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앞에서 열린 검사 성폭력 사건 진상 규명 촉구 기자회견에서 한 참가자가 성폭력 고발 운동인 미투(Me Too) 캠페인의 상징인 하얀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안태근 전 검사나 최교일 자유한국당 의원이)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하면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에 대해서 위헌법률심판 소송을 해서 다퉈볼 생각입니다.”
-서지현 검사, 지난 1월 제이티비시(JTBC)와의 인터뷰에서-
사회 전반의 ‘미투 운동’을 촉발한 서지현 검사가 올 1월 상관인 안태근 전 검사의 성추행을 고발한 직후 언급해 화제가 된 법 조항이 있습니다. 바로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입니다. 서 검사는 왜 자신의 #미투 고발과 관련해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에 대한 위헌법률심판 소송을 할 의사를 밝혔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성폭력 가해자들이 자신을 고발한 ‘미투’ 참여자를 ‘역고소’할 때 종종 이 법 조항을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현행법상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가 포함된 명예훼손 관련 법 조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형법」
제307조(명예훼손) ①공연히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②공연히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제309조(출판물 등에 의한 명예훼손) ①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신문, 잡지 또는 라디오 기타 출판물에 의하여 제 307조 제 1항의 죄를 범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7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제310조(위법성의 조각) 제307조 제1항의 행위가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는 처벌하지 아니한다.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벌칙) ①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공공연하게 사실을 드러내어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②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공공연하게 거짓의 사실을 드러내어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다행히 서지현 검사는 안태근 전 검사에게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최근 자신의 성폭력 피해를 세상에 알렸던 ‘미투’ 고발자들이 가해자들로부터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를 당한 사건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미투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던 올해 상반기 동안 여론의 눈치를 보며 숨죽였던 가해자들이 지난 8월 안희정 전 지사의 1심 무죄 판결을 기점으로 역고소에 나서 성폭력 피해자들을 다시 고통에 빠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미투 운동에 대한 백래시(반격, 역풍) 현상인 셈입니다.
지난 2월 언론계 ‘미투’ 운동을 촉발한 전직 기자 변영건(26)씨는 지난달 8일 위 상자 안의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2항 허위사실 적시 혐의로 고소당했습니다. 변씨를 고소한 사람은 2015년 12월부터 2016년 4월까지 변씨가 근무했던 한 언론사의 부장급 기자로, 당시 변씨를 성추행했던 성폭력 가해자였습니다. 당시 자신이 겪은 성폭력 피해를 증명해 줄 목격자와 증거를 찾지 못했던 변씨는 가해자를 고소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변씨는 지난 2월 서 검사의 ‘미투’에 용기를 얻어 자신의 에스엔에스(SNS) 계정에 언론사 기자로 일하며 겪은 성폭력 피해를 고백하는 글을 게재했습니다. 변씨의 ‘미투’ 고발이 있었던 뒤 해당 언론사는 가해자의 성추행 의혹을 조사해 인사위원회를 열고, 지난 3월 정직 3개월의 중징계를 결정했습니다. 정직 3개월 징계 처분은 당시 이 회사의 사규상 ‘해고’ 다음으로 높은 수위의 징계였습니다.
지난 3월 자신의 에스엔에스에 학창시절 자신을 성추행한 ‘레슨 교사’를 고발했던 칼럼니스트 은하선(30) 역시 이달 7일 서울 마포경찰서로부터 변씨와 같은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은하선을 고소한 사람 역시 성폭력 가해자였던 ‘레슨 교사’였습니다. 은하선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2009년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해 1심까지 갔던 사건인데, 가해자도 당시 자신의 성추행에 대해 일부 시인했던 일”이라고 밝혔습니다.
수행비서 김지은씨에 대해 위력을 이용해 성폭력을 가한 혐의로 재판을 받은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공판을 마치고 나오면서 취재진에 둘러싸여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흥미로운 점은 변영건씨와 은하선의 경우처럼 성폭력 가해자 대부분이 피해자의 #미투 고발로 인해 자신의 명예가 훼손됐다며 역고소를 할 때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죄’ 혐의를 물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를 적용하는 것은 가해자 스스로 자신의 성범죄가 ‘사실’임을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의 #미투 고발이 ‘가짜’가 아님을 밝히면 끝나는 것 아니냐고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피해자가 ‘미투’ 고발 내용이 허위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겨우 밝혀내도, 가해자들에겐 앞서 말씀드렸듯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라는 ‘무기’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변호사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시죠.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는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죄’의 하위 구성요건이거든요. 다시 말해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죄’에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가 포함된 걸로 봐요. 물론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 여부를 놓고 따질 때 ‘성폭력 가해자가 유명인이다’ 또는 ‘피해자가 여러 명 있다’ 등 공공의 이익을 위해 가해자의 성폭력을 고발했다는 점을 소명하면 위법성이 조각(성립하지 않음)돼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죠. 그렇지만 성폭력 피해자 입장에선 사실을 말해도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좀 이상한 상황이 되는 거예요.”
