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47년 전 오늘, 박정희 강제 이주정책에 버려진 수만명이 봉기했다

등록 2018-08-10 11:13수정 2018-08-10 16:59

[역사 속 오늘] 47년 전 오늘, 1971년 8월 10일
해방 이후 최초의 도시 빈민 ‘투쟁’ 광주 대단지 사건
광주대단지 사건. <한겨레> 자료 사진.
광주대단지 사건. <한겨레> 자료 사진.

때마침 참외를 가득 실은 삼륜차가 지나갔다 . 데모를 하던 군중들은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모두 정신없이 차에 달려들어 흙탕에 떨어진 것까지 주워 먹기 시작했다 . 순식간에 참외 한 차 분이 없어지고 말았다 .

아침에는 죽을 쑤어먹고 , 점심은 걸렀으며 , 저녁에는 국수 한 봉지로 일곱 식구가 한입씩 때워야 할 형편이었다 . - < 신동아 > 1971 년 10 월호

“산모가 아기를 삶아먹었다”는 흉흉한 소문마저 나돌았다. 47년 전 오늘, 1971년 8월 10일 광주 대단지(현재의 경기도 성남시)에서 가난과 굶주림을 참지 못한 수만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른바 ‘광주 대단지 사건’이다. 당시 현장에서 이들의 시위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했던 <신동아> 박기정 기자는 “손에 손에는 식칼, 곡괭이, 몽둥이 등이 쥐어져 있었고 눈망울은 먹이를 찾아 날뛰는 굶주린 야수처럼 살기가 서려 있었다”고 현장을 묘사했다.

광주대단지 강제이주민들이 지은 천막촌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광주대단지 강제이주민들이 지은 천막촌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거리로 뛰쳐나온 사람들은 1969년 3월 당시 박정희 정권의 철거 이주정책으로 인해 서울에서 강제 이주된 철거민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버려진’ 광주 대단지는 기반 시설이 전혀 조성돼 있지 않고 상하수도 시설조차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강제 이주민들은 이곳에서 천막집을 지어 생활해야 했다. 정부가 도시빈민을 서울로부터 ‘격리’하고 사회로부터 ‘배제’하는 동안 광주 대단지의 절대빈곤 상황은 공포와 불만을 가져왔다.

광주 대단지 사건은 해방 이후 최초의 도시 빈민 ‘투쟁’ 사건이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언론을 통제해 이 사건을 폭도들에 의한 ‘난동’으로 몰았다. 심지어 자체 부대를 편성해 시민을 진압할 계획까지 세웠다. 박정희 정권에게 도시빈민은 구제해야 할 대상이 아닌 판잣집과 함께 ‘버려야 할 존재’일 뿐이었다.

막무가내 세운 도시계획의 결과

1970년대 서울 청계천변 송정도 74번지 일대의 판자촌. <한겨레> 자료 사진.
1970년대 서울 청계천변 송정도 74번지 일대의 판자촌. <한겨레> 자료 사진.
광주 대단지 사건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968년, 외국인이 관광을 목적으로 한국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도시 미관을 해친다며 서울의 판잣집 철거에 열을 올렸다.

정부는 부랴부랴 무허가 주택 정책을 세웠다. 이에 서울시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약 350만 평 광주 대단지(현재의 경기도 성남시)를 철거민 정착촌으로 지정했다. 이곳에 10만 세대 55만명의 철거민을 3년 안에 이주시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사업은 건설부 재정계획이 철거민 입주보다 늦게 확정돼 ‘선입주 후 건설’이라는 상황을 초래했다. 결국 정부는 상하수도 등 기본적인 도시기반 시설도 갖추지 못한 황무지에 수만 명을 욱여넣었다.

생존에 필요한 취업과 기반 시설 공사 계획도 거의 없었다. 이로 인해 강제이주민 77%가 월수입 1만 원 이하(전국 도시 평균 3만7000원)로 극심한 빈곤에 시달려야 했다. 실업률은 전국 평균의 약 6배인 23%에 달했다.

