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측의 200억t 물 공격으로 인해 여의도 63빌딩이 잠기는 걸 막아야 하는 목적으로….”
오늘로부터 13년 전인 2005년 10월19일, 1987년 공사를 시작한 ‘평화의 댐’이 18년 만에 완공됐다.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에 위치한 평화의 댐은 1986년 북한의 금강산 발전소 착공이 계기가 되어 건설을 시작했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북한의 금강산 발전소가 건립되면 서울 시내 3분의 1이상이 침수된다는 이른바 ‘서울 물바다론’을 내세웠다. 그러면서 대응 댐 건설은 민족 생존을 위한 최상의 자구책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전두환 정부가 앞장선 북괴 수공 여론전은 온 국민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여기에 언론의 흥분까지 더해졌다. TV에서는 댐 건설 성금 모금 생방송이 열렸고, 관련 소식은 어김없이 일간지 1면을 장식했다. 아울러 평화의 댐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앞다퉈 TV에 출연해 댐 건설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평화의 댐 건설은 범국민추진위원회 창립과 모금 배지 달기 대회, 홍보물 공모 등 사회적 운동으로까지 추진됐다. 그 결과 코흘리개 아이부터 교도소 재소자들에게까지 수백억 원의 국민 성금을 거둬들였다. 물론 수천억대의 세금도 추가로 투입됐다.
평화의댐 건설공사에 사용됐던 불도저, 펌프카 등 중장비 17대가 공사현장에서 3km 떨어진 양주군 방산면 천미리 민통선 북방 백석산 숲속 은폐된 곳에 버려져 5년째 방치되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하지만 평화의 댐 건설을 향한 전두환 정부의 갖은 ‘정성’에도 불구하고 댐 건설은 착공에서 완공까지 무려 18년의 세월이 걸렸다. 평화의 댐 착공 6년여 만인 1993년, 전두환 정권의 평화의 댐 건설 선동이 국민을 우롱한 ‘사기극’으로 판명됐기 때문이었다. 평화의 댐 사건은 당시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 걸친 부도덕함과 왜곡된 민주주의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북한의 88올림픽 방해와 서울 물바다의 야욕?
평화의 댐 건설이 처음 제기된 건 88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둔 1986년 말이었다. 그러니까 1986년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국민적 요구가 거세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권력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었던 전두환은 개헌 요구에 대한 관심을 돌리기 위한 ‘사건’이 필요했다. 언제나 그랬듯 ‘북풍’ 만큼 쉽고 강력한 국민 선동 소재도 없었다.
전두환 독재 정권에 항의하는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 투쟁연합(애학투련)’의 항쟁이 일어나기 하루 전인 1986년 10월27일, 당시 건설부장관은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 측이 금강산 댐 건설을 극비리에 강행하고 있다”며 이는 “단기적으론 88서울올림픽을 방해하고 장기적으로는 수공 침략을 통한 적화통일을 이루겠다는 야욕을 드러낸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어 전두환 정부는 금강산 댐의 대응으로 댐 건설 기간 8~9년에 댐 높이 200m, 공사비는 6000억 원으로 잡고 평화의 댐 건설을 확정했다.
평화의 댐 건설 기공식 현장.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전두환 정부가 발표한 북한의 금강산 댐은 200억t이라는 엄청난 저수 용량을 갖추고 있었다. 이로써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댐이 붕괴할 경우 남한이 받는 피해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전두환 정부는 북한의 이 같은 수공전으로 초당 35만t씩의 물이 화천댐에 유입돼 서울을 비롯한 양구, 구리, 안양 등 13개 시·군을 물바다가 될 것이라 예상했다. 따라서 주민의 절대적인 생존권 보호와 국방을 위해서라도 막대한 공사비가 들어가는 대응 댐은 건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결국 개헌을 요구하던 야당과 국민의 요구는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평화의 댐 건설 대작전
‘북괴수공 봉쇄’를 위한 전두환 정부의 ‘전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언론을 동원한 여론전이었고, 두 번째는 건설비 충당을 위한 사회적 운동 추진이었다.
북한을 대상으로 한 여론전에 빠질 수 없는 단골 소재인 색깔론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전두환 정부는 북한의 금강댐 건설을 계기로 국민들도 다소 해이해진 반공의식을 가다듬고, 북한의 적화통일 야욕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라고 주문했다. 이런 내용을 담은 선전용 기사는 연일 뉴스에 도배되다시피 했다. 국민들은 평화의 댐 배지를 달고, 평화의 댐 노래를 부르면서 자칭 평화의 댐 전문가들의 TV 토론회를 지켜봐야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분위기는 자연스레 ‘구국을 위한’ 국민 모금으로 모이게 만들었다. 방송사마다 평화의 댐 TV 모금을 전국 생방송으로 실시했고, 일간지 1면에는 국민 모금 기사가 자리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은 “전 국민의 호응에 감명을 받았다”며 방송사에 성금으로 금일봉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렇게 국·내외 국민과 기업에서 거둬들인 모금액만 700억 원을 넘어 섰다.
외신의 평가는 달랐다
사전 준비 없이 강행된 평화의 댐 건설의 성격을 두고 논란이 일기 시작한 건 이듬해부터였다. 미국의 <워싱턴포스트>는 1988년 8월1일 치 기사에서 한국은 이미 조용히 사그라진 북한의 ‘물폭탄’위협으로부터 서울올림픽을 안전하게 치르기 위해 2억5000만달러를 들여 평화의 댐을 건설하고 있으나, 이는 아마도 불신과 낭비의 사상 최대의 기념비적 공사일 것이라고 보도했다.
