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The) 친절한 기자들]
“존재감, 영향력, 집단의 분위기도 위력”
법리적 판단보다 사회적 인식범위 훨씬 넓어
최근 법조계에서도 새롭게 해석하려는 움직임
“존재감, 영향력, 집단의 분위기도 위력”
법리적 판단보다 사회적 인식범위 훨씬 넓어
최근 법조계에서도 새롭게 해석하려는 움직임
상대를 ‘좌지우지’하고
첫 직장을 다닐 때 일입니다. 회사 대표가 저를 지나칠 정도로 신임했고, 제가 일을 잘해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매일 칭찬을 받았기 때문에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월급을 받아도 일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칭찬은 저를 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더라고요. 집이 조금 멀다고 하니까 자신의 집에 들어와 살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입사 6개월 뒤엔 대표가 제게 고백을 했어요. 저는 당연히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제게만 야근을 시키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너는 밥값을 못하니 지금까지 월급으로 받은 돈을 모두 다 내게 반납하라”며 단둘이 있을 때 협박했습니다. 혼자 야근하던 새벽에는 마사지해준다며 제 몸을 전체적으로 더듬었어요. 나중에는 밥도 바닥에 꿇어앉아 먹게 했고요. “단지 고백을 거절했기 때문이냐”, “이런 행위를 하지 말아달라”고 항의를 했지만 돌아오는 건 머리를 때리는 등 폭행이었습니다. “반성문에 서명하라”며 문서를 건넸는데 그게 반성문이 아니라 사직서더라고요.
사용자가 생계를 쥐고 있으니 도덕적으로 어긋난 행동을 하더라도 노동자는 격한 저항을 할 수 없죠. 그게 바로 상하관계에 존재하는 위력 아닐까요.
군대에 있을 땝니다. 중대장 집을 청소하고, 휴일에 같이 당직을 서고, 다른 중대장과 식사하는 데선 들러리를 서고, 일하는 시간에 불려가서 커피를 타고, 중대장의 서명을 연습해 하지도 않은 병기점검일지에 대리서명을 하기도 했죠. 제가 불법인 걸 몰라서 거부를 못 했던 걸까요? 아닙니다. 거부하면 남은 군 생활을 할 수 없으니까요. 제 선임도 당연하다는 듯이 해온 거였고요. 저는 중대장을 보좌하고 대리하는 사람이라고 늘 정신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거절이 가능한 조직’이라곤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중대장은 사람을 세 부류로 분류했습니다. 개, 사람, 맹수입니다. 개는 말로 못 알아들어서 폭력으로 가르쳐야 하는 부류, 사람은 말로 하면 알아듣는 부류입니다. 그리고 인간과 개를 분류할 수 있는 사람이 맹수죠. 그 맹수가 가진 힘이 위력입니다.
‘불이익을’ 주는 것
“조직에 어울리지 못한다는 인상을 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또 조직의 장이 절대권력을 가져 모두가 그에 맞춰주는 분위기에서 사원이 반대 의사를 표시하기 어려웠습니다.”
“보는 눈이 많았는데도 모두가 성추행을 묵인했습니다. 아무도 내 편이 되어주지 않을 것이란 직감 때문에 바로 항의할 수 없었습니다.”
“저항했을 때 나에게 돌아올 보복이 무서웠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생활기록부 평가가 두려웠고, 직장에선 잘리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저항해도 나만 다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기약 없고 결과도 알 수 없는 싸움을 시작하는 것보다 가해자의 심리를 차라리 이해하려고 하는 게 내 마음의 평온에도 도움이 돼버리는 기이한 전도현상이 일어납니다.”
“을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반대하면 더 이상 업무 계약이 연장되지 않을까 봐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왜 분위기를 깨냐는 식의 핀잔만 돌아오니까요.”
“거절했던 친구가 계속 괴롭힘을 당하는 걸 봤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으로’
“(성추행이) 너무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었고, 놀란 마음에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평소 신뢰하던 상사였기 때문에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나?’하고 현실을 부정했어요.”
“그 순간에는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졌어요. 소리도 안 나왔죠. 데이트 강간을 당할 뻔한 순간에도 ‘설마 이거 성폭행인가? 내가 오해하는 거 아닐까?’ 현실을 부정했습니다. 특히 남성이 여성보다 완력이 세다 보니 저항하면 죽을 거라는 공포에 압도됐습니다.”
‘강제행위’
“거부 의사를 계속 밝히니 일이 끊겼어요.”
“인사팀에 이야기했지만 아무 조처도 없었고 오히려 제보한 사람에게 피해가 돌아오더라고요.”
“제 말을 무시하고 본인이 하고 싶은대로 했습니다.”
“(성폭행 상황에서) 무서워서 몇 번이나 밀쳐내고, 공포감에 온몸이 떨려 최대한 웅크려 있었어요. (가해자는) 오히려 그런 반응을 보고 순진하다며 좋아했고, 계속 저항하자 완력을 행사했습니다.”
“제가 논리적으로 항의하자 그 상황에선 당황해 ‘어쩔 수 없었다’며 대충 넘어갔지만 이후에 여러 형태로 보복하더라고요.”
“말을 안 듣고 까다로우며 분위기를 망치는 직원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응답자 본인이 생각하는 위력의 의미’에 대한 전체 답변을 클라우다이저(Cloudizer) 프로그램을 활용해 ‘워드클라우드’ 형식으로 정리했다. ‘동등하지 않은’ 것
“그 사람이 있는 위치와 갖고 있는 영향력 자체가 위력이라고 봅니다.”
“조직 내에서 ‘알아서 기게 만드는’ 분위기.”
“수직적인 상하관계가 아니어도 돈, 지식, 집안, 학력 등 어떤 자산을 가진 것만으로도 위력이 발생한다.”
“거절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자리, 내 목소리가 무시되는 분위기.”
“사회적 계급의 차이, 문화적으로 고착된 성별 간 지위, 육체적인 힘의 차이, 상대방이 거절하지 못할 것을 이미 알고 행하는 부당한 압력.”
“상대방이 자유의지를 펴지 못하게 하는 비가시적인 힘.”
“지위 및 이해관계로 인해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게 만드는 무형의 힘.”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의 존재와 그로 인해 생기는 존재감.”
“권력자가 직접적으로 위력을 행사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어도, 그 사람이 평소에 보였던 사고나 행위가 소속 집단문화를 통해 영향을 미쳤다면 그것도 위력이다.”
“물리적인 힘의 행사뿐만 아니라 피해자가 속한 작은 사회 내부에서 통용되는 분위기와 환경이 모두 위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해자가 굳이 말하지 않고 피해자도 원치 않는데도 부조리하거나 불합리한 일을 자발적으로 수행하는 건, 분위기에 맞춰 눈치를 보게끔 만드는 환경이 위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선 나이, 조직 내 계급, 업계 안의 높은 평판이 곧 권위로 이어집니다. 반대 의견은 인격적인 공격으로 취급되고, 조직에서의 축출로 이어집니다. 이런 나라에선 그러한 지위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력이 발생합니다. 외형적으로 피해자가 가해자의 지시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오히려 위력관계의 존재를 추단케 하는 상황이지, 그것 자체만으로 피해자의 자발적인 동의가 있었다는 등의 판단을 내려선 안 됩니다.”
이슈한국판 #미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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