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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이번 추석 가족호칭 바꾸기 도전, 전원 실패!

등록 2018-10-06 10:57수정 2018-10-06 11:22

[토요판] 르포
가족 호칭 개혁 ‘실패기’
추석에 한복을 입고 둘러앉은 여성들이 송편을 빚고 있다. 이들 역시 누군가의 시어머니, 외할머니, 새아기, 에미, 동서, 처제, 아가씨로 불린다. 연합뉴스.
추석에 한복을 입고 둘러앉은 여성들이 송편을 빚고 있다. 이들 역시 누군가의 시어머니, 외할머니, 새아기, 에미, 동서, 처제, 아가씨로 불린다. 연합뉴스.

▶추석 직전 <한겨레> 토요판 커버스토리 ‘며느라기를 위한 호칭은 없다’에서는 성차별적인 가족 호칭 때문에 불편함을 느껴온 며느리들이 이번 추석, 자신부터 호칭 개혁에 나서보겠다고 결의를 다진 ‘격정방담’ 내용을 중계했습니다. 일단 자신의 가족 안에서부터 변화를 도모해보겠다던 이들은 성공했을까요? 추석연휴가 끝난 뒤 다시 물었습니다.

결말부터 말하자면 모두 망했다. 추석을 일주일 앞둔 16일 밤, 단체 채팅방에 모여 “이번 추석에 우리 가족부터 성차별적 호칭 바꿔보겠다”고 벼르던 6명의 여성들은 제각각 철저하게 패배했다. (<한겨레> 9월22일치 1·3·4면 커버스토리 ’이번 추석엔 아가씨, 도련님부터 바꿔볼래요’ 참조) 남편이 “형수님, 앞으론 절 ‘도련님’이라 부르지 마세요”라고 말할 계획이라던 이도, 자신의 ‘새언니’에게 “절 더이상 아가씨라 부르지 마세요”라고 하겠다던 이도 성과를 묻는 질문 앞에 고개를 떨궜다. 추석 뒤 다시 열린 단체 채팅방에는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고군분투기만 넘쳐났다.

“도련님한테 어떻게 말을 놔요”

“어우, 어떻게 도련님 이름을 불러요.”

‘며느리도리도리’(기사에 썼던 별명, 38살, 결혼 4년차, 이하 ‘도리’)는 ‘형님’(남편 형의 아내)의 거친 손사래를 보며 비로소 자신의 작전이 ‘씨알도 먹히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 순간을 위해 언제 어디서 어떤 표정으로 뭐라 말할 것인지 추석 한달 전부터 치밀하게 시나리오를 짰던 도리와 그의 남편은 식은 땀을 흘렸다.

실패를 확정짓 듯, 형님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어떻게 도련님한테 이름을 부르고 말까지 놔요. 됐어요. 대신 동서한테는 말 놓잖아, 그치 동서?” 연상연하 커플인 ‘도리’ 부부는 남편은 형수보다 4살 아래, 도리는 1살 아래였다. 그런데 남편(시동생)에겐 존대가, 아내(동서)에겐 반말이 당연하다는 형수님의 단호한 입장! 친정에서는 도리보다 4살 위인 형부(언니의 남편)가 처제인 자신에게 너무도 편하게 말을 놓는데… 왜 모두 여성인 도리만 편한걸까?

도리 부부의 애초 계획은 이랬다. 이번 추석에 남편이 형수(형의 부인)에게 “형수님, 앞으로는 저한테 도련님이라 부르지 마시고 그냥 편하게 이름 부르세요. 존댓말도 하지 마시고 그냥 편하게 반말 하시고요”라고 하기로 했다. “남편의 동생은 도련님·아가씨, 아내의 동생은 처체·처남이라 불리는 것은 성차별적”이라는 아내 말에 수긍한 데다 지난 명절에 한 집안 어른이 형수에게 “왜 시동생이 결혼했는데도 도련님이라 부르느냐, 서방님이라고 불러야지”라고 혼내는 모습을 보고 아연실색한 남편의 결단이었다. 남편은 “남자인 내 입장에서도 도련님, 서방님 같은 호칭은 불편하다”고 했다.

하지만 결혼 뒤부터 지금껏 자신보다 4살 어린 시동생에게 꼬박꼬박 존대하며 도련님이라 불러온 형수는 단호했다. “도련님이라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해요. 처제나 처남에 대응하는 무슨 용어라도 있으면 부르겠는데… 그리고 어른들 앞에서 시동생 이름을 그냥 어떻게 불러요.” 결국 어른들의 눈치가 보여 당사자가 괜찮다고 해도 호칭을 내려놓기는 부담스럽다는 것이었다. 도리는 “안 그래도 어른들 눈치보여 형님이 거절하실까봐 다들 모인 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는데 시가에 도착하자마자 어른들 분위기가 별로 안좋기에 형님에게만 말한 것이 문제였다”고 뒤늦게 패인 분석에 나섰다. 손사래 뒤 머쓱해진 도리의 형님은 연휴 기간 내내 아예 ‘도련님’(도리의 남편)을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괜찮아요” 새언니의 싸늘한 문자

“이제 익숙해서 괜찮아요, 아가씨.”

