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시설, 장애인 자립 리포트 ③ 자유를 얻은 장애인들
김동림씨가 아내 이미경씨의 사진을 들고 웃고 있다. 이준희 기자
재단 이사장 비리에서 촉발된 ‘석암투쟁’ 이후 석암재단은 프리웰로 이름을 바꿨다. 재단 이사회에 장애인 단체들이 참여했고,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은 ‘향유의집’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장애인의 자립을 지향하는 시설로 변했다. 현재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 있던 123명 중 29명이 시설에서 나와 스스로 삶을 꾸리고 있다. 자립 이후, 이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한겨레>가 이들 29명 중 21명을 만났다. 또 시설장애인 26명과 자립장애인 15명 등 모두 41명을 설문조사해 그들의 삶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폈다.
“사귀어봐요” 1년 연애 뒤 결혼
“자유보다 좋은 말이 생겼어요” 32년만에 처음 바다 본 우정씨
자립하니 새로운 세상 기다려
식비 아낀 돈 모아 일본·중국도 공부 못하며 지낸 수십년 후회
탈시설 뒤 먼저 교육기관 찾아
“노래 배우는 것이 가장 좋아요” 2009년 겨울 서울 종로구에 있는 장애인의 자립을 돕는 집 ‘평원재’. 휠체어 두개가 나란히 승강기 앞에 섰다. 중증 뇌병변 장애인 이미경(49)의 집은 2층이다. 같은 장애를 가진 3층 남자 김동림(56)은 마음이 급했다. 자립 이후 같은 학교에 다니며 힐끔힐끔 이미경을 몰래 봐온 김동림이다. 왠지 모를 그런 날이 있다. 이번 승강기가 내려오기 전에 용기를 내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었다. “우리 같이 살자.” 김동림이 대뜸 말을 던졌다. 이미경은 침묵했다.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답을 듣지 않고서는 승강기 안에서의 민망함을 버틸 재간이 없었다. 김동림은 다른 말을 생각해낼 여유조차 없었다. “우리 같이 살자.” 같은 말로 한번 더 물었다. 그제야 이미경은 입을 뗐다. “그래요. 한번 사귀어봐요.” 같은 중증 장애를 가진 위층 남자와 아래층 여자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됐다. 연애 1년이 조금 넘은 2011년 5월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고, 지금은 서울 도봉구의 한 아파트에서 함께 산다. “아내를 몰랐을 때는 ‘자유’라는 말이 제일 좋았죠. 지금은 결혼한 게 가장 좋아요.” 22년 동안 시설 생활을 하다 2009년 자립을 시작한 김동림은 말을 마치고 이미경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김동림은 “최근에는 상도 받았다”며 상패를 꺼냈다. 2018년 10월12일 한국지체장애인협회가 연 ‘전국장애인부부초청대회’에서 받은 모범가정상이었다. 부부는 “그날 호텔에서 처음으로 스테이크를 썰어봤다”며 밝게 웃었다. 36㎡ 남짓한 도봉구의 작은 아파트 곳곳에는 두 사람의 사진이 담긴 액자 여섯개가 곳곳에 놓여 있다. 김동림은 “잘 나온 사진이 더 많다”며 장롱을 열어 아내의 흑백 사진이 담긴 액자를 보물처럼 꺼내왔다. 환한 미소의 아내 사진을 들고 김동림은 아이처럼 웃었다. 시설에 있을 때는 결혼은 물론 연애도 꿈꾸지 못했다. 홀로 외로운 것보다 여러 사람과 부대끼며 살면서 외롭다는 사실이 김동림을 더 힘들게 했다. 지금은 다르다. “외출했다가 집에 왔는데 혼자면 되게 삭막하고 쓸쓸하잖아요. 이제는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외롭지 않아요.” ■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다 시설 밖에는 새로운 세상도 기다리고 있다. 중증 지적장애와 뇌병변 장애를 함께 가진 정우정(33)은 8살 때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 입소해 서른을 코앞에 둔 2015년 자립했다.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대뜸 여행 사진을 하나씩 보여줬다. 정우정 뒤로 넓고 푸른 속초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바다에 간 것이 가장 좋았어요.” 지난해 11월 1박2일로 자립장애인들과 함께 떠난 여행에서 정우정은 32년 인생 처음으로 바다를 봤다. 