하지만 노동시장이 있는 서울로의 접근은 열악했다. 서울 거여동과 천호동을 경유해 을지로 5가까지 가는 버스는 운행 수도 적었지만 1시간 30분이 넘게 걸렸다. 정류장까지 가는 시간 등을 모두 합하면 무려 2시간 30분까지 걸리는 거리였다. 서울과의 물리적 거리감은 도시 빈민들이 대부분인 강제 이주민들의 생계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아울러 그들의 자녀들까지도 학업을 중단하게 만들어 빈곤을 대물림하게 하는 악순환을 가져왔다. 이는 강제 이주민들로 하여금 시간적·정서적 거리감까지 느끼게 만들었다.

서울로부터 추방당하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강제 이주민들의 고립감은 깊어만 갔다. 광주 대단지 사건을 현장 취재한 박태순 작가는 <월간중앙> 1971년 10월 호에서 “광주 대단지는 아무도 어떤 곳인지를 알지 못하는 전설같이 꾸며진 곳이었다”며 당시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다.

갈등에 불을 지핀 정부의 투기 조장

강제 이주민들 대부분이 반강제적인 실업 상태였지만 박정희 정권은 이들에 대해 이주 2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시는 공사 비용을 위해 용지 처분을 서둘렀다. 앞서 말했듯 박정희 정권은 무허가 주택 정책 사업의 재정계획이 철거민 입주보다 늦게 확정되자 ‘선입주 후 건설’로 계획을 전환했다. 이는 재정 조달을 토지개발이익, 소위 ‘땅장사’를 통해 해결한다는 의미였다.

박정희 정권은 토지개발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처음 약속했던 가격의 최소 4배에서 최대 8배가 넘는 가격을 요구했다. 정부가 앞장서서 투기를 조장한 것이다. 그 결과, 광주 대단지는 곧 부동산 투기의 장으로 변해갔다. 도시기반시설이 조성돼 있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주 인구가 폭증했다. 이때 입주한 일반 시민들은 광주 대단지에 대해 정부의 재산권 보호를 요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위원회를 구성한다. 위원회는 1971년 7월19일 거리 집회를 개최한 뒤 대지가격 인하 및 분할상환, 구호 대책 마련 등을 담은 대정부 진정서를 제출한다. 하지만 서울시는 이에 대한 응답은 없이 되레 분양 가격 인상을 통보했고, 경기도는 세금을 독촉했다. 위원회는 ‘투쟁’위원회로 전환하고 집회를 준비했다.

그로부터 약 보름 뒤 1971년 8월 3일, 정부가 발부한 토지대금 납부 고지서가 강제 이주민들에게도 도착했다. 정부는 오를 대로 오른 토지대금과 함께 취득세, 재산세 등 각종 조세의 일시불 납부를 통보했다. 강제 이주민들의 분노도 폭발했다.

광주 대단지 사건에 대한 당시 보도.
광주 대단지 사건에 대한 당시 보도.
1971년 8월10일 마침내 최소 3만, 최대 5만 명이 참여한 광주 대단지 사건이 일어난다. 집회에는 일반 전매 입주자와 강제 철거민은 물론이고 인근 모란 단지 입주자도 참여했다. 이들은 “세금 면제와 실업자 구제, 토지 불하 가격 인하” 등 세 가지 조건을 내걸고 서울시장과의 만남을 요구했다. 시위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6시간 동안 이어졌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양택식 서울시장을 현장으로 파견한다. 결국 양 시장이 주민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광주 대단지 사건은 삼일만인 8월 12일 일단락 됐다.