평화의 댐 모금 배지 달기 대회.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신문은 평화의 댐 공사현장에서 보낸 기사를 통해 북한이 비무장지대 북쪽 북한강에 대규모 수력발전소 댐공사를 시작해 수십억t의 물을 고의나 사고로 방류할 경우, 서울은 물에 잠기고 수많은 인명이 희생된다는 한국의 주장을 보도했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는 북한의 댐공사를 중지하도록 외국에 요청했으며, 그 결과 세계 각 언론이 긴장했다고 전했다. 아울러 한국에서는 수백만이 참가하는 대중 집회가 열리는 등 ‘물 폭탄’이 뜨거운 국민적 화제가 되고 장관을 비롯한 많은 시인들이 북한의 댐 건설을 반대하는 시를 쓰고 심지어 노래까지 나왔다고 비꼬았다.
1단계 축조공사를 끝낸 '평화의댐'. 사진 위쪽이 상류지역이며 댐 왼쪽에 2개의 수문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 사진.
외신의 이런 평가에도 불구하고 평화의 댐은 1987년 2월28일에 착공돼 15개월 만인 1989년 5월27일 1단계가 완공됐다. 최대 저수량 29억t으로 한때 ‘동양 최대의 댐’이라 불렸던 소양강 댐의 공사 기간이 6년이 넘는 것을 고려하면 평화의 댐 공사가 얼마나 졸속으로 이뤄졌는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은 시정연설을 통해 “안보에 관한 전 국민적 공감대 형성에 주력하여 안보 기반을 견고히 해 나가겠다”면서 “북한의 수공위협을 막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은 올림픽을 방해하려는 북한의 도발 가능성에 대비하여 추진하도록 했다”며 자신의 치적을 자평했다.
하지만 평화의 댐 건설 2년이 지나도록 200억t 수공설의 금강산 댐 건설과 관련해서는 알려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전두환 정부는 북한의 금강산 댐 공사 현황을 가늠할 수 있는 항공사진을 은폐하려 했다. 당시 최동섭 건설부 장관은 1988년 8월16일 소집된 평화의 댐 건설 경위와 추진 현황 보고에서 국방부의 요청이라며 북한의 금강산 댐 현장에 대한 항공사진을 비공개 요청했다.
평화의 댐 건설 현장에 방치된 뒤 녹슬어 가고 있는 장비들은 삼환건설, 삼성건설의 표시가 되어 있으며, 일제 코마쓰, 독일제 쉬빙 등 최고급 외제 중장비로 당시 시가 50여억원에 이르렀다. <한겨레> 자료 사진.
결국 의혹만 키운 채 평화의 댐 건설은 착공 2년 만인 1989년 10월 중단됐다. 5공의 몰락과 함께 누구도 명확하게 댐 건설의 당위성을 설명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평화의 댐은 공사를 맡은 몇 개 재벌급 건설회사의 배만 불린 채 국민들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감사에서 드러난 대국민 사기극
평화의댐 건설 의혹과 관련해 1993년 6월29일 오전 현장검증에 나선 민주당 진상조사특위 의원들이 댐 건설 관계자들에게 현장 근처에 방치된 중장비에 대해 질의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잊혀가던 평화의 댐이 다시 주목을 받은 건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3년에 실시된 국정감사였다. 국정감사 결과 드러난 평화의 댐 사건 전모는 국민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1986년 당시 전두환 정부는 평화의 댐 건설을 추진하면서 북한의 수공 위협에 대한 정보를 조작했을 뿐 아니라 국민성금 모금을 시국 전환용으로 악용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평화의 댐 건설 추진 과정 최고 책임자는 전두환이었으며,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실무적 뒷받침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게다가 북한의 금강산 댐 규모는 당시 전두환 정부가 발표한 높이 215m, 저수량 200억t에 훨씬 못 미치는 121.5~155m, 수량은 21.2억~59.4억t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서울 시내 3분의 1이상이 침수된다던 ‘서울 물바다론’은 애초에 조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전두환은 평화의 댐 의혹에 대해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갖가지 만행을 저질러온 전력에 비추어 댐 건설 움직임의 숨겨진 의도가 무엇인가 따져보고 대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시국이 어려워졌다 해도, 있지도 않은 북한 위협을 날조해가며 1년 남은 정권을 유지해야 할 만큼 허약하고 부도덕한 정부는 아니었다고 믿는다”라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전두환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건 독재자의 욕심에 의해 많은 국민들이 희생양이 되어 ‘실체 없는’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는 사실이다.
1단계 완공 이후 방치되었던 평화의 댐은 2002년 보강공사를 거쳐 평상시에는 물을 가두지 않는 건류댐으로 완공되었다. 앞서 전두환 정부에서 2001억 원 (국민성금 707억 원+국비 1294억 원)의 공사비가 들어간 것과 별도로 약 3995억 원의 추가 예산이 필요한 공사였다.
참고문헌
<물밑의 하늘 평화의 댐 , 그 진실을 밝힌다 > 최재승
<동아일보 > 1986년 11월 21일 치 . 1987년 10월 3일 , 5일 치
<경향신문 > 1986년 11월 25일 , 26일 치 . 1987년 2월 25일 치
<매일경제 >1987년 2월 11일 치 . 1987년 3월 3일 치
<한겨레 >1988년 8월 3일 , 17일 치 . 1989년 10월 6일 치 1993년 6월 18일 , 8월 27일 , 9월 1일 치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사연표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