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이은미가 지난 5일 오후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열린 사형제도 폐지 명예대사 위촉식에서 소감을 말하고 있다. 이은미는 소감을 말하던 중 피해자의 가족에 대한 위로의 말을 전하며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가수 이은미씨가 인터뷰석에 앉아 흰색 에이포(A4)용지 두 장을 꺼냈다. 종이에 사형제 폐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깨알같이 적어 놓은 게 보였다. “말주변이 없어서 조금 참고하면서 할게요.” 쑥스럽다는 듯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압도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며 무대를 장악하는 ‘맨발의 디바’는 온데간데없었다.
지난 5일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 사형제 폐지 명예대사로 위촉된 이씨는 인터뷰 내내 신중한 모습이었다. 이날 위촉식이 끝나고 서울 중구 저동1가 인권위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만난 이씨는 “(사형제 폐지에 대한) 100% 확신이 있어서 명예대사직을 수락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마음속으로 치열하게 고민하는 게 사실”이라고 했다. “인권위의 명예대사 제안을 받고 2주 정도 고민한 것 같다”고도 털어놓았다. 그 말을 증명하듯 이씨는 인터뷰 내내 단어 선택 하나하나에 조심스러워했다. 때로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고, 가져온 메모를 들춰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인간으로서 상상하지 못할 범죄를 저지른 이를 용서할 수 있을까, 내면적으로는 갈등이 생기죠. 그럼에도 국가가 범죄자의 죗값으로 그의 생명을 받는 제도가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가해자의 목숨을 빼앗는 것만이 그 사람을 벌하고 피해자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일은 아닐 거예요. 이제는 많은 분과 함께 다른 방법도 고민해봐야 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씨가 힘주어 말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꽤 오랜 시간 사형제 폐지에 목소리를 내온 인물이다. 공식 석상에서 발언은 없었지만, 2001년 천주교 사형제 폐지 콘서트에 참석하는 등 노래로 사형제 폐지에 힘을 실어왔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등 사회문제에 꾸준하게 목소리를 내온 이씨에겐 사형제 존폐 문제도 오랜 시간 관심사 중 하나였다고 했다. 1975년에 있었던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게 계기가 됐다.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용공조작사건으로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있고 만 19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돼 ‘사법 살인’으로 불렸던 일이다. 이씨는 “인혁당 사건 같이 한국 근현대사의 아픈 일들을 인식하면서부터 사형제도에 관심을 갖게 됐으니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셈”이라며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신영복 교수님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일련의 안타까운 일들을 보며 더는 같은 일이 벌어져선 안 된다고 생각으로 관심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가수 이은미가 5일 오후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사형제도 폐지 명예대사 위촉식을 마친 뒤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그는 이런 정치적 판결이 언제라도 재현될 수 있다는 걱정을 좀처럼 놓을 수 없다고 했다. “양승태 대법원의 재판거래 사태를 바라보면서 사법부가 누군가의 이해관계에 따라 고의로 오판을 할 수도 있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조직을 지키기 위해 대법원이 증거 자료를 삭제한 일도 있었다고 하잖아요. 근데 최후의 보루라는 대법원까지 흔들린다면 믿을 수 있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실제로 미국에서는 연방대법관을 ‘저스티스(정의·Justice)’라고 부른다는데, 최근 우리나라 대법원의 재판거래 정황들을 바라보면서 (대법원을) 의심하게 되고, 한편으론 불안한 것도 사실입니다.”
사형제 폐지의 ‘얼굴’로 활동하는 게 걱정되진 않았을지 궁금했다. 인권위가 발표한 국민인식조사를 보면, 단순히 사형제에 대한 ‘찬/반’을 물었을 때 응답자의 약 80%가 사형제 폐지에 반대한다고 응답했다. 흉악범죄에 관한 기사 댓글 창엔 ‘사형시키라’는 댓글이 많은 추천을 받기도 한다. “사형제 폐지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기 때문에 주변에서는 ‘왜 사서 욕을 먹냐’는 걱정도 받았다”는 그는 “대중을 상대로 하는 직업을 가졌지만 저도 똑같은 생활인이고, 살아가는 세상을 함께 더 낫게 만들고 싶다는 고민을 많이 하기 때문”에 결국 사형제 폐지에 앞장서게 됐다고 답했다. “물론 피해자 가족들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감히 어떻게 알겠어요. 저 또한 사형제 폐지를 두고 지금까지 이성과 감성이 치열하게 다투고 있고, 많이 고민이 됩니다. 하지만 다른 의견을 가진 분들을 설득하면서 저 또한 피해자와 그 가족분들을 위해 사회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공부하고, 또 많은 분과 함께 고민해보고 싶은 마음이 커서 명예대사로 활동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범죄 피해자와 그들의 가족에 대해 언급하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지난 6월 인권위는 세계 인권의 날 70주년인 오는 12월10일에 문재인 대통령의 사형제 모라토리엄(중단) 발표를 목표로 하겠다고 밝혔다. 한국은 1997년 12월 이후 약 20년간 사형집행을 하지 않은 ‘사실상 사형제 폐지 국가’지만, 사형집행을 두고 공식적으로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적은 없다. 이씨는 “인권위 사형제 폐지 명예대사로서 문 대통령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냐”는 기자의 질문에 “더 큰 선이나 공익을 위해 쉽지 않은 판단을 해야 하는 자리가 대통령의 자리라고 생각한다”며 “쉬운 결정은 아니겠지만 국가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현명한 판단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신민정 정환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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