‘폭도’들에 의한 ‘난동’으로 몰아간 정부

광주 대단지 사건에 대한 당시 보도.
광주 대단지 사건에 대한 당시 보도.
그런데 광주 대단지 사건 과정에 대한 당시 보도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있다. 당시 대부분의 언론들은 광주 대단지 사건을 불러온 정부의 강제 이주문제와 투기 조장 등은 보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난동 사건’ 혹은 ‘폭동 사건’으로 규정하고 원인과 결과가 뒤바뀐 듯한 보도가 이어졌다.

그렇다면 언론에서 말한 ‘난동’과 ‘폭동’이라 부른 행위는 무엇이었을까. 1982년과 2004년에 간행된 <성남시사>에 실린 당시 피해 상황을 종합하면 아래와 같다.

① 성남출장소 건물 1 동 및 건물 내의 행정서류가 전소되고 , 서울특별시 광주대단지사업소 유리창과 기록 등이 대파되었으며 ② 차량피해 22 대 중 소실이 4 대 시영버스 대파 5 대 소파가 13 대였고 ③ 경찰 측이 20 여명 주민 측이 7 명 부상했다 .

하지만 <성남시사>를 비롯한 당시 언론의 보도가 부풀려졌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한국일보>는 사건 당시 유일하게 전 과정을 시간별로 상세하게 보도했다. 당시 기사 내용을 토대로 피해 상황을 종합하면 아래와 같다.

- 서울관 1-356 호 지프를 개울 바닥에 처박음 .

- 광주대단지사업소의 선풍기 4 대 , 전화기 4 대 , 마이크 4 대 , 형광등 40 개 , 캐비니트 30개 와 철제 책상 등을 파괴 .

- 성남출장소의 책상과 의자를 때려 부수고 서류를 소훼

- 성남출장소의 7-192 호 반트럭을 불태워 개울에 처넣음

- 서울 영 7-281 호 시영버스 탈취 / 경기 영 5-2580 호 트럭 탈취 / 운전자 2 명 폭행

- 성남파출소 유리 파괴 / 광주경찰서 2 호 백차 소훼

- 번호 미상의 버스 탈취

차량 훼손은 3대로 관용이며, 탈취는 모두 민간 차량으로 차량번호까지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그 밖에도 광주 대단지 사업소와 성남출장소 집기 손괴가 있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성남시사>는 차량 훼손이 모두 22대이며 성남출장소는 전소됐다고 기록했다.

광주대단지 사건. <한겨레> 자료 사진.
광주대단지 사건. <한겨레> 자료 사진.
왜곡 보도는 이어졌다. 주민들의 폭동이라며 집중적으로 보도된, 연기가 피어오르는 사진은 주민이 지른 불 때문이 아니라, 경찰의 쏜 최루탄 의한 것이었다. 이 같은 내용은 당시 상황을 목격한 박봉준씨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피해 사실을 ‘축소’했을 리 없는 경찰의 공소장 내용에서도 대부분의 언론에서 보도한 피해가 담겨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광주 대단지 사건에 대한 당시 보도.
광주 대단지 사건에 대한 당시 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언론에서는 광주 대단지 사건을 폭동으로 규정지었다. 이후 성남 시민들을 폭동과 난동을 일삼는 반사회 세력으로 몰고 가기도 했다. 언론에서 광주 대단지 사건을 부풀려 왜곡하려 한 이유는 뭘까? 이와 관련해 당시 박정희 정권의 대통령 보고서 (‘광주 대단지 현안 문제 해결 보고’)를 보면 아래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

각하의 지시 ( 대비정 160-63 71.9.23 호 ) 에 의하여 국무총리가 관계 장관 회의를 주재하고 문제를 다음과 같이 해결하였기 보고 드립니다 .

( 중략 )

4. 치안 및 소방 대책

가 . 성남경찰서 신설

(1) 5 개 과 , 187 명 정원

(2) 10 개 파출소 설치 , 정보 및 특수 수사요원 보강

(3) 집단적 행동에 대비하여 사전동향을 파악하고 진압부대 편성 . 자체 진압부대 103 명 365 개의 장비 보유 . 인접 5 개 지역 190 명 및 서울 경찰기동대 492 명의 지원체재 확립 .

