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노무현 의원 ( 개인고유번호 295 번 ) ‘ 순화대상 A 급 ’
개인특성 : “장기간 노동 · 인권 변호사 활동 , 국회 진출 뒤 재야의 지원금으로 노동자 권익 빙자 각종 노사분규 개입 및 활동” ( 중략 )
월별 동향보고 분석의견 : “1990.1.14. 13:35 KAL 편으로 내부하여 동구 초량 3 동 대상자의 사무실에서 조직국장 등 2 명과 출타 후 19:30 분경 초량 2 동 소재 ‘초량갈비’ 에서 조직국장 등 6 명과 석식하고 익일 10:00 새마을 편 상경” (90.3.26) ( 중략 )
윤석양 이병이 한국기독교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군 보안사의 민간인 불법사찰을 폭로하고 있다. 그는 9월 23일 새벽 탈영한 뒤 제일 먼저 <한겨레>를 찾아와 이런 사실을 제보했다. <한겨레> 자료 사진.
‘국군보안사령부(이하 보안사), 민간인 1천3백 명 사찰.’ 오늘로부터 28년 전인 1990년 10월4일, 탈영병 윤석양 이병의 폭로로 드러난 ‘그곳’의 실상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탈영한 윤석양 이병은 보안사에서 정치인들을 비롯한 민간인들에 대해 광범위한 사찰활동을 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사진은 윤 이병이 사찰의 증거로 이날 제시한 사찰대상자의 색인표, 개인별 파일 및 컴퓨터 디스켓이다. <한겨레> 자료 사진.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에서 탈영할 때 챙겨 나온 컴퓨터 디스켓에는 개인별 고유번호를 매겨 관리한 민간인 1303명의 개인 신상카드가 담겨 있었다. 그 항목만 해도 인적 사항을 비롯해 가족사항, 경력, 전과관계, 자격면허, 국외여행, 정당 및 사회단체 활동, 교우 및 배후 인물, 개인 특성 등 모두 9개에 달했다. 심지어 신상카드에는 사찰 당사자의 집 담장 높이와 예상 도주로, 은신처 등까지도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이는 군부정권이 비상계엄을 염두에 두고 ‘방해’가 될 만한 민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내용이었다.
윤석양 이병이 기자회견을 갖고 사찰자료를 공개한 뒤 보안사의 불법 대민사찰을 규탄하는 집회와 시위가 확산했다. 사진은 한양대생 800여명이 노태우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윤 이병의 공익제보는 정치권 등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건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당시 노태우 정권의 퇴진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에 정부는 국방부장관 등 문책인사를 단행하고, 윤 이병이 근무한 보안사 서빙고분실을 폐쇄했다. 보안사의 명칭도 국군기무사로 변경했다. 하지만 정부의 보여주기식 대처는 되레 국민의 불신을 더욱 키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아울러 십수 년이 지나 다시 반복될 ‘군 민간인 사찰’ 문제의 여지를 남겨두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병의 결심, 군 민간인 사찰을 폭로하다
윤석양 이병은 대학 시절 당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군사독재 정권 타도를 목표로 내세운 조직인
‘혁명적 노동자계급투쟁동맹(이하 사노맹)’을 수사한 이른바 ‘사노맹 사건’에 연루되었다. 이에 윤 이병은 군 복무 중 보안사에 연행돼 서빙고분실에서 강제로 대공 및 민간인 사찰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보안사는 이곳에서 윤 이병을 고문해 사노맹 관련자 명단을 자백하게 했다.
보안사의 민간인사찰 실상이 드러나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이 터져 나온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7층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 <한겨레> 자료 사진
보안사에 대한 ‘수사 협조’를 견디지 못한 윤 이병은 양심선언을 위해 탈영을 결심한다. 1990년 9월23일 새벽 보안사를 탈출한 윤 이병은 한국기독교협의회를 찾아갔다. 그는 이곳에서 양심선언문과 80일간 보안사에서 근무하면서 겪은 일들을 정리해나갔다.
이후 윤 이병은 <언론노보> 기자로 일하던 대학 선배의 도움을 받아 당시 <한겨레> 이인우 기자에게 사찰 자료를 건넸다. <한겨레>는 곧바로 특별취재팀을 꾸려 본격적으로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취재에 들어갔다.
윤 이병이 탈영한 지 열흘째가 되던 10월4일, 마침내 서울기독교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윤 이병의 폭로가 나왔다. 공개한 보안사 민간인 사찰 증거물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을 비롯한 민간인 1300여 명을 사찰한 카드와 개인 신상 서류철 4개, 개인별 동향을 기록한 플로피디스크 30장 등이었다. 공개한 자료를 보면, 보안사는 사찰 대상자를 4등급으로 분류해 관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사찰대상자 마다 담당관 1명을 지정해 이들의 발언 내용과 접촉 인물 등 주요활동 내용을 파악한 것으로 드러났다. 담당관은 매달 말 1차례씩 사찰대상자의 ‘문제인물 동향관찰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하고 있었다.
