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16일 인천공항을 통해 국내 송환되는 김경준씨(오른쪽 두 번째)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수사당국이 지난 22일 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출국을 가로막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김 전 차관의 말처럼 2주일간 타이에 머물다 자진 귀국했을 수도 있지만, 한국행을 거부하며 사실상 도피생활을 시작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경우 정부는 범죄인 인도 청구 등 국내 소환 절차를 밟았을 것이지만 그 과정은 복잡하고 지난했을 것이다.
‘범죄인 인도 청구’는 범죄를 저지르고 다른 나라로 도망친 피의자를 자국으로 소환하기 위한 제도다. 우리나라는 1988년 ‘범죄인 인도법’을 제정한 뒤 미국과 중국, 일본, 유럽연합 등 70여개국과 인도조약을 맺었다. 국가별로는 세부적 차이가 있지만, 기본 요건은 비슷하다. 범죄인 인도를 청구하려면 최소 1년 이상 중형으로 처벌 가능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볼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김 전 차관의 혐의로 거론되는 뇌물죄는 기본적으로 형량이 5년 이하의 징역형이기에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검거·체포 등으로 신병을 확보했더라도 국내 송환까지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미국, 유럽 등에서는 범죄인 인도 심사와 관련해 불복 절차를 두고 있는 까닭이다. ‘이태원 살인사건’의 주범 아서 존 패터슨(40)은 2011년 5월 미국 법무부가 검거했지만 법원의 범죄인 인도 결정에 항소하며 지연전략을 썼다. 결국 4년4개월 만인 2015년 9월에야 국내에 들어왔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장녀 유섬나씨도 2014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체포됐지만, 유럽인권재판소에 송환 불복 소송을 제기해 3년 뒤에야 귀국했다.
도주한 범죄인을 압박하기 위해 정부는 ‘여권 무효화 조처’라는 카드도 꺼내든다. 여권이 무효화되면 ‘불법체류자’ 신분이 돼 처음 간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게 불가능해진다. 국정농단 사건의 핵심 인물인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23)씨가 2017년 1월 덴마크에서 체포됐을 때 한국 정부는 정씨 여권을 직권 무효화했다. 정씨가 불법체류 신분이어야 덴마크 정부의 강제 추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앞두고 국군기무사령부 계엄령 문건 작성 지시 혐의를 받는 조현천(60·육사 38기) 전 기무사령관도 미국으로 출국한 뒤 귀국을 거부하자 외교부가 여권 효력을 정지한 상태다.
때로는 범죄인 송환 과정에서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2007년 11월 미국 연방 구치소에 갇혀 있던 ‘비비케이(BBK) 사건’의 주인공 김경준(당시 41살)씨가 미국 로스앤젤레스(LA) 공항에서 송환될 때 같은 경우다. 2004년 체포된 이후 한국 송환을 거부하던 김씨는 돌연 한국행을 결심하며, 당시 한나라당 유력 대선 후보였던 이명박 전 대통령이 비비케이 실소유자라고 주장했다. 그의 국내 송환을 앞두고 로스앤젤레스 공항으로 국내외 언론사 기자 50여명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오전 7시부터 이튿날 새벽 1시까지 하루 4~5회씩 서울로 떠나는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탑승자를 뒤졌다. 통상적으로 한국 검찰은 국내 영토로 간주하는 국적기에 범죄인을 태워 체포영장을 집행하기 때문이다.
11월15일 오전 6시께 김씨가 구치소에서 출발했다. 그날 오전 국적기 노선은 3편. 10시10분과 11시5분 대한항공 비행기가 떠나고 마지막으로 낮 12시10분 아시아나항공 OZ201편만 남았다. 기자들은 비행기에 타는 승객들에게 김씨가 있으면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일부 기자들은 아예 이 비행기에 탑승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씨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 마지막 비행기가 하늘로 날아오른 직후 한국 법무부에서 보낸 문자메시지가 취재진 휴대전화로 들어왔다. ‘김경준 로스앤젤레스 출발.’
김씨가 송환 과정에서 기자들에게 보이지 않은 이유는 첫째, 미국 연방 검찰이 공항 출국장 통로를 피해 비행기가 서 있는 활주로로 직접 버스를 타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둘째, 검찰 호송팀이 일반적으로 앉는 일반석 맨 뒤쪽이 아닌 승무원 휴식 공간인 ‘벙커’에 몸을 숨기고 13시간 동안 버텼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같은 비행기에 함께 탔던 기자들조차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김씨 행방을 파악하지 못했다. 김 전 차관이 타이 출국에 성공했다면 김씨보다 더 드라마틱한 국내 송환 작전이 펼쳐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