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개봉한 미국 영화 <주노>(감독 제이슨 라이트먼, 주연 엘런 페이지)는 10대 미혼모에 대한 이야기이다. 교내 밴드에서 기타를 치고 하드록을 좋아하는 고교 2년생 주노는, 첫 성경험에 대한 호기심을 친구와 실천(?)에 옮기고, 두달 뒤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주노는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고 입양 부모를 직접 찾아 나서는데, 모든 면에서 완벽해 보이는 불임 부부를 만나 그들에게 태어날 아기를 입양 보내기로 결심한다. 행복하게만 보였던 예비 양부모들이 이혼하게 되면서 부모가 모두 있는 ‘완벽한 가정’을 아이에게 주고 싶었던 주노는 갈등하지만, 결국 예비 엄마의 진심을 알아보고 그를 자기 아이의 엄마로 인정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부러웠던 것은, 주노는 10대 미혼모였지만 당당히 학교를 다니며 모든 상황을 주도한다는 점이다. 주노 역시 주변의 따가운 눈초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지만, 우리나라에서 미혼모, 그것도 미성년자의 임신을 대하는 태도와 비교해보면 참으로 부러운 것이었다. 주노는 학교에서 쫓겨나지도 않았고, 부모에게 머리를 깎이거나 얻어맞거나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낙태를 위해 산부인과로 끌려가지도 않는다. 또한 혼자 몰래 아이를 낳거나, 미혼모 시설에서 아이를 낳은 뒤 누구일지도 모를, 어느 나라 사람일지도 모를 양부모에게 아이를 입양 보내지도 않는다. 모든 순간 자신의 선택에 따라 자신과 아이의 운명을 결정한다.
주노는 사이가 좋지 않던 계모부터 아이를 입양 보내기로 한 예비 엄마까지 주변 어른들과 사회의 적절한 지원을 받았다. 누구도 주노를 주눅 들게 하거나 부끄럽게 하지 않고 진심으로 조언하고 지원했다. 미국 사회의 현실도 영화가 그린 세상만큼 미성년 미혼모에게 녹록하지는 않겠지만, 한국 사회가 미혼모를 어떻게 대해왔는지 생각해보면 참으로 부러운 영화 속 세상이 아닐 수 없었다.
추방 입양인의 삶에 비친 미혼모의 현실
그는 네살 되던 해에 미국으로 입양을 갔다. 1970년대였다. 그의 어머니는 혼인신고를 하지 못한 채 세명의 아이를 낳고 살았는데, 부친은 셋째 아이가 태어나자 집을 나가 연락 두절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미혼모라는 이유로 집안의 도움을 받지 못했고, 생활고에 시달리다 결국 아이들을 입양 보내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애비 없는 자식이라고 손가락질 받지 않아도 되고, 잘 먹고, 잘 배울 수 있는 좋은 환경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어렵게 해외 입양을 결심하였다.
그런데 입양기관의 설명과 달리 그는 좋은 환경에서 성장하지 못하였다. 그는 첫번째 입양에서 학대를 당하다 파양당했다. 그는 파양된 이후 4년 가까이 낯선 미국의 고아원 등 보호 시설을 전전하다 두번째 입양이 되었다. 두번째 입양은 더욱 가혹한 것이었다. 입양 가정에는 이미 다수의 입양 아동이 있었고, 여러 명의 위탁 아동까지 있었다. 그의 기억에 많을 때는 12명의 아동이 함께 지낼 때도 있었다고 한다. 두번째 입양 부모는 입양과 아동 위탁 보호를 하면서 주 정부의 지원을 받아 생활하였는데, 그들에게는 입양이 돈벌이 수단이 되었던 셈이다. 두번째 양부모는 그를 비롯해 아이들을 가혹하게 학대했고, 결국 34건에 이르는 강간, 성적 학대, 가혹행위 등의 죄목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 후 그는 17살에 노숙자가 되어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했다.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하루하루 연명하는 삶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가져온 유일한 물건인 고무신과 성경책을 가지러 양부모 집에 갔다가 주거침입 및 절도로 처벌받고 전과자가 되었다. 가해자인 양부모는 미국의 사법절차를 이용하여 흉악한 죄명에도 가벼운 처벌을 받았지만 피해자인 그는 훨씬 중한 처벌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불굴의 의지로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여 고교학력인증시험과 다양한 직업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였고, 결혼도 해 자녀를 두었다. 그는 어느날 자신이 미국 영주권자일 뿐 시민권자(미국 국적)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와 같은 처지의 입양인이 미국에만 1만5천명가량이라고 한다) 해외 입양에서 입양아 생존의 가장 기본 조건이라 할 수 있는 국적 취득 절차가 진행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강제퇴거명령 취소소송을 하였으나 1심에서 패소했고, 항소를 포기했다.
