 제가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닌데.(웃음)” ―원장님은 이 동네 사세요? “2009년 설립준비모임 시작할 때 바로 이사했어요.” ―동네에서 주민들 마주치는 거 불편하지 않으세요? 더구나 비혼여성인데 프라이버시도 있고. “처음엔 목욕탕에서 마주치는 게 너무 불편했어요. 다들 아는 척하고 거기서 상담을 청하고, 욕탕 안에서 친구 불러다가 소개해주고.(웃음) 정말 몸 둘 바를 몰랐는데, 이젠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해요. 주민들이랑 부대끼면서 살다 보니까 여기가 고향이 된 것 같아요.” ―끝으로 덧붙일 말씀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의사의 조건은 잊어주세요. 일하고 싶은 생각만 있다면 누구든 환영합니다.(웃음)” 살림의원의 운동센터 다짐에는 ‘기계가 아니라 관계로 건강해집시다’라는 표어가 붙어 있다. “정말 좋은데 설명할 길이 없다”던 추혜인이 말하고 싶어 한 것도 결국 그것이었을 것이다. ‘사람끼리 돌보는 관계에서 누리는 기쁨과 보람.’ 건강한 삶이란 약과 의학기술로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녹취 이수현
추혜인을 만든 시간들
사촌 언니, 오빠와 연극 놀이 중. 4녀1남의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나 씩씩하게 자랐다.
대학 시절 의대 선후배들과. 승객의 철로 자살 사고로 생긴 지하철 노동자들의 정신적 트라우마에 대해 산업재해 인정을 요구하는 활동을 논의하고 있다.
여성단체 언니네트워크의 활동회원 워크숍. 비혼 여성들이 어떻게 건강하게 살 것인지 얘기하며 여성주의 의료협동조합에 대한 꿈을 나눴다.
가정의학과 전공의 시절, 일본 한 협동조합 견학. 치매 또는 독거노인들이 함께 마을을 이뤄 서로 돌보며 살아가는 미나미 논비리무라를 방문했다.
살림의원 개원식 날. 의원 개원을 준비하는 동안 고생한 임원, 조합원이 모두 모여 즐긴 동네 잔칫날이었다.
한 달 동안 안식월을 받아 방문한 쿠바. 쿠바는 무상의료와 전국민 주치의 제도가 실시되고 있다. 쿠바 혁명지구 8번 진료소 주치의 닥터 알레한드로(왼쪽), 환자 가족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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