윤 이병은 이날 회견에서 “지난 혁노맹(사노맹) 사건 수사의 경우 보안사가 직접 박대호(서울대 국사3 제적), 정헌(한국외국어대 독어3 휴학)씨 등 민간인들을 체포해 조사하는 등 각종 대민 수사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윤 이병의 폭로는 이때까지 “군사 관련 특수정보 수집 등 보안사 고유 업무 이외의 정치사찰이나 대민 수사는 일절 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 보안사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정부는 윤 이병의 폭로가 나오기 2년 전인 1988년 10월5일 국정감사 보고에서 “군 정보기관의 정치적 중립화 방안의 하나로 보안사의 업무를 재정립, 민·관에 대한 정보 수집 활동을 지양하고 군 내부의 대간첩 작전, 정부 전복 정보 수집 활동으로 그 임무를 조정하기로 했다”고 공식 발표한 바 있었다.
드러난 군 민간인 사찰의 실상
-군인이 위장 경영하는 호프집과 잡지사
국방부 김지욱 대변인이 기자회견을 갖고 윤석양 이병이 언론사에 공개한 자료는 "적으로부터 주요인물을 보호 및 차단하기 위해 보안사가 작성한 것"이라는 내용의 공식발표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윤 이병의 폭로 다음 날 국방부 김지욱 대변인은 기자회견을 열고 윤석양 이병이 <한겨레>에 공개한 자료는 “적으로부터 주요인물을 보호 및 차단하기 위해 보안사가 작성한 것”이라며 정치적 목적은 없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신상자료의 작성 기준을 ‘적이 접근하기 쉬운 사람’으로 잡았으며 이미 밝혀진 1300여 명 이외에 정부 요인이나 여당 의원 등에 대한 자료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1990년 보안사 양심선언 관련해 보안사가 경영해온 것으로 밝혀진 서울 관악구 신림본동 카페 '모비딕' 입구. <한겨레> 자료 사진.
하지만 “정치적 목적은 없다”던 군의 해명과 현실을 달랐다. 당시 <한겨레>는 윤 이병의 증언을 토대로 보안사가 민간인 정보 수집을 위해 위장 술집을 경영하고 있는 사실을 추가로 확인했다.
서울 관악구 신림본동 서울대 부근에 있는 ‘모비딕’ 카페가 그곳이었다. 술집은 서울대 부근에 있어 학생 및 직장인들의 출입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 지배인은 보안사 현역 장교였으며, 웨이터까지 모두 보안사 서빙고분실에서 파견한 사병으로 배치했다.
술집 사람들은 <한겨레> 취재진의 신분 확인 요구를 거부했고, 이후 철제문을 내린 채 영업을 중단했다.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위한 치밀한 위장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윤 이병의 증언을 통해 보안사가 정보 수집 등의 목적으로 잡지사도 경영해온 사실이 추가로 드러났다.
보안사가 발행해온 <현실초점>. <한겨레> 자료 사진.
보안사가 발행처를 위장한 채 펴낸 시사종합지 <현실초점>은 발행인과 편집국장, 여성 직원들까지도 모두 보안사 소속 군무원으로 확인됐다. 윤 이병은 “기자 신분을 이용해 취재원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이점이 있는 것도 잡지 발행의 목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현실초점>은 국립도서관과 국회도서관 등 여러 도서관에 배포했다. 잡지는 재야의 주장과 운동권 학생들을 비난하는 우익보수적인 내용의 글을 주로 실려 있었다. 윤 이병은 증언에서 “이 잡지에 기고된 글 가운데 상당수는 보안사 군무원들이 가명을 사용해 쓴 글들”이라고 밝혔다.
전국적으로 일어난 ‘노태우 퇴진’ 규탄대회
노태우 정부는 ‘보통 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를 앞세웠다. 이 시절 보안사 불법사찰을 폭로한 윤석양을 비롯해 이문옥 이지문 등 ‘보통사람들’의 내부고발이 잇따랐다. <한겨레> 자료 사진.
정치인·교수·언론인·종교인 등 사회 각계 인사로 구성된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파장은 거셌다.
급기야 미국 <뉴욕타임스>까지 ‘한국 군부의 민간인 사찰’을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10월8일 “정치인을 비롯해 저명한 사회 인사들에 대한 군 정보기관의 정치사찰은 한국에서 정치적 태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윤 이병이 폭로한 기록을 전하면서 “군의 정치적 개입을 계속 부인해온 노태우 대통령의 주장을 뒤엎는 첫 번째 증거인 것 같다”고 밝혔다.