그는 소송 중 한국의 방송에 출연하였다가 그의 모친과 상봉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와 모친의 상봉이 소송에 악재가 되었다. 검사는 그에게 재판에서 이긴다고 하여도 모친이 있으면서도 고아로 입양서류를 조작하여 입국하였으니 어차피 추방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성년이 된 그에게 4살 때 입양기관이 허위로 만든 고아 호적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항소를 포기하였다. 부인과 젖먹이 딸을 미국 땅에 남겨 둔 채, 그는 한국으로 추방되었다. 4살 때 한국을 떠났으니 37년 만이었다.
한국 땅에서 그는 한국인의 얼굴을 한 영어만 구사할 줄 아는 이방인이다. 내가 속해 있는 변호사 모임 소속 변호사들은 그의 사연을 접하고, 해외 입양인들의 국적 취득 조력 및 확인 등 의무 이행을 소홀히 한 입양기관과 국가의 법적 책임을 묻는 소송의 진행을 그와 의논했다.
사실 그에게 가장 필요한 도움은 미국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는 것이지만, 미약한 변호사의 힘으로 고작 도와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가 입은 피해에 대해 승소조차 장담할 수 없는 소송으로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 것뿐이었다. 그는 승소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와 입양기관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해외 입양인들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알려주고 싶다면서 어렵게 소송을 결심하였다.
나는 해외 입양인인 그의 고통과 대면하고, 그의 머리와 입이 되고, 그와 같은 심장으로 그를 위해 싸우고자 소송을 시작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어머니를 비롯해 자식을 먼 이국땅에 입양 보낼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미혼모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잘 살라고 부자 나라로 입양 보낸 아들의 비극까지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 땅에서 미혼모들은 낙태를 해도, 아이를 낳아도, 입양을 보내도, 스스로 양육을 하여도 손가락질 받기 일쑤였고, 그중에서 가장 허락되지 않는 것은 직접 아이를 키우는 것이었다. 가부장 사회의 룰을 어기고 감히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은 미혼모에 대한 최대의 처벌은 아이를 키울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그의 이마에 주홍글씨를 새겨 넣는 대신 아이를 빼앗음으로써 그의 심장에 죽어도 지워질 수 없는 고통의 주홍글씨를 새겨 넣고 여성들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가부장 질서를 어긴 여성에게 주어지는 처벌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를.
출산율 높이려면 미혼모의 권리부터
해외 입양은 한국전쟁 직후 전쟁고아를 입양 보내기 위하여 시작되었다. 그러나 실상은 전쟁고아가 아닌 혼혈아동과 미혼모의 아이를 입양 보내는 데 활용되었다. 보건복지부의 자료에 따르면 1955년부터 1961년까지 해외 입양된 많은 아동이 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음이 확인된다. ‘아버지의 나라에 자녀를 보내자’는 구호 아래 순혈주의를 앞세워, 외국 남자의 아이를 낳은 불결한 여자라는 편견과 차별의 공포에 질린 모성을 짓밟고 사실상 엄마와 아이를 강제로 분리하였다.
1951년부터 2012년까지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아동의 수는 무려 11만1148명으로 추정된다. 아시안 게임이 있었던 1986년엔 8600여명, 올림픽이 있었던 1988년에 6400여명의 아이를 해외 입양 보냈다. 그 아이들 중 약 90%가 미혼모의 아이였다고 한다. 이는 전쟁고아보다 미혼모의 아이 입양을 위해 해외 입양이 활용되었음을 보여주는 통계 수치다. 해외 입양이 한국 내에서 보호하기 어려운 아동을 구제하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었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많은 미혼모 아이의 입양 통계는 결국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은 여자는 가부장 사회의 수치로 치부되어 모성이 존중받지 못했음은 물론, 그 아이조차 한국 내에서 용인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나는 몇년 전 다행히 친모를 찾은 해외 입양인 한 분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1970년대 후반에 쌍둥이 언니와 함께 같은 가정으로 입양되었다. 그가 가진 단서는 입양 당시 쌍둥이 언니와 함께 찍은 사진뿐이었다. 입양기관을 방문하였으나 호적에 그는 고아로 기재되어 있었고, 친부모에 대한 아무런 자료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 방법으로 그는 친모가 자신을 알아봐주길 바라며 한국의 한 방송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하였다. 티브이에 공개된 쌍둥이들 사진을 그의 이모가 알아보았다고 한다. 친모는 미혼모였고, 친모의 모친(그의 외할머니)이 친모 몰래 입양기관에 쌍둥이들을 데려다주었다고 하였다. 입양기관은 친모가 있음을 알면서도 친모의 동의도 받지 않고 쌍둥이들을 기아로 허위 신고하고, 고아 호적을 창설하여 미국으로 입양을 보낸 것이었다.
