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마가 덮친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 마을 모습.
5일 오전 9시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 마을회관. 태풍과 같은 강풍이 몰고 온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주민 스무명 가량이 모여서 구호 물품을 나누고 있었다. 이번 화재의 최초 발화지인 원암리 현대오일뱅크 맞은편 전신주에 달린 개폐기에서 2.2㎞가량 떨어진 이 마을은 발화지에서 강풍을 타고 넘어온 화마에 120가구 가운데 50~70가구 정도가 소실됐다. 화마로 무너진 잿더미 같은 집 근처에는 얼굴에 그을음을 묻힌 개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당의 장독은 열기에 모두 터져서 깨어져 있었고, 농기계도 앙상한 재로만 남았다.
화마가 덮친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 마을의 장독들이 깨어져 있는 모습.
불에 탄 집 앞에서 만난 원암리 부녀회장 한순희(59)씨는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한씨는 “전부 타 버렸다. 집이 날아갔다, 몽땅”이라고 말하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한씨는 “남편이 산불 감시원인데, 저녁 7시께 둘이서 저녁 먹고 티브이를 보다가 마을회장이 전화로 ‘불난 거 아느냐’고 알려와서 밖으로 나와봤다. 그런데 2~3분 뒤 집 뒤쪽 하늘 위에서 불씨가 날아와서 뚝 떨어지더니 집에 불이 확 붙었다”고 말했다. 한씨는 이어 “양양에 있는 사돈댁에 가서 자고 오전 6시 반에 다시 와보니까 집이 이렇게 모두 타버렸다. 처음 봤을 때는 눈물도 나고 그랬는데, 이젠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화마가 덮친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 마을 주민 이상준씨가 “불을 헤집고 나가서 얼굴이 그을렸다”고 말하고 있다.
원암리에 사는 또 다른 주민 이상준(65)씨는 전날 밤 화마가 덮치던 상황을 악몽처럼 기억했다. 이씨는 전날 덮친 화마로 건평 168㎡ 집이 모두 소실됐다. 이씨는 “저녁 7시 넘어서 불길이 오는 걸 보고 양말 한짝도 챙기지 못하고 집에서 나와서 차를 몰고 마을에서 탈출했다. 강풍을 타고 불꽃이 눈이 내리듯이 번져오더니 차에도 불꽃이 눈송이처럼 내려왔다. 모든 것이 30분 안에 벌어진 일”이라며 “밤새 뭔가 불길이 덮여올 것 같아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아침에 집에 와봤더니 집은 모두 날아갔다. 우황청심환 먹고 진정하고 있는데, 이렇게 해서 사람이 살겠느냐. 당장 갈 데도 없다. 국가가 배려를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같은 마을 주민 정점순(69)씨도 “변압기 쪽에서 불이 난 뒤 우리 아저씨와 10살과 11살 손녀 둘이랑 집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집을 둘러싸고 불이 붙어 있어서 차로 불을 뚫고 나갔다”며 “돌아와서 보니 집이 이렇게 다 탔다. 기도 안 찬다. 내 평생 처음 겪는 일인데, 이걸 언제 모두 수리하나”라며 한숨을 쉬었다. 정씨 남편 김동아(72)씨도 “농산물 건조기도 다 탔고, 집이 모두 주저앉아서 새로 지어야 한다”며 “당장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군청에서는 아직 연락 온 게 없었다”고 말했다.
글·사진 속초/이주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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