윤석양 후원사업회 회원들이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앞에서 지나는 시민들로부터 한국군의 민주개혁과 양심선언자 명예회복을 촉구하는 서명을 받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노태우 정부에 대한 여론의 손가락질은 점점 거세졌다. 그러자 노 전 대통령은 국방부장관과 보안사령관 경질이라는 면피용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신임 국방부장관은 취임식 직후 윤 이병의 보안사 사찰 자료 폭로에 대해 언급하면서 “윤 이병의 행동은 아버지를 고발한 꼴”이라면서 “보안사의 고유 임무 및 기능이 약화돼서는 안 된다”고 말해 국민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야권은 ‘사찰’ 공동조사위를 구성, 범국민 서명에 나서며 정국 대치가 장기화할 전망을 보였다. 재야단체의 농성을 포함해 ‘보안사 사찰’을 규탄하는 시민들의 시위도 전국 곳곳에서 열렸다.
보라매공원에서 열린 국민규탄대회에서 윤석양 이병의 큰누나 석례씨가 동생 대신 참석해 연단에 나서 보안사를 규탄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규탄대회는 보안사 항의 방문과 농성·단식, 대학가 시위 등이 중심이 됐다. 국민들은 “해체 보안사, 퇴진 노태우”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집회에는 폭로 당사자인 윤 이병을 비롯해 사찰 대상자에 오른 당시 민주당 노무현 의원과 이철, 이부영, 신창균 의원 등 수많은 재야 인사들도 참석했다.
하지만 노태우 정권은 국민의 이같은 요구에 무력으로 맞섰다. 경찰은 명동성당 등 도심지 곳곳을 원천봉쇄하고 보안사 앞에서 시위하는 국민 50여 명을 강제 연행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무차별 구타가 이어져 여러 명의 시민이 머리가 찢어지는 등의 상처를 입고 병원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이름만 바꾼 국군기무사령부
사회적 비판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자, 노태우 전 대통령은 보안사의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국군기무사령부(이하 기무사)’로 이름을 바꾼다. 하지만 기무사가 된 뒤에도 군은 민간인에 대한 사찰을 계속 이어나간 것으로 밝혀졌다.
보안사가 기무사가 된 지 고작 3개월 여가 지난 1991년 3월18일, <한겨레>가 입수한 ‘긴급 내사의뢰’란 제목의 공문을 보면, 기무사는 군 복무를 끝낸 복학생 2명을 포함한 운동권 학생 6명과 운동권 출신 군입대자 6명 등 12명을 ‘의식화 용의자’라고 밝히고 철저하게 관리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논란이 일자 노태우 정부는 “군 와해 공작 대비하기 위해서는 민간인 사찰이 불가피하다”고 변명했다. 기무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당시 국방부가 발표한 “민간인에 대한 불법사찰 등을 하지 못하도록 부대의 기구와 인원을 축소하고 임무와 기능을 전면 개편하겠다”는 약속이 결국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 셈이다.
청산하지 못한 적폐 청산으로 인해 기무사는 이후에도 국민을 향해 무소불위를 휘두르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2010년 '국군의날 행사'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 기념사를 하고 있는 모습.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18년 뒤인 2008년 이명박 정부는 기무사를 동원해 선거 개입과 여론 조작을 위해 조직적인 정치 댓글 활동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2014년 박근혜 정부에서는 세월호 유가족 등을 사찰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 주도로 계엄을 실행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의혹이 불거진 기무사 계엄 문건은 ‘전시 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왼쪽)과 이를 설명하는 ‘대비계획 세부자료’로 나뉜다. 수사단은 ‘전시 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의 원래 이름이 ‘현 시국관련 대비계획’이라고 밝혔다. 원래 제목이 설명 자료의 제목 과도 부합한다. <한겨레> 자료 사진.
특히 박근혜 정부는 탄핵정국에서 계엄령을 검토해 실행계획 문건까지 작성했다. 기무사가 직접 작성한 이 문건에는 ‘탱크로 거리에서 불특정 시민을 진압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어 충격을 안겼다.
경기도 위치한 국군기무사령부.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이런 역사를 뒤로하고 기무사는 지난 9월1일 27년 만에 해체, 재편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8월14일 국무회의에서 “기무사가 계엄령 실행 계획을 준비했다는 사실은 국민들에 매우 큰 충격을 주었다”며 “범죄 성립 여부를 떠나 기무사가 결코 해서는 안 될 국민 배신행위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어떤 이유로든 새로 창설된 국가안보지원사령부가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국민들께 약속드린다”고 밝혔다.
27년 만에 대대적인 재편을 거친 국가안보지원사령부는 다시 한 번 어두웠던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했다. 이번에야말로 ‘오직 국민의 안보를 위한’ 군으로 거듭나겠다는 약속을 지켜낼 수 있을까?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