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한 공권력에 의해 타지로 끌려가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제주 4·3 생존 수형인 18명이 70년 만에 사실상 무죄를 인정받았다. 17일 오후 제주지방법원에서 법원의 공소기각 판결로 사실상 무죄를 선고받은 제주 4·3 생존 수형인 18명이 만세를 부르고 있다. 제주/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지난 세월 고생 많으셨습니다. 재판부 입장에서 그 말씀을 드립니다. 주문.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를 모두 기각한다.”
17일 오후 1시41분 제주시 제주지법 201호 법정. 제갈창 부장판사의 ‘공소 기각’이라는 말에 갸웃하던 양근방(86)씨는 “무죄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이겼다”는 변호인의 설명을 들은 뒤에야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방청석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방청석 제일 앞자리에 앉아 판사의 말에 귀 기울이던 오희춘(86)씨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오씨는 말없이 흰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큰 짐을 졌다가 콱 풀리니까 다락다락 눈물이 났수다. 기쁜 눈물이고 죄 벗은 눈물이고….” 오씨는 재판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이날 제주지법 형사2부(재판장 제갈창)는 1948~49년 제주 4·3 당시 내란죄 등으로 군법회의(군사재판)에 넘겨져 징역 1~20년씩의 형을 살았던 수형인 18명이 낸 재심 재판에서 공소 기각 판결을 했다. 이들의 범죄사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도 않은 채 재판에 회부한 만큼 공소제기 자체가 무효라는 것이다. 당시 양씨 등은 유죄 판결을 받은 뒤 고향 제주를 떠나 전국의 형무소에 분산 수감됐다.
재판부는 공소제기 절차를 무효로 판단한 이유로 ‘공소사실 불특정’과 ‘군법회의 회부 절차 미준수’를 들었다. 재판부는 “수형인 명부, 군집행지휘서 등 관련 문서에는 죄명과 적용 법조만 기재돼 있을 뿐 당시 어떠한 공소사실로 군법회의를 받게 됐는지 확인할 공소장이나 판결문이 없다. 피고인들은 일관되게 자신들이 어떠한 범죄사실로 재판을 받았는지 알지 못한다고 진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4·3 당시 군법회의가 단기간에 2530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것에 비춰볼 때 제대로 된 수사나 재판은 없었거나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당시 25일 동안 12차례 열린 재판에서 871명, 15일 동안 10차례 진행된 재판에서 1659명이 재판을 받았다. 단기간에 그와 같은 다수의 사람을 집단적으로 군법회의에 회부하면서 예심조사나 기소장 등본 송달 절차가 제대로 이뤄졌을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 ‘군 당국이 당시 경찰의 의견을 수용해 판결 내용을 미리 정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 내용을 인용했다.
생존 수형인들은 이날 정오께부터 제주지법 로비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한 수형인들은 지팡이를 짚고, 휠체어를 타고 법원에 왔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정기성(97)씨와 현창용(87)씨는, 자녀들이 대신 재판에 참석했다. 선고 시간이 다가오자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던 수형인들은 10여분 만에 선고공판이 끝나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제주지법 건물 앞에 섰다. 이들 앞에 펼침막이 펼쳐졌다. ‘우리는 이제 죄가 없다’.
“망사리(해녀들이 쓰는 그물망) 속에 가둬진 몸이 풀려났는데 얼마나 시원하겠습니까. 이름에 빨간줄도 없어지고 할머니 옥살이 흔적도 없어지게 돼서 그것이 제일 후련합니다.” 휠체어에 앉은 김평국(89)씨가 꽃다발을 들고 환하게 웃었다. “죄 없이 갖은 고문을 겪었습니다. 오늘 같은 재판도 없이 형무소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가슴에 한이 맺혔는데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더 뭐라 할 수 없습니다.” 박동수(86)씨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재판부는 지난해 9월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고 검찰은 이에 ‘불복’하지 않았다. 임재성 변호사(법무법인 해마루)는 “당시 군사재판의 총체적인 불법성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무죄 판결보다 훨씬 진전된 것이다. 국가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내고 다른 12명의 생존 수형인에 대한 재심 청구 또한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제주/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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