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억 원대 뇌물수수와 350억 원대 다스 횡령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명박 전 대통령이 5월23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첫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명박 전 대통령(MB)은 지난 5일 1심 판결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벌금 130억원과 추징금 82억원도 함께 선고됐다. “다스는 엠비 것”이라는 검찰의 결론이 맞았다. 11년 만에 의혹은 사실로 판명됐다.
하지만 불과 1년 전만 해도 상황은 전혀 달랐다. 갖은 의혹으로 여론이 들끓었지만, 검찰은 수사에 확신을 갖지 못했다. 여러 이유를 대며 미적거렸다. 한때 수사를 아예 접을 뻔한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었다. 그러다 결정적 제보가 검찰에 날아들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수 없는 몇 번의 반전이 이 전 대통령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직권남용? “안 된다”
원래 검찰이 꼽았던 ‘적폐수사’ 리스트에 이 전 대통령은 들어 있지 않았다. 장기간 계속된 국정원 수사로 검찰이 ‘진’을 뺀 탓도 있지만, 커지는 의혹에 비해 증거가 미약하다는 판단이 깔려 있었다. 당시 검찰 관계자는 “다스는 (새로) 들여다볼 여지가 없다. 10년 이상 제기된 의혹”이라며 “어떻게 뼈 바르듯 하겠냐”고 반문했었다. 2007~2008년 사이 ‘선배’ 검찰과 비비케이(BBK) 정호영 특검이 이 전 대통령에게 발부해준 면죄부도 ‘후배’ 검찰의 발목을 잡았다. 검찰의 다른 관계자는 “엠비는 판도라의 상자다. 수사 여력도 없다. (그러니) 상자는 열지 말고, 가급적 고발에 한정해서 수사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적극적이지 않았다.
10월 중순께 비비케이 주가조작 사건의 피해자인 장아무개 옵셔널캐피탈 대표가 이 전 대통령을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처음으로 이 전 대통령이 ‘피의자’로 적시된 사건이다.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1부가 맡아서 기초 검토에 들어갔다. 당시 검찰 관계자는 “제기된 의혹 중에서 그게 그래도 가장 가능성이 있겠다 싶어 기대를 걸었다”고 했다. 그러나 검토 결과는 ‘죄가 안 된다’로 나왔다. 주례보고 자리에서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 문무일 검찰총장에게 같은 내용을 보고했다. 두 사람은 “어쩔 수 없다. 둘이 나눠서 욕을 먹더라도 여기서 털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냈다고 한다.
“의혹은 전부 사실이다”
이번엔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이 전 대통령을 횡령·조세포탈 등 여러 혐의로 고발했다. 지난해 12월7일의 일이다. 고발 대상엔 비비케이 사건 정호영 특검도 포함됐다. 그날 검찰 관계자는 “고발장 들어왔다고 칼춤 출 일 아니다. 토끼몰이하면 역효과가 난다”고 했다. 그러고는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에 배당했다. 검찰 안에서도 “왜 특수부가 아니라 형사1부인지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이 나왔다. 검찰의 소극적 태도는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변호사에게서 결정적인 제보가 날아든다. 이 전 대통령과 관련한 여러 의혹, 특히 재임 전후 청와대에서 일어난 일을 소상히 진술할 증인이 있다고 했다. 그 전말은 이랬다.
앞서 그해 10월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부장 이진동)는 서울 서초동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흉기에 찔려 숨진 한 연기자의 남편이 청부살해를 당한 것이라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경찰에서 우발적 살인으로 송치한 사건을 검찰이 끈질긴 수사 끝에 뒤집은 것이다. 검찰에 빚을 졌다고 생각한 피해자 쪽 변호사는 평소 ‘친구’에게 들은 얘기를 검찰 간부에게 그대로 전달했다. 이명박 청와대에서 의전비서관·제1부속실장을 지낸 이 전 대통령의 심복 김희중씨가 그 변호사의 ‘친구’였다. “엠비 수사의 결정적 장면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바로 그 제보다.”(검찰 핵심 관계자)
다만 해당 변호사는 이날 <한겨레>와 통화에서 “내가 검찰에 제보했다는 검찰 관계자의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김희중 전 실장이 검찰 수사를 받는다는 사실은 김 전 실장 압수수색이 있던 날 처음 알았다. 그날 변호인 자격으로 검찰 청사에 들어가 김 전 실장을 만나고 나서야 수사 내용을 알았다. 김 전 실장은 제보자가 아니며 검찰에 소환됐을 때는 검찰이 이미 혐의 내용 대부분을 파악하고 있어서 부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공소시효를 살려라”
검찰은 김 전 실장의 제보를 받아든 뒤에야 비로소 ‘가능성’을 찾았다. 그러나 갈 길이 멀었다. 이 전 대통령을 둘러싼 의혹의 ‘몸통’인 다스의 실체를 밝히지 못하면 수사는 실패할 것이 분명했다. 특히 공소시효가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이 ‘미션’은 서울동부지검에 별도로 꾸린 수사팀(팀장 문찬석)이 해결했다. 2008년 비비케이 특검 때 120억 비자금 조성(횡령)에 관여하고도 다스에 계속 다니고 있던 경리직원 조아무개씨를 추궁해 “엠비를 비롯한 오너 일가가 해먹은 제일 큰 비자금 덩어리”(검찰 관계자)를 찾아낸 것이다. “솔직히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동부 그 팀이 수사를 잘했다. 그쪽 수사가 성공하면서 서울중앙(지검)에서 찾아낸 다른 퍼즐 조각과 모자이크가 딱딱 맞춰졌다.”(검찰 핵심 관계자)
검찰 수사가 궤도에 오르자 김성우 전 다스 대표 등이 자수했다. 김희중 전 부속실장의 진술을 토대로 국정원 특활비 수사도 빠르게 진척됐다. 궁지에 몰린 김백준 전 총무기획관은 ‘다스 소송비 삼성 대납’ 사실을 실토했다. 이학수 전 삼성 부회장이 나와 이를 인정했다. 측근들이 무너지면서, 수사는 일사천리였다.
뇌물 혐의 수사의 백미는 이팔성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이었다. 그는 수사팀이 압수수색을 나갔을 때 때마침 ‘엠비 메모’를 입에 넣은 채 씹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말리는 과정에서 한 수사관이 이 전 회장에게 손가락을 물려 전치 3주의 교상을 입기도 했는데, 결국 ‘엠비 일가의 모든 치부’를 적은 비망록이 검찰의 손에 들어왔다.
검찰 핵심 관계자는 7일 “엠비 수사를 돌아보면 ‘운칠기삼’이었다”며 “엠비는 검찰이 수사를 잘해서라기보다 ‘주변 사람’ 관리에 실패함으로써 몰락을 자초했다”고 평했다.
강희철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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