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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안희정, 죄 없다면 왜 ‘용서하라’ 했겠나

등록 2018-08-21 16:18수정 2018-08-21 17:06

‘안희정 무죄’ 선고한 재판부에 던지는 질문
통념에서 벗어나 피해자 시각에서 새로운 법 해석을 요구한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8월14일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서울서부지법을 나와 취재진에 둘러싸여 있다 공동취재사진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8월14일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서울서부지법을 나와 취재진에 둘러싸여 있다 공동취재사진

김은실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

*1995년부터 이화여대 대학원 여성학과에 재직하며 정희진, 권김현영 등 페미니즘 후학들을 양성했다. 한국여성학회 회장, 아시아여성학회 회장 등을 지냈다. <여성의 몸, 몸의 문화정치학>(또하나의문화)을 비롯해 60여 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이 사안의 중대성에 비추어볼 때, 재판부 역시 많은 고민이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생각은 참으로 나이브한 것이었다. 선고문을 보니 여전히 재판부에 안희정은 권력이었고, 기득권이었고, 여자 때문에 ‘잘나가던’ 인생이 엉망이 된 동정받는 남성이었다.

성폭력은 오래된 범죄다. 성폭력은 여성들의 삶을 위태롭게 하고, 직장과 공적 영역에서 시민으로서 삶의 지속을 어렵게 만든다. 이 때문에 여성운동은 성폭력이나 성희롱에 대한 사회적 대책, 법적 과정 그리고 성문화를 바꾸는 캠페인을 벌여왔다. 그러나 여성이 고소한 성폭력 사건이 합의되거나 패소하면서, 성폭력은 일부 문제 있는 남성의 개인적이고 병리적인 문제로 되어갔다.

불륜 남녀 고소 사건으로 접근한 재판부

이러한 맥락에서 2018년 1월29일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사건 고발은 직장과 공적 영역에서 젠더 권력으로 생기는 성폭력, 성추행 사건의 구체성을 드러냈고, 많은 여성을 ‘미투’ 행렬에 참여하게 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라는 격려가 이어지고, 젠더화된 권력의 카르텔이 여성을 약자로 만드는 배제의 맥락을 드러내면서 성폭력과 성추행을 당한 여성들의 고발과 발언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이번 안희정 전 지사 소송에서 재판부는 피해자가 직장 내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과 성추행 피해자라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듯 보인다. 선고문에는 “정상적인 판단 능력을 갖춘 성인 남녀 사이에 발생한 사건이고, 피해자의 저항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곤란하게 하는 물리적인 위력이 직접 행사된 구체적 증거가 없는 사안이며”라고 쓰여 있다. 이 문구는 마치 ‘업무상 위계’라는 말을 일부러 은폐하고, 이 사건을 ‘불륜 남녀의 성폭력 고소 사건’으로 접근하는 느낌을 준다. 재판부가 이 사건을 ‘친밀한 일반 성인 남녀 사이에서 있었던 성관계를 성폭력이라고 고소한 사건’으로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에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현재 가족 밖에서, 다양한 직종에서 자신의 생계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하는 여성들이 업무 지위의 위계 구조 속에서 성폭력이나 성추행 그리고 성적 통제를 겪는다는 현실을 아는가. 처음부터 이 사건은 그러한 사건들과 연계된 사건이 아니라고 전제한 것은 아닌가. 재판부는 어떠한 관점과 레퍼런스를 가지고 있기에, 검찰이 일관성 있고 객관적 증거라고 주장한 피해자 진술서를, 신빙성이 떨어지고 의심의 여지가 있는 진술로 판단했는가. 무죄 선고로 재판부가 현재 한국 사회에 말하고 싶은 것이 혹시 이것은 아닌가. “피해 여성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안희정 전 지사를 좋아했다가 문제가 생기자 성폭력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어쩌면 내 의문은 처음부터 재판부가 고려한 사항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고문은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 젠더라는 사회적 구조에서 생기는 문제임을 은폐했다. 나는 이 선고문이 ‘위계 관계 속에 놓여 있는 여성의 노동’과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성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을 삭제했다고 본다. 그래서 쟁점에 초점을 맞추지도 않고, 안희정과 피해자 사이에 일어난 ‘성관계’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토론이나 논의가 없다.

