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8월14일 1심 선고 공판을 마친 뒤 서울서부지방법원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피해자가 보인 범행 전후의 언행에 통념적 관점에서 볼 때 다소의 모순이나 비합리성이 있다 하더라도, 성폭력범죄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느끼거나 가질 수 있는 심리적 곤경이나 수치심 혹은 트라우마 등으로 인한 것인지 여부를 신중히 살펴보아야 한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수행비서 성폭력 사건에 대한 1심 재판을 맡은 서울서부지방법원 형사11부(재판장 조병구)는 ‘본 사안에서의 구체적인 고려 기준’이라는 항목에서 이같이 밝혔다. 왜 첫 번째 피해 때 바로 신고하지 않고 수행비서 업무를 계속했는지 등 피해자를 의심하는 여러 정황을 이해하는 데 피해자 심리 상태를 참고할 수 있다는 얘기다.
피해자 심리 살펴야 한다더니…
<한겨레21> 취재 결과 안희정 사건 1심 재판부가 자체적으로 전문심리위원인 ㅈ교수에게 의견을 조회하는 과정에서 자료를 편파적으로 제공한 일이 검찰 항소의 근거가 된 사실이 확인됐다. 서울서부지검 관계자는 8월23일 <한겨레21>과 한 통화에서 “ㅈ교수에게 피해자 진술조서, 피고인 쪽 진술조서 등을 제공하면서 증인신문시 검찰이 제시한 증거는 빼고 피고인 쪽이 제시한 증거만 제공했다. 우리가 제출한 자료가 다 반영이 안 됐다. 항소 이유로 ‘심리 미진’을 든 이유”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하는 근거로 ㅈ교수의 의견을 인용했다.
재판부는 애초 검찰이 피해자에 대한 ㄱ교수의 심리 분석 결과를 증거로 채택하자, 안 전 지사 쪽에도 피해자 심리 분석을 할 수 있는 전문가를 지정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안 지사 쪽 전문가 ㅁ씨는 법정 증인신문 과정에서 형사사법 절차에서 감정증인을 서본 적이 없는 등 전문성 문제로 배제됐다. 이후 법원이 피해자 심리 분석을 위해 재지정한 전문심리위원이 ㅈ교수였다. 검찰에 따르면, 법원은 ㅈ교수에게 관련 자료를 보내면서 검찰 쪽 증거를 누락한 채 안 전 지사 쪽 증거만 보냈다. 사실상 재판부가 ‘반쪽짜리’ 의견서를 판결에 반영한 셈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ㅈ교수 의견을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하는 근거(“충격→ 반동→ 재조직을 거치는 것이 위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들의 일반적인 행동 패턴이라는데, 피해자는 약 5시간 후에 곧바로 재적응이 되어 가해자인 피고인을 위한 정상적이고 적극적인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로 썼다.
반쪽짜리 의견서 토대로 결론
장형윤 아주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피해자가 5시간 후에 정상적으로 업무를 본 것은 여전히 충격 상태(사건을 믿을 수 없어 부정 혹은 해리시킨 상태)였던 것으로 보는 게 맞다. 정상 업무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재조직 단계에 벌써 돌입했다고 재판부가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했다.
편파 논란 뿐만 아니라 재판부가 참고한 피해자 심리 관련 재판 자료에 비전문성 문제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겨레21>이 검찰의 의뢰를 받아 피해자 심리 분석을 실시한 ㄱ교수의 법정 증언 녹취서를 살핀 결과, 피고인 안희정 쪽 변호인단은 신원 불명의 ‘정신과 전문의’ 의견을 근거로 ㄱ교수의 심리 분석 결과를 배척했으며 상당 부분이 재판부 판결문에 반영됐다. <한겨레21>이 변호인단이 ㄱ교수의 의견을 배척한 주요 근거에 대해 정신과 전문의 4명에게 자문해보니, 이들은 공통적으로 법정에서 이뤄진 신문 내용이 '의학적으로 터무니없는 내용'이라고 입을 모았다.
녹취서를 보면, ㄱ교수는 피해자의 인성검사(MMPI) 결과를 법정에서 “조용하고 소심하면서도 비교적 강단 있고 추진력 있고 옳고 그름이 명백한 사람인 것으로 나타나고, 대인관계에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공감능력도 잘 발달돼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친밀한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능력도 양호한 상태”라고 말했다.
