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여러 신도를 성폭행한 혐의를 받는 만민중앙성결교회 이재록 목사가 지난 5월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신도를 대상으로 성폭력을 저지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재록 목사가 법원에서 중형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종교적 권위를 가진 이 목사가 심리적 항거불능 상태에 놓인 피해 신도들을 대상으로 상습적인 성폭력을 저질렀다고 판단했다.
22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6부(재판장 정문성)는 상습준강간·상습준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이재록(76) 만민중앙교회 목사에 대해 징역 15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80시간의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을 이수하고,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 등에 10년 동안 취업 제한 명령도 선고했다.
이 목사는 어렸을 때부터 만민중앙성결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온 신도 8명을 4년여 동안 42차례에 걸쳐 상습적으로 강간하고 추행한 혐의(상습준강간·상습준강제추행)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 목사는 “추행하거나 간음한 사실이 전혀 없다”며 혐의를 전부 부인해왔다. 검찰은 이 목사에게 징역 20년과 피해자에 대한 접근 금지, 성폭력 치료 강의 이수, 보호관찰 명령을 내려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한 바 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13만명의 신도가 생활하는 대형 교회의 담임 목사로,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다니면서 피고인의 종교적 권위를 절대적으로 믿어 반항도, 거부도 할 수 없었던 피해자의 처지를 악용해 20대인 피해자들을 장기간에 걸쳐 추행하고 간음했다. 심지어 집단으로 간음하는 범행까지 저질렀다”고 지적했다. 이어 “피해자들은 자신이 절대적으로 신뢰한 종교 지도자에 대한 배신감으로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고 가장 행복하게 기억돼야 할 20대가 후회스럽고 지우고 싶은 시간이 된 것에 고통스러워하며 엄벌을 원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목사측이 피해자들의 내밀한 사생활까지 들춰내 2차 가해한 점 또한 양형에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 “절대적인 종교적 권위, 심리적 항거불능 상태 이용해 범행”
재판부는 피해자들이 종교 지도자의 절대적 권위 아래 심리적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고 이 목사는 이를 악용해 성폭력 범죄를 저질렀다 봤다. 준강간·준강제추행 혐의에서 ‘항거불능 상태’는 심신상실 이외의 원인 때문에 심리적·물리적으로 반항이 불가능한 경우를 의미한다. 이 목사측은 “피해자들은 20세가 넘은 성인으로 정상적인 지적 능력이 있었으며 당시 태도 등에 비춰 볼 때 심리적 항거불능 상태에 있지 않았다”, “피고인은 교회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갖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검찰측 증인, 피해자 증언, 일부 설교내용을 종합해 살펴보면, 피고인의 일부 설교 내용은 피고인을 신격화한 내용으로, 피고인이 직접 자신을 성령이나 신으로 칭하지 않았더라도 적어도 소모임이나 교육에서 직·간접적으로 자신을 성령이라고 가르쳐왔음을 넉넉히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어릴 때부터 이 목사의 교회를 다니고 ‘믿음의 분량’의 높은 피해자들은 피고인을 신격화하는 교회 분위기 내에서 피고인이 권능을 행한다 믿고 성령 또는 신적 존재로 여기며 절대적 권력에 복종·순종하는 신앙생활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피해자들이 비록 일반적 교육과정을 마친 성인이라 하더라도, 신과 같은 절대적 믿음을 가진 상태에서 피고인의 행위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판단했고, 의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죄가 된다고 생각해 거부하는 것조차 스스로 단념했다”고 봤다. 50세 연상인 이 목사와 자발적인 성관계를 원치 않았을 것이라는 점도 재판부는 고려했다. 다만, 2012년~2014년 6차례 걸쳐 일어난 집단성관계 등 일부 혐의 등에 대해선 ‘혐의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부족하다’며 일부 무죄 판단을 내렸다.
선고공판이 끝난 뒤 만민중앙교회는 “사건으로 제시된 모든 날짜에 대한 알리바이, 반박자료를 다 제출했지만, 재판부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반대측 진술만 믿고 판결을 내렸다”며 “당회장님(이재록 목사)의 무고함을 믿기에 진실을 밝히기 위해 바로 항소를 하겠다”고 밝혔다.
인천의 한 교회 목사로부터 그루밍(grooming) 성폭력 피해자들이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에서 가해자인 목사를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 잇따라 공론화된 종교계 성폭력… 대다수가 ‘그루밍 성폭력’
이 목사 성폭력 사건은 그루밍 성폭력의 일종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루밍(Grooming) 성폭력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심리적으로 길들여 성폭력을 용이하게 하거나 은폐하는 행위’를 말한다. 주로 아동·청소년 대상의 성범죄에서 발견되는데, 종교계 성폭력의 특징으로도 분류된다. 채수지 기독교여성상담소 소장은 “가해자인 종교 지도자는 절대적 신뢰를 바탕으로 심리적 지배관계를 형성하고 이를 이용해 손쉽게 피해자를 성적으로 착취하게 된다. 피해자는 성범죄 피해를 당하는 중에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식으로 세뇌 당하기 때문에 피해 사실을 인지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종교 미투’ 폭로가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지난 11월 인천의 한 교회 목사가 신도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이용해 그루밍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피해자측 주장에 따르면, 10대·20대 등 피해자만 26명에 달한다고 한다. 피해자들은 가정형편이 어렵거나 부모가 이혼하는 등 물질적·심리적으로 어려운 상태에 있었고 해당 목사는 이와 같은 피해자의 취약한 심리 상태를 악용해 장기간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게 피해자쪽 주장이다. 김애희 기독교반성폭력센터 센터장은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신뢰하고 존경하는’ 성직자에 의해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상황이 지속될 수 있다. 가해자의 종교적 권위로 인해 자립적으로 사고하거나 성적 자기결정권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이번 판결은 그루밍 성폭력 범죄에 경각심을 일깨우는 한편, 심리적 항거불능 상태를 보다 폭넓게 인정했다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수진 변호사(법무법인 덕수)는 “지적장애가 있거나 연령이 낮은 피해자와 달리 정규 교육을 받은 성인 여성의 경우 심리적 항거불능이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사건의 경우, 성인 여성임에도 종교적 권위·교리로 순치돼 심리적으로 저항할 수 없는 상태였다는 점을 재판부가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범행 당시 구체적 상황에 비춰 판결을 내린 것”이라고 밝혔다.
김재련 변호사(법무법인 온세상)는 “보통 물리적 폭행이나 협박이 없을 때 왜 피해자가 거부하거나 도망치지 않았냐고 따져묻곤 한다”며 “이 목사는 종교를 가지고 있는 피해자에게 신적 존재와 다름 없었고 피해자는 이 목사의 말이나 행동에 저항이 어려운 심리적 항거 불능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특수관계 아래 성적착취가 발생했을 때, 재판부가 그 관계의 본질을 들여다봤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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