사회가 ‘성적 자기결정권’ 보장했는가

8월14일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한 여성이 안 전 지사를 지지하는 사람의 펼침막을 뺏으려 하고 있다. 연합뉴스
8월14일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한 여성이 안 전 지사를 지지하는 사람의 펼침막을 뺏으려 하고 있다. 연합뉴스

피고인 안희정을 무죄로 판단한 근거는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 개념이다. 성적 자기결정권 개념을 설명하지만, 선고문에서 사용하는 개념과 그 사용 방식은 정확하지도 않고, 또 그 개념이 큰 의미를 갖지도 않았다. 선고문은 피해자가 충분히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진 여성이어서, 피해자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문제는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소유 여부가 아니라 사회가 그 권리를 얼마나 보장하고 지켜주는가이다. 그런데 재판부의 입장은 안 전 지사와의 관계에서 위력 관계가 형성되고 있지도 않고, 또 피해자가 충분히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침해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성폭력 개념과 처벌 규정이 국민적 합의로 구성된 입법 행위를 통해 체계적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피고인의 죄형을 판단하는 현재의 사법적 판단은 현행법에 기준해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고, 거기에 따르면 피고인은 무죄라는 것이다. 이처럼 안이하고 무책임한 판결이 있을 수 없다. 어떤 새로운 방식의 법 해석이나 피해자의 시각을 새롭게 보려는 노력을 찾아보기 어렵다.

선고문에서 무죄 결정을 내리기 위해 언급된 근거들은 ‘팩트’를 고정관념에 맞춰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러한 상황이 발생하는 맥락에 대한 이해는 재판부의 판단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많은 여성이 관심을 가지고, 또 언론의 주목을 받는 사건인 데 비해 재판부가 자료 해석을 통해 판결을 내리는 과정은 피상적이고, 남녀에 대한 고정관념화된 통념을 재생산하고, 여자 수행비서에 의해 사회적 파탄을 맞은 피고인에게 동정적이다.

수행비서로서 피해자의 역할은 아침에 공관에서 안 전 지시가 출근할 때부터 퇴근하고 공관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까지, 옆에서 모든 공적 사적 서비스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사의 기분을 관리하는 감정노동뿐만 아니라, 지사의 일과가 끝날 때까지 피해자의 모든 시간이 ‘업무시간’이라는 점이다. 안 전 지사에게 오는 거의 모든 전화와 문자를 피해자가 먼저 받았고, 사안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자리에 지사와 함께 배석했다. 피해자는 지사의 ‘보조 기억장치’였고, 의견을 달지 않은 그림자이고, 호위무사이고, 방패막이였다. 지사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었고, 또 메신저였다. 이런 맥락에서 피해자는 자신에게 지사와 관련된 개인적 문제가 터졌을 때 그것을 공개하거나, 믿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자세한 내막을 말할 수 없다.

수행비서의 역할은 ‘말하지 않는 것, 본 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다. 안 전 지사는 피해자를 임명했고, 자신이 계속 데리고 갈 것인지 아닌지 결정할 사람이다. 그래서 피해자의 직업적 안정성 그리고 인정은 지사에게 달려 있다. 지사가 있는 방으로 가게 되어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피고인은 항상 피해자를 일로 불렀다. 그리고 “외롭고 힘들다”며 자신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말을 먼저 하고, 피해자더러 “나를 안으라”고 했다. 피해자는 ‘이게 아니다’라고 생각했지만, 소극적 저항일 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했다. 피해자에게 성폭력은 일의 수행 과정에서 일어났고, 그것은 업무상 위력으로 강제되는 구조 속에서 발생했다.

