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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대충 처박아뒀던 살림고수의 ‘무기’들

등록 2018-08-18 11:30수정 2018-08-18 18:24

[토요판] 남지은의 실전 싱글기
9. 살림 9단의 싹
박스를 뒤져 정체 모를 살림살이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아직 안 써봐서 성능은 모르지만, 모두 살림에 요긴한 것들이었다. 게티이미지뱅크
박스를 뒤져 정체 모를 살림살이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아직 안 써봐서 성능은 모르지만, 모두 살림에 요긴한 것들이었다. 게티이미지뱅크
미니멀리즘을 실천해보겠다며 주방 정리를 했다. 살림도 안 하면서 모아둔 주방용품들이 싱크대 한켠에 가득했다. 다 꺼내어 나열해놓으니 ‘다이소’가 따로 없다. 이건 뭐지? 하나하나 훑어보다가 홀로 시절 역사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독립 초창기, 예쁘게 잘 먹고 잘 살아보겠다며 이것저것 들여놨다. 미니 퐁듀 세트, 주먹밥 만드는 용기, 전자레인지용 계란 삶는 닭 모형, 다용도 채썰기 도구, 파채 만드는 칼, 사과를 단번에 8등분 하는 도구, 하트 모양 계란 후라이 만드는 틀, 대체 정체가 뭔지 모를 화난 표정의 플라스틱 엄마 모형까지. 인터넷을 헤엄치다가 눈길 끄는 것은 죄다 장바구니에 넣었던 모양이다. 퐁듀는 해먹었던가? 주먹밥은? 기억이 없다.

어쨌든, 추억의 소품들을 차곡차곡 박스에 담다가 뜻밖의 물건에 시선이 멈췄다. 투박하게 생긴 1인용 미니 솥이다. 언제 샀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요즘 매 끼니 따끈한 밥 짓기에 관심 많은 터라 바로 실습에 들어갔다. 쌀을 넣고 물을 붓고 전자레인지에 15분 돌렸다. ‘땡’ 하며 갓 지은 한 끼가 등장했다. 그대로 꺼내어 먹으면 됐다. 여태 왜 안 쓰고 넣어뒀던 걸까.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그때부터 종일 보물찾기가 시작됐다. 밑에 받침이 붙어 있는 석쇠로는 가스레인지에서 뒤집어가며 생선을 구웠다. 나름 고등어가 노릇노릇 익었다. 모양이 흐트러지고 냄새, 연기는 좀 나지만 그 정도면 괜찮았다. 물을 붓고 계란을 넣고 전자레인지에 돌리니 따끈따끈한 완숙도 탄생했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산 게 없었다. 알고 보면 난 살림 고수의 감각이 있었던 거다. 그때부터 박스를 뒤져 정체 모를 살림살이를 다시보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뒤지니 화난 엄마 모형은 전자레인지 냄새 제거용이었다. 식초와 물을 섞어 넣어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냄새가 사라진단다. 뚱뚱한 펭귄 모형은 냉장고 냄새를 책임지는 아이였다. 아직 안 써봐서 성능은 모르지만, 모두 살림에 요긴한 것들이었다.

여태 이런 걸 왜 쌓아뒀나, 고민고민해봤더니 이론 습득 없이 실습에 바로 들어가는 초보들의 덤벙거림이 낳은 참사였다. 사긴 샀지만 귀찮아서 대충 한번 읽고 대충 해봤더니 결과도 대충 나와 대충 처박아놓았던 것들이다. 살림에 관심이 많아진 지금에서야 설명서를 꼼꼼하게 읽고, 인터넷에 올라온 사용자들의 ‘1% 비법’까지 챙겨보니 제법 결과물이 좋았다. 미니솥으로 짓는 밥도 ‘아무렇게나’가 아닌 ‘반드시’ 해동으로 15분을 돌려야 제맛을 냈다. 대부분 1~2만원 하는 저렴한 것들이지만, 얼마나 잘 알고 쓰느냐에 따라 그 이상의 효과를 낸다. 그럼 콩나물 기르는 것도? 아무리 해도 안 되던 파채 만드는 칼도 요령을 익히면 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도전!”을 외치며 콩나물 콩을 얼마전 구매했다.

묵혀둔 보물을 발견한 건 좋은데, 어째 미니멀리즘은 수포로 돌아간 듯하다. 깨끗하게 비워졌던 싱크대 한켠이 원상 복구됐다. 그래도 수년 만에 빛을 발하는 요긴한 살림들을 보고 있자니 뿌듯해졌다. 주방 곳곳 모셔둔 것들을 한번 꺼내보시라. 의외로, 보물들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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