( 중략 )

6. 민심의 동향과 대책

가 . 문제점

(1) 현지주민은 서울시로부터 추방당했다는 피해의식이 있고 서울특별시로의 편입운동을 전개하고 있음

(2) 저소득층의 집단화로 생계에 대한 불만이 조직화할 우려가 있음

(3) 지가가 하락하고 경기가 후퇴될 것이라는 데서 오는 , 기대에 어긋났다는 불만

(4) 집단행동으로 의사를 관철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문제점이 있음

나 . 대책

(1) 위의 해결방안과 조치 내용을 철저하게 시행하고 , 광주단지 계획을 1973 년까지 수행한다는 것을 주민에게 주지시켜 민심을 순화시킴

(2) 일반 주택단지를 조성하여 중산층을 유치토록 함

< 대통령보고서 > 제 71-458 호 . 1971.8.11. ( 밑줄은 보고서 원문표기임 .)

광주 대단지 사건 이후 박정희 정권은 일반 입주자가 주장한 재산권 관련 문제는 해결했으나, 약속과 달리 강제 이주민의 생활고를 해결할 대책은 결국 내놓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유지’들로 구성된 일반 입주자 ‘대책위’의 요구만 모두 수용한 것에 그친 것이다.

오히려 박정희 정권은 공권력을 투입해 시민들을 진압할 계획까지 철저하게 세웠다. 광주 대단지 사건 이후 강제 이주민들은 경찰의 감시와 압박을 받으며 더욱 힘겹게 살아가야 했다. 어쩌면 독재정권에 맞선 국민이라서 겪어야 했던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정책토론회 < 성남의 역사 ‘ 광주대단지 사건 ’ 을 조명한다 > 주제별 자료

주최: 국회의원 김병욱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 2001 년 수집 구술자료 ‘ 광주대단지 이주민을 통해 본 1960~1970 년대 이촌향도 경험 ’ ( 부분공개 , 사료계열 COH008_09)

< 한국도시 60 년의 이야기 :2> 손정목

< 우리역사 바로읽기 : 하권 > 하성환

<1971 년 광주대단지 사건 연구 : 도시봉기와 도시하층민 > 김원 , 한국학중앙연구원

<1971 년 광주대단지 사건의 재해석 : 투쟁 주체와 결과를 중심으로 > 임미리 , 한국학중앙연구원

< 광주대단지 사건 > 손정목

국회운영위원회 회의록 제 75 회 제 28 호 , 1970 년 12 월 24 일

국회건설위원회 회의록 제 77 회 제 3 호 , 1971 년 8 월 14 일

국회행정안전위원회 회의록 제 305 회 제 1 차 , 2012 년 2 월 6 일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윤 정부, 체코에 ‘원전 대출’ 카드 내밀었지만… 1.

윤 정부, 체코에 ‘원전 대출’ 카드 내밀었지만…

‘빅5’ 안과 전문의, 마약 하고 환자 7명 수술 진행했다 2.

‘빅5’ 안과 전문의, 마약 하고 환자 7명 수술 진행했다

영국 잡지가 꼽은 “서울의 브루클린”…‘세계 가장 멋진 동네’ 4위 어디? 3.

영국 잡지가 꼽은 “서울의 브루클린”…‘세계 가장 멋진 동네’ 4위 어디?

[단독] 체코 원전 금융지원 없다더니…정부 “돈 빌려주겠다” 약속 4.

[단독] 체코 원전 금융지원 없다더니…정부 “돈 빌려주겠다” 약속

[단독] ‘국민연금’ 정부안대로면 40년 넘게 0.31%씩만 오른다 5.

[단독] ‘국민연금’ 정부안대로면 40년 넘게 0.31%씩만 오른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