정우정과 함께 시설에서 있다가 자립한 중증 뇌병변 장애인 황인현(48)이 옆에서 말을 보탰다. “우정씨가 시설에서 나온 뒤로 밝아지고 의사 표현도 분명해졌어요. 함께 여행을 몇번 다녔더니 이젠 나만 보면 여행을 가자고 졸라요.” 둘은 그렇게 여행 동지가 됐다. 25년을 지냈던 시설에서 2015년 탈주해 자립한 황인현은 지난 4년 동안 일본에 3차례, 중국에 1차례 다녀왔다. 이제 일본여행만큼은 자신있다. 국내여행도 많이 한다. 특히 대통령 별장이었던 청남대는 황인현이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다. 여행비는 식비를 아껴서 마련한다. 25년 동안 가지 못했던 곳을 원 없이 다니고 있다. 역시 중증 뇌병변 장애를 가진 한규선(57)은 지난해 6월 일본 후쿠오카에 다녀왔다. 역시 56년의 삶을 지낸 뒤 맞이한 첫 국외여행이었다. 파란 옷에 까만 선글라스를 낀 한규선 뒤로 하카타 항구에 세워진 100m 높이의 하카타 포트 타워가 보였다. “깨끗하고 조용해서 좋았어요.” 기독교인인 한규선은 1990년 처음 시설에 들어갔다. “이렇게 사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체념했었다. 18년 시설 생활은 그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과연 이렇게 사는 게 정말 하나님의 뜻일까?” 2008년 그는 세상으로 나왔다. 그리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걸음을 바삐 옮기고 있었다. ■ “마음껏 공부할 수 있어 행복해요” 탈시설한 이들이 가장 갈급해하는 건 공부다. 공부는 세상에서 고립되어 있던 이들을 세상과 연결해주는 통로다. 지난해 12월18일 경기 김포 ‘김포장애인야학’에서 만난 중증 뇌병변 장애인 이주정(45)은 지난해 29년 시설 생활을 마무리하고 자립했다. 야학에는 이주정이 몇개 남지 않은 이를 활짝 드러내보이며 수업받고 있는 사진이 곳곳에 걸려 있다. 이주정의 야학 친구인 중증 뇌병변 장애인 박일심(54)도 이주정과 함께 “공부가 가장 좋다”고 말한다. 25년을 지냈던 시설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도 “공부를 못 했던 것”이라고 했다. 이건창(49) 역시 같은 생각이다. 이건창은 매주 세번 야학에서 수업을 듣는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것마저 쉽지 않은 중증 뇌병변 장애를 가졌지만 무엇도 그를 막을 수 없다. “야학에 다니면서 수학·영어·그림·영화 등 다양한 공부를 할 수 있어서 좋아요.” 이건창은 그중에서도 노래를 배우는 것이 가장 좋다고 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왕이 나셨도다 왕이 나셨도다.” 그는 지난해 12월21일 ‘향유의집’에서 열린 송년회에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4절까지 모두 불렀다. 침대형 휠체어에 누워 있어서 가사는 잘 보이지 않았어도 한 손을 흥겹게 흔들며 노래를 부르는 열정만큼은 누구도 억누를 수가 없다. 이주정과 이건창은 부장애가 ‘지적장애’다. 지적장애인은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밝히는 데 곤란을 겪어 자립 비율이 낮은 편이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이 시설을 나올 때 주위의 반대도 컸다. 몸이 불편한데다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밝히지 못해 위험하다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공부’를 좋아하는 학생으로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시설에 있을 때 이들은 그냥 ‘같은 시설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탈시설한 뒤 이들은 이주정과 이건창으로 마침내 인식된다. 사랑, 여행 그리고 공부. <한겨레>가 만난 21명의 자립장애인들은 시설에서는 꿈꿔보지 못했던 일들을 ‘나중’이 아닌 ‘지금’ 하고 있었다.
<한겨레>가 만난 자립장애인들이 자유로운 일상을 누리며 환히 웃는 사진들을 보내왔다. 당사자 제공
특별취재팀: 정환봉 권지담 김민제 박윤경 이준희 기자
픽사베이.
탈시설이 남 이야기인 사람들
자녀 부양하는 부모·사회 두려운 장애인 “시설은 부득불 선택”
중증 지적장애를 가진 딸을 키우는 박혜순(가명)씨는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탈시설 말은 좋죠. 그런데 시설 밖으로 나오게 되면 누가 그 아이를 보나요. 다시 어떻게든 내가 돌봐야 할 텐데, 난 그럴 여력이 없어요.”