‘새언니’(오빠의 부인)의 거절이 담긴 문자메시지에서는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F급며느리’(38살, 결혼 4년차, 이하 ‘F급’)는 이번 추석, ‘아가씨’와 관련해 두 가지 결심을 했다. 첫째, 추석에 시가에서 아가씨(시누)와 마주치지 않도록 일찍 나와 친정으로 간다. 호칭 때문에 불편할 틈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다. 둘째, 친정에서 그동안 나를 아가씨라 불러온 새언니에게 “이제 저를 아가씨라 부르지 마시고 그냥 편하게 이름을 불러주세요”라고 말한다.

첫번째 목표는 완수했다. 추석 아침 재빠른 몸놀림으로 시누이의 친정 도착 전에 시가를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두번째 목표는 어림 없었다. 2단계 계획을 수립해 우선 ‘새언니’에게 성차별적 가족 호칭에 대해 다른 여성들과 온라인 대담을 나눈 <한겨레> 토요판 커버스토리의 기사 링크를 보냈다. 앞으로 자신이 할 제안에 대한 이해를 돕는 동시에 잠시나마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새언니, 이제 저한테 아가씨라 부르지 말고 그냥 이름 불러주세요. 말도 편하게 하시고요”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돌아온 건 “이젠 익숙하다”는 문자였다. F급은 새언니의 체념을 이해했다. “제가 문자메시지로 해서 이 정도였지 만약 가족들 앞에서 얘기했으면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시아버지’인 저희 아빠가 한소리 했지 않나 싶어요. 그런 시아버지의 며느리인 새언니도 그걸 안 거죠. 에효.” 이번 추석, F급며느리는 시가에서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나지 않기, 여자만 전 부치지 않기 등의 다른 목표들을 달성했지만, 호칭개혁 관련 변화는 전혀 일구지 못했다. 그는 “익숙해지기 전에 진작 제안했어야 했는데… 새언니의 입장에서 조금 더 일찍 생각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

추석 전 토요판 커버스토리 통해
가족 호칭 개혁 다짐했던 여성들
추석 때 만난 가족에 제안했지만
‘도련님’, ‘아가씨’ 바꾸기 실패

시어른 눈치보는 형님, 새언니
“어떻게 도련님 이름을 부르냐”
호칭 둘러싼 견고한 권위의 성벽
나홀로 ‘투사’ 돼선 쉽게 못바꿔

결혼하자마자 ‘아가야’, 아이 낳자마자 ‘에미야’라고 자신을 부르는 시부모님 앞에서 이름을 찾고 싶다던 '내이름은김삼순'(38살, 결혼 8년차)은 편찮아서 입원하신 시어머니 앞에서 이번 추석,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에미’의 본분을 다했다고 전했다. 사회 구성원이 대부분 따르는 지배적인 가족 호칭이 있는 상황에서 개인적으로 호칭 개혁을 도모해보는 일은 마치 권위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편찮으신 시어른들 앞에서 꺼낼 이야기가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추석 연휴에 시아버지 생신이 겹친 ‘나도명절엔서방이고싶다’(34살, 결혼 9년차)는 가족 여행 제안을 거절한 시아버지 덕분에 시가에서 먹고 먹고 또 먹는 긴 명절을 보냈다. 밤새 귀향길을 달리고 도착한 시가에서 새벽 5시에 일어나 비몽사몽 일한 '내가종부라니'(37살, 결혼 11년차)는 “시가에 사촌 시동생들이 많은데 죄다 20대”라며 “도련님 호칭이 난제”라고 한숨지었다.

내년에는 대체 호칭 나올 듯

도련님, 아가씨, 외할머니, 에미야 등 가족 호칭을 바꾸려는 시도는 얼핏 크게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한번이라도 도전해본 이들은 이 관습이 얼마나 견고하고 높은 성벽인지 알게 된다.

김하수 전 연세대 교수(국문학과)는 바로 이 ‘견고함’의 뿌리를 뒤흔들지 않고는 작은 변화도 일구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한다. “보통 호칭이란 것은 한번 바뀌면 정신없이 바뀌기도 한다. 여성들이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흐름도 얼마 안 됐다. 하지만 현재 논란이 되는 성차별적 호칭의 경우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가 덧씌워져 있어 여간해서는 바뀌지를 않는다. 가족 호칭의 문제는 남성 중심 성씨 제도, 조상숭배, 가부장제 등이 칡넝쿨처럼 엉켜 있는 문제다. 단순한 호칭 문제로만 접근하면 나이 많은 어른들은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화내고, 개혁에 나선 여성들만 괜히 ‘투사’를 만들고 만다. 성차별적 호칭을 정말 바꿀 생각이라면 그 뒤에 있는 한국 가족 제도의 문제를 보고 뿌리를 흔들어야지 시시하게 건드려서는 안된다.”

