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유가족 권미화씨(고 오영석군 어머니)가 3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복동 할머니의 빈소에서 조문을 마친 뒤 노란 리본으로 만든 노란 나비모형을 영정 앞에 놓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이겼어. 많은 노력해서 왜놈, 일본한테 이겼어. 분명히 이겼어. 맘 편하게 하늘나라 가서 할머니들한테 전해요. 내가 이기고 왔다. 나머지는 용수가… (한다고) 할머니들한테 전해…”
30일 오후 3시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1층 입관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김복동 할머니의 입관을 지켜보던 이용수 할머니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조계종 사회부장 덕조스님 등 승려 5명이 김 할머니의 극락왕생을 바라는 장엄염불을 시작했다. 30분 넘게 입관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목탁과 종을 치는 소리가 입관실을 가득 메웠다.
이날 입관식에는 이용수 할머니와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이사장, 김동희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장, 손영미 위안부 할머니 쉼터 ‘평화의 우리집’ 소장 등 40여명이 참석해 김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봤다. 김 할머니는 생전 “난 부처님 덕분에 살아남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던 불교신자였다. 열다섯 김복동에게 ‘공장 가서 배고프면 이걸로 뭐 사먹어라’며 돈 1원을 치마에 꿰매 넣어 줬던 엄마는 8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부처님께 기도했다. ‘우리 딸이 제발 살아 돌아오게 해달라’고. 그래서 김 할머니는 자신이 살아 돌아온 게 부처님 덕분이라고 믿었다.
“가시밭길 걷지 마세요. 꽃길만 걸으세요, 할머니.” 김 할머니의 시신을 옮기기 위해 미리 준비해놓은 관 뚜껑이 열리자 윤 이사장은 오열했다. 김 할머니가 눕게 될 관 바닥은 붉은색, 주황색, 노랑색, 하얀색 꽃이 수북히 깔려 ‘꽃길’처럼 보였다. 스물여덟 꽃다운 나이에 김 할머니를 처음 만난 윤 이사장에게 할머니는 지금껏 함께 싸워온 ‘동지’였다.
“애 많이 쓰셨어요. 남은 것은 우리에게 다 맡겨주세요. 할머니와 함께 한 27년 너무 행복했어요. 할머니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해요.”(윤미향 이사장)
“우리 언니 장하다.”(이용수 할머니)
“너무 죄송해요.”(손영미 소장)
“할머니, 잊지 않을게요. 저희가 끝까지 싸울게요.”(김동희 관장)
윤 이사장과 이 할머니가 하얀색 천으로 김 할머니의 얼굴을 덮는 순간, 참관자들의 오열소리가 더 커지며 입관실은 눈물바다가 됐다.
“곡소리가 크면 클수록 저승길이 평탄하다고 합니다.” 장례업체 직원이 말했다. 참관인들은 빨간색 장미꽃과 하얀색 국화꽃을 관 안에 헌화하고 두 번의 큰절과 한 번의 반절을 올렸다. 이내 곧 관이 닫혔다. “잘 가, 언니.” (이용수 할머니)
자립지지공동체에서 ‘엄마’를 따라 온 8살짜리 남자아이 한 명과 6살 난 여자아이 두 명이 웃으며 김 할머니의 관을 만졌다. 아이들은 생전에 김 할머니가 살았던 서울 마포구 연남동 ‘평화의 우리집’을 찾아 동요 ‘나비야’를 불렀다고 했다.
“‘나비야’ 불렀을 땐 좋았었지만… 하늘나라에 가는 거요? 땅에서 하늘까지 돌아간다는 거예요.” 아이들은 아직 김 할머니의 마지막을 실감하지 못 했다.
선담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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