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1965년 한일협정 반대 ② 1971년 교련 반대 ③ 1979년 부마항쟁
1987년 6월 항쟁 땐 검토 후 취소…반세기 넘도록 논란
1987년 6월 항쟁 땐 검토 후 취소…반세기 넘도록 논란
2017년 2월1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외치며 촛불을 들고 걸어가는 시민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민중당은 이번 국정감사를 통하여 지난번 학생들의 한일협정반대투쟁을 진압하기 위해 정부가 발동 , 위헌이라고 지적되기까지 하는 등 말썽을 일으켰던 위수령의 법적 근거와 그 발동으로 인한 부당 처사를 다시 따지는 한편 동령의 폐지를 추진할 방침이다 . 22일 민중당 소속 법사위원 박한상 의원은 위수령은 일본 명치 시대의 위수령을 그대로 옮긴 것이며 법적 근거가 없는 위헌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국회의원으로서 이의 폐지를 정부에 건의하기 위한 대정부 건의안을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
-<동아일보 > 1965년 10월 22일치
한일 굴욕 외교 반대 현수막을 들고 가두 행진하는 학생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정부가 학생 데모를 막기 위해 발동한 위수령과 그에 앞서 군의 실력 행사에 근거를 준 수도경비사설치령에 대해 법적 근거 등에 의문이 있다고 하는 점에 공화당 안에서도 문제시하는 측이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 공화당은 위수령 등의 발동 근거 내지 경위에 대해 아직 공식으로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아니나 국회의 당 소속 법사위원 등 간에 신중한 검토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동아일보 > 1965년 9월 2일치
1971년 4월26일 고려대생들이 ‘교련 전면 철폐’ 펼침막을 들고 거리 시위에 나서는 모습.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교련 반대에서 시작된 학원 동요 사태는 마침내 위수령이 발동 , 일부 대학에 군인들이 주둔하고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8개 대학에 무기한 휴업령이 내려지는 데까지 이르렀다 . 정부는 최근 학생들의 집단 시위 행동으로 학원의 질서가 정상 수업을 실시할 수 없게 문란해져 학원 스스로가 질서를 바로잡지 못할 긴박한 사태에 도달했다고 판단 , 이 같은 강경 자세로 나온 것이다 . 민관식 문교부장관은 일부 불순 학생들에게 강점되어 있는 학원을 되찾아 공부하려는 선량한 학생들에게 면학의 분위기를 마련해주자는 것이 이번 정부 조치의 의도라고 밝혔다 .”
-<동아일보 > 1971년 10월 16일치
“청년학도여 . 지금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 우리의 조국은 심술궂은 독재자에 의해 고문받고 있는데도 과연 좌시할 수 있겠는가 . 이 땅의 위정자들은 흔히 민족을 외치고 한국의 장래를 운운하지만 진실로 이 나라 이 민족의 영원한 미래를 위하여 신명을 바칠 이 누구란 말인가 . 청년학도여 !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돌이켜보게나 ... (중략 ) 소위 유신헌법을 보라 ! 그것은 법이 아니다 . 그것은 국민을 위한 법이라기보다는 한 개인의 무모한 정치욕을 충족시키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 모든 정당한 비판과 오류의 시정을 요구하는 순수한 의지를 반민족적 행위 운운하면서 무참히 탄압하는 현 정권의 유례없는 독재 . 이러고도 우리 젊은 학도들은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사회 문제에 방관만 하고 있을 것인가 ! 너희들의 정열은 어디 있는가 . (중략 ) 모든 효원인들이여 , 드디어 오늘이 왔네 ! 1979년 10월 16일 10시 도서관으로 !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교정에 뿌려진 선언문
1979년 부마항쟁 당시 부산시청 앞 계엄군의 모습.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친애하는 마산시민 여러분 , 마산시 일원의 일부 학생과 분자들의 난동 소요로 우리 군은 마산시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고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마산시 일원에 수령을 발동하였습니다 . 시민 여러분들께서는 필요 없이 시위 군중에 휩쓸려 구경함으로써 주동자 체포와 질서 확립에 지장을 초래케하고 데모 군중으로 오인돼 체포되는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 우리 군은 데모대 주위 모든 군중을 시위 군중으로 판단하고 전원 연행하겠습니다 .”
-1979년 10월 20일 위수사령관 담화문
1987년 6월13일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명동성당에 모여 독재 타도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1987년 6월 20일 새벽 4시 위수령 등 비상사태 결정 시각이 잡혀졌다는 얘기에 따라 19일 낮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만났다 . 대통령을 만나 보니 비상조치 유보와 정치적 해결 방식 의지를 가진 대통령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6.29 선언의 구상에 착수했다 ”
-<용기 있는 사람 노태우 > 이경남 저 , 을유문화사, 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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