‘투사’가 되어 개인적으로 호칭 개혁에 나섰다가 처참한 실패를 맛본 이들은 정부가 발표했던 ‘성차별 호칭 개선 작업’이 어디까지 와있는지 궁금해 했다. 지난 8월31일 여성가족부는 ‘제3차 건강가정기본계획’에 성차별적인 가족 호칭 문제를 개선하겠다는 내용을 추가하겠다고 발표했다. 여가부는 이후 국립국어원과 함께 회의를 열어 올해 안으로 호칭어에 관한 연구 결과를 내놓고 이후 전문가와 국민 의견을 수렴해 내년에 대책을 발표한다는 대강의 일정을 짜놓은 단계다. 국립국어원은 지난해 실태조사를 통해 도련님, 아가씨 등 성차별적 호칭으로 인해 국민들의 불편이 크다는 결과를 얻은 뒤 현실에 맞게 <표준언어예절>을 손질하는 방안에 대해 연구 작업을 해오고 있다. 특히 호칭어, 지칭어에 집중한 연구다. 여가부 청소년가족정책실 관계자는 “기존에 사용하던 용어를 국가에서 쓰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문제라 그 부분을 고려하면서, 성별 비대칭 문제가 발생한 호칭에 대해 대체할 수 있는 적절한 용어를 만드는 작업을 진행해 내년에는 이 용어들을 발표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실제 호칭 개선 연구 작업의 주무를 맡게 된 셈인 국립국어원도 고민이 깊다. 국립국어원 관계자는 “국립국어원이 1992년 <표준화법>과 2011년 <표준언어예절>을 통해 정리한 호칭어는 국민들이 이렇게 사용하고 있다 정도의 의미인데 이게 교과서와 언론매체에 실리고 시험 문제에 나오고 하다 보니 ‘정답’이 되어버린 상태”라며 “이미 도련님, 아가씨가 정답이라고 믿는 어르신 세대가 있으니 전통과 현실을 아울러야 한다는 점이 고민”이라고 말했다. 여가부는 앞으로 국립국어원 뿐만 아니라 차별 용어 개선 작업에 적극적이었던 서울시 등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부처, 기관, 지방자치단체 등과 논의를 함께 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천천히 바꾸라고? 익숙해지면 어쩌지?

올해 초에 연재를 마쳤던 인기 웹툰 <며느라기>가 이번 추석에 추석특별판으로 돌아왔다. 평범한 직장인 민사린이 결혼한 뒤 겪게된 불평등한 ’며느리의 삶’에 대한 고찰로 인기를 끌었던 이 웹툰의 이번 주제는 ‘명절에 시가, 처가 방문 순서 바꿔보기’였다. 말하자면 개인적인 개혁에 나선 것이다. 이번 추석에는 처가 먼저 갔다가 차례를 지낸 뒤 시가에 가기로 한 민사린 부부는 어찌어찌하여 방문 순서를 바꿔보는데는 성공했으나 여성들은 부엌, 남성들은 소파에 있는 풍경은 반복된다. 그 모습을 보며 민사린은 친정엄마의 말을 떠올렸다 “느린 것 같아도 세상은 조금씩 변하고 있어. 바뀌더라도 천천히 바뀌어야 탈이 없는거야." 민사린은 혼잣말을 한다. "정말 그럴까? 탈이 나지 않도록. 그렇게 천천히 조금씩 익숙해지면 어쩌지?

기운 빠지는 결말을 알렸지만 그래도 작은 희망은 남겨두어야겠다. 채팅 참여자들은 이번 추석의 호칭 개혁 시도가 부질 없었다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형수님의 반응을 보고 나니 ‘도련님’이라는 말이 더 싫어졌다는 도리의 남편은 이번 실패를 발판삼아 다음 명절에는 꼭 어른들이 모두 모인 상태에서 “형수님, 이제 제게 도련님이라 하지 마세요”란 말을 다시 꺼내겠다고 다짐했다. 삼순도 시어머니 건강이 조금 나아지면 자신을 ‘에미’라 부르지 말아달라고 다시 한번 부탁해볼 생각이다. 또 이들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관련 정책에 대해 직접 목소리를 내는 단체인 ‘정치하는엄마들’에서 ‘바른이름’이란 소모임 활동을 통해 성차별적 용어 개선 작업을 계속 해나갈 계획이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추석을 앞두고 서울역에서 기차에 오르는 이들의 모습.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추석을 앞두고 서울역에서 기차에 오르는 이들의 모습.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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