-안지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 변호사-
“사실 수사기관 입장에서 허위사실이냐, 진실이냐 여부는 사건에 적용할 법 조항을 명확히 한다는 의미만 있을 뿐이에요. 그러니 성폭력 가해자가 역고소를 하면 일단 수사를 개시할 수밖에 없어요. 그 과정에서 허위사실 판단에 무게를 두기보다 피해자가 사실을 적시한 게 있느냐, 없느냐만 중점적으로 수사를 하고요. 거기에 더해 피해자의 ‘미투’가 비방 목적이냐, 공익 목적이냐 ‘의도’가 무엇인지 밝히는 데에만 (수사가) 집중이 되는 거죠.”
-손지원 사단법인 오픈넷 변호사-
다시 말해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는 그 존재 자체로 진실을 고발한 사람들이 명예훼손으로 역고소를 당하고 형사범죄의 피의자 신분으로 수사를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공익성’이 인정돼 최종적으로 처벌을 받지 않더라도 이는 경찰의 수사단계가 아닌 검찰의 기소 여부 판단, 그리고 법원의 유무죄 판단 단계에 이르러서야 고려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그 기간 동안 성폭력 피해자는 고통을 받게 되지요. 이 때문에 피해자가 애초부터 가해 사실에 대한 고발을 꺼리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그동안 여성계가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의 폐지를 꾸준히 주장해왔던 이유입니다.
그런데 최근 이런 흐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의 부작용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폐지하는 게 반드시 성폭력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온라인 공간에서 성폭력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성 발언을 처벌할 수 있는 ‘무기’ 역시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이기 때문입니다.
올 3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김지은씨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김씨의 미투 고발 직후부터 김씨의 사생활과 품행을 폄하하는 내용의 댓글들이 쏟아졌습니다. 이 댓글들에는 허위사실도 있었지만, 김씨의 성폭력 피해와 관련 없는 사생활과 관련한 사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경찰 수사결과 이 ‘악플러’ 가운데에는 안 전 지사의 전 수행비서와 에스엔에스 관리자 등이 포함된 사실이 밝혀졌는데요. 당시 이들에게 적용된 혐의는 앞서 말씀드렸듯 ‘공공연하게 사실을 드러내어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를 처벌하는 ‘정보통신망법의 명예훼손 및 모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의 폐지를 찬성하는 쪽은 이 법 조항이 그동안 미투 운동을 비롯한 내부 고발과 언론 자유 등을 제약해왔다는 점에서 폐지를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성폭력 피해자를 2차 가해로부터 보호하고자 한다면, 새로 법안을 만들거나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의 구성요건을 ‘사생활의 비밀을 침해하는 사실을 적시’한 경우로만 한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하면 안 된다는 쪽에선 피해자의 신원과 사생활 비밀의 누설을 금지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24조가 사실상 사문화된 상황에서 대안 없이 폐지를 검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차별금지법도 제정되어 있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 소수종교 신자, 성소수자, 이주자 등 사회적 소수자의 정체성에 대한 ‘사실 적시’ 차별 표현들에 대해 대응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여전합니다.
팽팽하게 의견이 맞서는 상황에서 대안을 고민해볼 필요도 있을 겁니다. 대표적으로 꼽히는 대안이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를 그대로 두고, 성폭력 범죄 특례법으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막는 방법입니다. 성폭력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피해자 본인에게 피해 사실 등을 지속적으로 말하거나, 피해자와 관련한 사실 또는 허위사실을 불특정 다수에게 알려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의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올 3월 무소속 손금주 의원 등이 발의한 법안입니다.
그러나 이 법률 개정안은 ‘성폭력범죄의 피해자’의 개념을 언제 확정할 수 있을지가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안지희 변호사는 “‘성폭력범죄의 피해자’를 성폭력 피해를 신고한 시점, 검찰이 가해자를 기소한 시점, 법원이 가해자에게 유죄를 선고한 시점 가운데 ‘언제’로 볼 것인지 애매해 보완이 필요하다”며 “성폭력 피해자의 개인정보, 피해사실 적시는 물론 ‘꽃뱀’과 같은 피해자에 대한 혐오표현 등을 실질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입법이 이뤄져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기자로 일하진 않지만 아직 언론계에 남아 있는 선배나 동기, 후배 여기자들에게 제 ’미투’가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대학원생 신분이지만, 나중에 다시 사회생활을 하게 될 때 성폭력 피해를 또 겪고 싶지도 않았고요. 제 뒤에 누군가들이 이런 사회에서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성폭력 고발 글을 썼던 거예요.”
-변영건 전 기자-
성폭력 가해자들의 백래시에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 폐지에 대한 고민은 조금 더 복잡해졌습니다. 하지만 변 전 기자의 말처럼 “내 뒤에 누군가들이 이런 사회에서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에서 터져 나온 #미투가 계속되려면, 우리가 당장 이들을 보호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선담은 기자
s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