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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우리는 괴물이 아니다...제주의 친절 갚을 기회 달라”

등록 2018-07-01 17:54수정 2018-07-02 10:09

[이브라힘 가족은 어떻게 제주에 오게 되었나]
“전쟁 전까지 예멘에서의 삶 사랑했지만
내전 터진 뒤 ‘공습’ 피해 도망치듯 이사
폭격과 전염병으로 몰살 당한 주검들
아름다운 섬 제주에 닿아 비로소 안도감
손 잡아준 제주도민 호의 잊을 수 없어
친절 어린 손길에 보답할 기회 있기를”

지난달 25일 제주출입국외국인청에서 만난 이브라힘(가명·35)은 기자와 대화를 하던 중 여객기가 제주의 하늘을 지날 때마다 말을 멈췄다. 소음이 대화를 가릴까 말을 멈추는 것이라 생각했다. 짧은 순간 얼굴을 스치는 불안감의 이유를 안 것은 다음날 그를 다시 만나 인터뷰하면서였다. 이브라힘은 유창한 영어로 자신이 예멘에서의 삶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곳 제주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그는 예멘의 상황을, 자신의 긴 여정을, 제주도민에게 받은 환대를 한국인들에게 알리고 싶어했다.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을 거의 그대로 살려 자전적 이야기로 정리했다.

지난달 26일 제주의 한 성당 근처에서 <한겨레>와 만난 예멘인 이브라힘(가명·34)이 자신의 탈출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지난달 26일 제주의 한 성당 근처에서 <한겨레>와 만난 예멘인 이브라힘(가명·34)이 자신의 탈출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아직도 생생하다. 2018년 5월15일 아침.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제주를 향하던 에어아시아 비행기에는 30명의 예멘인이 타고 있었다. 예멘인 승객 중에는 나와 아내 라일라(가명·34) 그리고 한살배기 내 아들 하산(가명)도 있었다. 비행기가 제주도에 닿는 순간, 안전하고 자유로운 땅에 왔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얼굴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같은 비행기를 탄 예멘인들의 얼굴에 모두 나처럼 미소가 가득했다. 어떻게 보면 우스꽝스러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비행기 안 예멘인 30명이 느낀 안도감이 딱 그랬다. 우리에게 제주는 낯선 희망의 땅이었다.

나는 예멘에서의 삶을 사랑했다. 적어도 전쟁 전까지는 그랬다. 예멘의 수도 사나에 있는 대학교에서 영어를 전공한 나는 ‘예멘 에어라인’에 취직해 터키, 방글라데시 등 26개국을 다녔다. 하지만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모든 것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2014년 9월 후티 반군이 수도 사나를 점령한 뒤부터는 상황이 걷잡을 수 없게 흘러갔다. 2015년 3월이 되자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아랍국가들이 내전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사나의 하늘 위에서 전투기가 폭탄을 쏟아낸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아내 라일라와 결혼한지 2개월이 되었을 때였다.

이후 예멘에서의 삶은 조금이라도 안전한 곳을 찾아 도망을 다녔던 기억뿐이다. 수도 사나에서 타이즈로, 타이즈에서 호데이다로, 호데이다에서 아덴으로, 그리고 또다시 사나로. 우리 가족의 삶은 쏟아지는 폭탄을 피하기 위한 피난의 연속이었다. 아이와 노인들은 집 안에 있다 폭격으로, 이웃들은 콜레라 등 질병으로 죽어나갔다. 사나 공항에서 일할 때 아랍 연합군의 공습을 눈 앞에서 목격한 나는 지금까지도 비행기 소리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낀다. 내가 사랑하던 예멘에서의 삶은 그렇게 파괴되었다.

2015년 8월, 나는 인접국인 오만을 거쳐 말레이시아에 가기로 결정했다. 내가 먼저 말레이시아에 도착해 돈을 번 후, 적당한 때를 살펴 아내를 이주시킬 계획이었다. 다행히 모든 것이 계획대로 이뤄졌다. 나는 오만을 거쳐 그해 9월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했다. 말레이시아에 머문 지 1년이 되어가던 2016년 7월, 아내는 라마단(무슬림의 금식월) 기간 중 잠시 포성이 멎은 틈을 타 예멘을 탈출했다. 예멘을 떠날 때, 나는 도로변에서 폭격으로 몰살당한 사람들의 시체를 보았다. 탈출 중 생존은 순전히 확률의 문제였다. 우리 부부는 운이 좋았다.