연애 관계에서도 위계 관계 작동, 하물며…

선고문에서는 피해자의 업무 성격이나 과잉 착취된 노동시간 문제 등은 전혀 다루지 않았다. 지사의 잠자리에 맥주와 담배를 가져다주는 것까지 업무 내용에 포함될 때, 지사의 방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사는 성행위가 끝나면 방에서 내보낸다. 그리고 사과한다. 그러면 피해자도 혼란에 빠지면서 ‘정말 실수로 그러신 것이니 다음에는 안 그러겠지’라고 생각하곤 했다.

선고문은 이들의 관계가 성인 남녀의 관계였고, 위력이 작동하지 않는 관계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연애 관계에서도 남녀가 위치한 계급 관계, 위계 관계가 작동한다는 것은 사회 연구의 기본이다. 계급이나 지위의 경계를 넘는 연애가 어떤 파열이나 전복적인 공간을 만들어내지만, 일반적인 경우에 그 연애는 두 사람이 위치한 구조적인 위계를 넘지 못한다. 물론 결혼이나 다른 제도적 자원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자원이나 관계를 재배치할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업무상 위계 관계에서 일과 성관계가 결합된 이 사건의 피해자와 안희정의 관계에서 위력을 넘어서는 그런 ‘인간관계’의 측면은 찾아볼 수 없다. 피해자는 지사의 한마디에 움직여야 하는 자리에 있었다. 모두가 지사를 위해 일하는 조직인데, 만약 피해자가 지사에게 불리한 발언을 하면 지사를 지키기 위해 모두가 함께 피해자를 내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 수행비서가 피해자에게 제시한 문제 해결 방안은 지사가 방으로 오라고 할 때 거절하라는 것이었다. 거절이 어렵기 때문에 피해자가 할 수 있는 방식은 일과 개인적 피해를 분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폭행 사건’과 모두의 삶이 연결된 ‘안 지사를 모시는 일’을 별개로 생각하고 행동했다. 가령 피해자가 러시아에서 성폭행당한 다음날, 개인적 피해와 공적 일을 분리해 업무상 안 전 지사가 좋아하는 순두부 식당을 찾으러 다닌 행동 등은 이런 맥락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피해자와 안희정의 관계에서 피해자는 말을 할 수 있는 자유가 박탈됐다. 이게 바로 위력에 의한 위계 관계 속에 피해자와 안희정의 위치이다. 안희정은 “말하지 마라. 내 말을 들어라. 너는 나의 그림자다”라고 했다. 업무상 위계 관계 속에서 일해본 여성들은 남자 상사에게 여성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경험했을 것이다. 그것은 여성만이 아니다. 남성 또한 위계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어렵다. 그래서 자신의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여자 혹은 남자에게 폭력이 행사된다. 그리고 여성들은 지배, 폭력, 모독을 경험한다.

“용서하라”는 “사랑한다”가 아니다

안 전 지사는 피해자가 괜찮다는 말을 할 때까지 자신이 한 행동을 사과하고 잊으라고 요구했다. 많은 경우 여자들은 목소리를 낮추고 강제된 동의를 보낸다. 그러면 상대는 그것을 여성이 승인을 말하는 방식으로 이해한다. “미안하다” “용서하라”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피고인은 진술에서 그것은 상대를 배려하는 남성적 관용과 어른의 언어였다고 말한다. 피해자가 아니라는 의사를 표시하는데도 “미안하다” “너는 나의 훌륭한 참모다” “나를 믿어라” “너는 나와 함께 간다”는 자신의 주장을 말한다. 피해자의 말, 입장, 위치는 완전히 무시됐다.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재판부 판사들은 다양한 장의 권력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젠더 권력이 그리고 섹슈얼리티가 어떠한 권력관계와 정치를 만들어내는지에 좀더 귀 기울여주었으면 좋겠다. 권력 있는 남성들에 대한 성폭력 고소와 오래된 관계를 정치화하는 사건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제 새로운 개념과 상상력 그리고 어떠한 현실이 도래할 것인지 모색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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