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팔성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이 수년에 걸쳐 일기 형식으로 쓴 이른바 ‘이팔성 비망록’이 이명박 전 대통령의 22억여원 뇌물 혐의를 입증할 핵심 증거로 떠올랐다. 이 비망록은 이 전 대통령 당선인 시절부터 취임 직후인 2008년 1~5월 사이에 ‘내가 준 30억’, ‘파렴치한 인간들’, ‘침 뱉고 싶다’ 등 적나라한 표현이 등장해 관심을 끌고 있다. 이 비망록은 이 전 대통령 사건을 심리 중인 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재판장 정계선)가 지난 7일과 10일, 14일 세 차례에 걸쳐 서면 증거 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집중 조명을 받았다. 코너에 몰린 이 전 대통령 쪽은 “조작”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 뱃 속으로 사라질 뻔한 증거 이 전 대통령은 서울시장 퇴임 뒤인 2007년 1월부터 대통령 당선 직후인 2008년 4월까지 이 전 회장으로부터 인사청탁 명목으로 현금 19억5천만원, 양복 1230만원 어치를 받은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법의 뇌물)를 받는다. 비망록은 금품을 받는 ‘통로’로는 부인 김윤옥 여사, 사위 이상주 변호사, 형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의 비서관 등 가족들을 대거 지목하고 있다.
앞서 검찰은 ‘메모광’인 이 전 회장이 오랜 기간 작성한 비망록을 수사 과정에서 압수했다고 한다. 비망록 내용을 정리한 메모지도 발견됐다. 이 전 회장은 압수수색 당시 이 메모지를 급히 삼키려 했지만 수사관이 끄집어냈다고 한다. 이 전 회장은 검찰 조사에서 “대선 전에는 선거자금으로, 대선 후에는 우리금융지주 회장 연임이 필요해서 돈을 줬다”고 진술했다.
■ 적나라한 배신감 이 전 회장은 검찰에서 “2008년 2월23일 이 전 대통령을 만나 (나에게) 금융위원장, 한국산업은행 총재, 국회의원 공천을 (달라고) 얘기했다. 이 전 대통령도 ‘나도 생각해둔 게 있다’ 정도로 얘기했던 것 같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이 전 회장은 주요 금융 기관장 임명이 지체되거나 ‘낮은 자리’를 제안받기 시작하자 비망록에 “엠비에 대한 증오감이 솟아나는 것은 왜일까”, “모두 파렴치한 인간들”이라고 적었다.
결국 그에게는 원하지 않던 우리금융지주 회장 자리가 주어졌다. 임승태 당시 금융위원회 사무처장은 검찰에서 “청와대에서 (이 전 회장을 한국거래소 이사장에 임명하라는) 오더가 내려왔는데 실패해 청와대에서 난리가 났다. 이후 청와대에서 우리금융지주 회장으로 선임하라는 오더가 내려왔다”고 했다. 김아무개 청와대 인사비서관도 검찰에서 “이 전 대통령이 (우리금융지주 회장 건을) 보고하는 동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며 ‘응’이라며 추진하라는 취지로 답했다”고 진술했다.
■ 비망록 진위 공방 비망록과 메모지 내용은 이 전 대통령 최측근들도 인정했다. ‘집사 중의 집사’로 불리는 김희중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은 “비망록은 제가 아는 범위내에서 전부 정확하다”고 진술했다. 사위인 이상주 변호사도 “돈이 든 쇼핑백 같은 것을 받아 장모님께 전달했다”고 진술하는 등 “전반적 취지를 인정한다”고 했다고 한다.
반면 이 전 대통령 변호인은 비망록이 ‘사후 협박용’으로 작성됐을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다. 같은 색깔의 필기구가 계속 쓰인 점, 날짜를 수정한 점 등을 들어 “한 번에 몰아 쓰는 전형적 경우”라고 주장했다. 반면 검찰은 “날짜별로 글씨의 굵기와 필압이 다르다. 이전에 작성된 비망록도 동일한 잉크색”이라고 반박했다. 재판부는 지난 14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비망록 감정을 의뢰했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