말레이시아는 예멘보다 안전했다. 유엔난민기구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돈을 벌 수 없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자국으로 도망쳐 온 피난민들의 취업을 금지했다. 하지만 나는 밥을 먹어야했고, 잘 곳이 필요했고, 예멘에 남은 가족들에게 보낼 돈이 필요했다. 결국 불법적인 경로로 식당에 취업해 접시를 닦았다. 숙소는 식당에 딸린 작은 방이었다. 일은 고됐다. 휴일도 없이 하루 17시간을 일해 처음 1년 반은 한 달에 300달러를, 다음 1년 반은 한 달에 400달러를 벌었다. 근근이 끼니를 이어던 2016년 말 아내가 임신을 했다.

2017년 가을에 사랑하는 아들 하산이 태어났다. 병원비를 지불하느라 수중에 있는 돈을 거의 털어냈지만 행복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불법으로 일하고 있었다. 경찰은 수시로 불법 취업을 단속했고, 그때마다 임기응변이나 읍소로 빠져나왔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취업도,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일도 허락되지 않았다. 말레이시아의 예멘인 커뮤니티에서 한국의 제주도에는 비자 없이 입국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결정을 한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아내는 금으로 된 결혼반지를 팔았고, 나는 주변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고 몇 안되는 가구도 팔았다. 그렇게 모은 돈 2000달러를 전재산으로 우리는 5월15일 제주도에 도착했다. 예멘에서의 피난생활, 말레이시아에서의 그림자 같은 삶, 고난과 두려움이 한 번에 씻기는 기분이었다.

갖고 온 돈이 숙소비와 식비로 바닥나기 시작해, 수중에 고작 200달러가 남았을 때였다. 가족이 ‘홈리스’가 될 수 없다는 심정으로 인터넷을 검색해 예멘인들을 돕는다는 한 성당의 수녀님을 만났다. 행운이었다. 수녀님은 내게 필요로 한 것이 있는지 물었고, 나는 ‘닫힌 공간(closed place)’만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천장과 벽이 있어 비 바람을 피하고, 우리 가족이 머물 수 있는 ‘합법적’이고 ‘안전한’ 공간이면 충분했다. 우리 가족이 예멘과 말레이시아에서는 가질 수 없었던 공간이다. 수녀님은 내게 내 부모님 또래의 부부가 사는 제주의 한 가정집을 소개시켜줬다.

부부는 아늑한 방과 맛있는 음식, 아이를 위한 장난감을 줬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을 사다주었고, 아내가 몸살을 앓을 때는 병원을 데려갔다. 우리 아이를 제주의 목장으로 데려가 말을 태워줬다. 무슬림이 먹는 음식에 대해 묻고 재료를 고심해 골랐다. 그들은 나를 ‘아들’이라고, 내 아내를 ‘딸’이라고 부르며 낯선 곳에서의 삶을 다독여 주었다. 하루는 나처럼 제주의 한 가족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압둘라(가명)가 내게 말했다. 우리는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다고. 그렇다. 우리는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다. 우리는 제주의 ‘부모님’께 돌려줄 수 있는 것이 없다.

예멘인에 대한 한국의 걱정을 잘 알고 있다. 우리의 상황을 알면 사람들의 생각이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도 있다. 우리 가족은 한국의 아름다운 섬을 파괴하러 온 괴물이 아니다. 우리 가족은 그저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 이곳 제주에 왔다. 내가 숙소에서, 은행에서, 슈퍼마켓에서 만난 제주사람들은 하나같이 우리에게 미소를 지어줬다. 그들의 친절이 우리를 구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보여준 친절을 우리 가족이 갚을 기회가 있길 바랄 뿐이다.

제주/글·사진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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