그는 14년 동안 딸을 홀로 돌보다 결국 시설에 맡겼다. 딸은 걸핏하면 사라졌다가 다쳐서 집에 돌아왔다. 밤에는 딸의 발목을 자신의 발목과 묶어야 했다. 밤늦게 나갔다 다칠 것을 생각하면 묶어두는 편이 나았다. 박씨와 남편은 함께 농사를 지었다. 딸을 돌볼 짬을 내기 어려웠다. 남편은 “아이가 잘못된 건 다 엄마 탓”이라는 타박만 했다. 박씨의 속이 까맣게 멍들었다. 딸은 갈수록 힘이 세졌다. 박씨가 동네를 헤매는 시간도 점점 늘었다. 딸이 열네살이 되던 해, 박씨는 딸을 시설로 보냈다.
장애인 복지 제도가 없다시피 했던 1980년대 초, 혼자 장애인 자녀를 돌보다 힘에 부쳐 시설의 문을 두드린 사람은 박씨뿐이 아니다. 부쩍 큰 딸을 안아서 옮길 수 없었다는 아버지부터 자신과 같은 장애를 가진 아들을 돌보기가 힘들었다는 어머니까지…. 사회의 아무런 도움 없이 홀로 아이를 기르다 결국 시설에 맡기고 만 부모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이들에겐 고통스러운 일상을 되풀이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 활동지원사 등 장애인 자립 지원 제도가 있다고 해도 두렵긴 마찬가지다. “나와도 어떤 곳에서 살게 될지,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데 내게 부담이 오지 않으리라는 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죠? 이제 나도 누군가의 부양을 받아야 할 나이예요.”
딸을 시설에 맡긴 한 아버지도 마찬가지 얘기를 했다. “내 딸은 24시간 보호가 필요한 아이인데 자립하면 시설처럼 철저한 관리를 받을 수 있을까요? 그러지 못한다면 결국 나랑 아내 부담으로 넘어올 텐데, 우린 그런 형편이 안 돼요. 아내가 다른 손주도 돌보고 있고 몸도 안 좋고요.”
이들에게 자녀의 자유는 사치다. 그저 안전한 삶이면 다행이다. 한정영(가명)씨는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할 뻔한 30여년 전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쿵쾅댄다. 초등학생이었던 아들이 혼자 시내에 나갔다 차에 치일 뻔했다. 지적장애를 가진 한씨의 아들은 열여섯살 때 시설에 들어가 마흔일곱살이 된 지금도 시설에서 살고 있다. “시설이 답답할 순 있어도 운명이니까 포기하고 살자는 얘기를 아이에게 하곤 해요.”
시설장애인들이 자립을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도 안전이다. 중증 뇌병변 장애를 지닌 이기중(가명)씨는 “사회에서 일해보고 싶다”면서도 “시설 밖으로 나가면 시설에 있을 때와 똑같이 건강을 관리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했다. ‘향유의집’ 생활재활교사 신예순(57)씨도 같은 생각이다. 그는 “시설은 가장 투명하고 안전한 곳”이라고 확신했다. “솔직히 현 제도상에서 좋은 활동지원사를 만나는 건 전적으로 이용인의 운에 달린 거잖아요. 검증되지 않은 활동지원사가 이용인의 돈을 함부로 사용하고 폭력을 행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시설은 모든 업무를 일일이 기록하고 승인받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죠.”
‘향유의집’ 생활재활교사 박종순(57)씨도 “자립할 능력이 없는 중증 장애인은 시설에 남아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전제는 있다. 시설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 “입소자들이 사생활을 보장받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방향으로 시설 운영이 개선될 필요가 있어요.”
장애인 지원이 ‘시설’에서 ‘자립 지원’으로 바뀌면서 불거지고 있는 고용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향유의집’을 운영하는 프리웰재단은 대형 시설을 폐쇄하고 1~2명이 함께 사는 자립지원주택을 여러개 운영하는 방향을 추진하고 있다. 시설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의 고용보장이나 고용승계에 대해 재단도, 서울시청도 확실하게 밝힌 바가 없다. 사회복지사 최윤숙(43)씨는 “현재 업무를 그대로 할 수 없을까봐 불안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립을 원하는 장애인들의 의사를 꺾을 수는 없다. “고용은 사용자나 정부에 요구해야 하는 거지 이용인들이 시설 밖으로 나가려는 것을 막아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불안하다는 최씨가 정확하게 말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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