미혼모의 동의 없이 그 가족들이 아이를 빼앗아 해외 입양 보낸 사연은 드문 것이 아니다. 그의 친모는 쌍둥이들의 출생신고가 기록된 호적을 말소하지 않은 채 평생을 기다렸다고 하였다. 해외 입양인 중 친부모를 찾는 데 성공한 경우는 2%도 안 된다고 하는데, 그처럼 대부분 고아 호적으로 입양을 간 경우가 많은데다 친부모가 있었던 경우에도 입양기관에 자료가 제대로 보관되어 있지 않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출생 기록은 해외 입양인에게는 친부모(자신의 정체성)를 찾을 수 있는, 친부모에게는 자식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인데, 입양기관에서 그 마지막 단서마저 사라진 것이다. 그와 그의 친모는 참으로 운 좋게 기적처럼 서로를 찾았다.
미국인 리처드 보아스는 한국 미혼모의 아이를 입양한 양부모였다. 그는 입양한 딸로 인해 자신이 누린 행복에 대해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 한국을 방문하였다가 자신의 기대와는 너무 다른 미혼모들의 현실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미혼모 생활시설에서 만난 임신부들은 아이를 낳기도 전부터 입양동의서에 서명을 한 상태로 사실상 양육과 입양에 대해 선택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고, 가족과 사회에서 고립되어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그런 미혼모의 고통을 모른 채 입양으로 행복하였던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한국의 미혼모와 그 자녀의 양육을 돕기로 결심하고 2007년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를 설립하였다.
2013년 입양특례법이 개정되기 전에는 입양기관이 미혼모 시설을 운영할 수 있었는데, 입양기관이 운영하는 미혼모 시설은 입양아동을 안정적으로 제공하는 공급처 구실을 했다. 아마도 리처드 보아스는 입양기관이 운영하던 미혼모 시설을 방문하였던 것 같다. 과거 미혼모들은 미혼모 시설에 입소하기 위해서 출산 전에 입양동의서에 서명을 해야 했다. 아이를 출산하고 아이를 안아보면서 마음이 바뀌어도 미혼모 시설에서 아이를 출산할 때까지 들어간 비용을 모두 변제해야만 아이를 데려갈 수 있다고 하여 아이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비판으로 현재는 입양기관이 미혼모 시설을 운영하지 못하도록 법이 바뀌었다. 입양기관은 해외 입양이 성사되면 아이 한명 당 수수료를 받았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4571달러이던 1988년 한국 아동의 미국 입양 수수료가 5000달러였으니, ‘아기 공장’이라거나 ‘고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에도 한국이 해외 입양을 계속하고 있는 이유가 돈 때문이라는 비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저출산이 큰 사회적 문제가 된 요즘, 미혼모의 출산과 양육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는 많이 나아졌는가. 통계자료를 보면 2016년에도 해외 입양아의 98%가 미혼모의 자녀였다. 2018년 한부모 가정의 아동 양육비는 최대 18만원이었으나, 아이를 입양 보내기 위해 보호시설에 맡기면 시설에 의료비 등 각종 수당으로 아이 한명당 128만원이 지원되었다. 여전히 미혼모의 양육(모성)보다 입양이 강제(?)되는 사회인 것이다.
출산율을 높인다면서 지자체별로 출산수당 높이기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다. 출산율이 낮아지는 이유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것 아닌가. 아이를 낳아도 기를 수 없는 세상에서 어떤 여성이 아이를 낳을 것인가.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여성의 인권이 증진되는 만큼 여성의 출산율은 높아질 것이다. 그 시작점에 미혼모의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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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정 법무법인 지향 변호사.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전문위원. 이주여성인권센터 법률지원단. 두 딸의 엄마로 주업은 작은 로펌의 생계형 변호사다. 성폭력, 가정폭력, 이주여성 등에 대한 법률지원을 꾸준히 해왔다.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들 곁에서 손잡아주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고자 했고, 되고 싶다. 그녀들을 위한 변론 경험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