변호인은 이에 대해 ‘자아가 건강하면 성폭력 피해 사실을 신고하는 게 통상적’이라거나 ‘자아가 건강한데 각종 우울,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나타날 수 있냐’고 신문했다. ‘자아존중감이 높고 성적주체성이 있는 피해자가 자유의사를 제압당했다는 진술에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판결문의 논리와 유사하다. 손창호 나눔정신과의원 원장은 “자아 기능과 불안, 고통의 심리는 별로 관련성이 없다”고 했다. 이승홍 녹색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과장은 “의학적으로 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변호인들의 신문)”이라고 일축했다.
안희정 쪽 변호인단은 성폭행 피해 이후에도 계속 수행비서 업무를 수행한 피해자의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 ㄱ교수가 제시한 ‘해리’라는 심리학적 방어기제가 자아가 건강한 사람한테는 나타날 수 없다는 논리(“해리를 통해 스트레스를 관리한다는 것은 자아가 건강치 못하거나 굉장히 미성숙한 상태라고 전문의들은 얘기한다”)를 폈다. 안주연 마인드맨션의원 원장은 <한겨레21>에 “해리가 방어기제 가운데 미성숙하고 원초적인 것으로 분류돼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자아가 미성숙해서 원초적인 방어기제를 쓰는 게 아니라, 원초적인 방어기제를 쓸 정도로 심각한 충격을 입었다는 게 정신과적인 해석이다. 해리와 자아의 성숙도를 얘기하는 것 자체가 비전문가의 접근이다. 변호사에게 자문한 사람이 정신과 전문의라면, 법정 등에서 공식 인용한다는 것을 모른 채 원론적인 수준에서 얘기했을 것이다. 환자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정신과 전문의가 단정적으로 말하는 경우는 없다”고 말했다.
정신과 전문의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아
변호인단은 또 해리 상태였으면 수행비서 업무를 지속할 수 없었다는 논리를 편다. 장형윤 아주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해리 증상이라는 것은 경한(가벼운) 해리부터 중증 해리까지 매우 넓은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경한 해리는 일반 정상인들도 많이 경험하는 증상이며, 해리가 있으면 정상적으로 업무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억지”라고 말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ㄱ교수 의견이 아니라 변호인단의 논리대로 “‘해리 증상’은 참작되기 어렵다”고 결론 내렸다. 재판장은 변호인이 ‘정신과 전문의 의견’을 거론하는 과정에서 해당 정신과 전문의 경력이나 소속, 전문성 등을 확인하지 않았다. 한 대학 상담심리학과 교수이기도 한 ㄱ교수는 성폭력지원전문기관인 해바라기센터에서 7년 동안 일한 임상심리전문가로, 2004년부터 15년여 형사사법 절차에서 감정증인(전문 지식과 경험으로 알게 된 사실을 말하는 증인)이나 전문가 증인으로 증언해온 이 분야 권위자로 꼽힌다.
전문적 개념에 대한 자의적·임의적인 해석도 자주 눈에 띈다. ‘심리적 얼어붙음’(Psychological Freezing)이 대표적이다. 안 전 지사가 성폭행할 때 피해자가 저항하지 못하고 지시에 순응한 것을 설명하는 심리적 개념으로 ㄱ교수가 설명한 것이다. 판결문은 “피해자가 스스로 피고인을 살짝 안거나, 피고인의 씻고 오라는 지시에 응하고, 피고인과의 담소, 고개를 숙이고 가로저으며 ‘아닌데요, 아니에요’ 정도로 말했다고 하는 점”을 들어 ‘얼어붙음이 없었다’고 판단했다.
전문가들은 심리와 신체적 반응을 혼동했다고 지적했다. 이승홍 과장은 “심리적으로 꼼짝 못하게 되는 개념이지, 동작이나 대화를 할 수 없는 마비 개념이 아니다. 강도가 칼 들고 ‘돈 내놔’ 하면, 얼어서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말했다. 안주연 원장은 “얼어붙음은 심리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거나 정신의학 교과서에 나오거나 명확한 정의가 있는 개념은 아니다.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혼동이 있는 개념으로 피해자의 심리와 피해 상황을 추정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조윤영 기자 jy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