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서울 종로구 원서동에 있는 공감 사무실에서 (왼쪽부터) 염형국 변호사, 조미연 변호사, 김지림 변호사가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며 활짝 웃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공익변호사는 변호사업계의 블루오션입니다.”
2002년 사법연수원에 들어온 지 한 달이 채 안 된 어느 날, 염형국 변호사는 당시 박원순 아름다운 재단 상임이사(현 서울시장)의 사법연수원 특강을 듣고 눈이 번쩍 뜨였다. “판검사, 대형로펌 변호사는 경쟁이 너무 치열한 레드오션이에요. 남들이 가지는 않지만 보람된, 또 할 수 있는 일도 무궁무진한 공익변호사가 이 시대의 블루오션이라 생각합니다.” 민형사 판례를 달달 외워 고등학생처럼 시험 보는 사법연수원 교육 시스템 안에서 판검사는 일찌감치 마음을 접었다. 염형국 변호사는 그때 비로소 ‘내가 쓰일 곳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올해로 창립 15돌을 맞는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이 태동한 순간이다. 공감은 공익변론을 전업으로 하는 변호사들이 모인 국내 첫 공익변호사 모임이다.
“저는 그때의 일을 기사로 접했는데 기사에는 ‘박 변호사 말씀에 사법연수원생이 강의장 밖까지 (그를 따라) 뛰쳐나왔다’고 적혀 있어서 정말 감명받았거든요. 기사 읽어봤다고 말씀드렸더니 염 변호사님이 ‘그날 밖으로 뛰쳐나가진 않았는데?’ 이러시더라고요.”(조미연 변호사)
“네. 따라나가진 않았어요.”(염 변호사)
지난 24일 서울 종로구 원서동에 있는 공감 사무실에서 만난 공감 창립멤버 염형국(45·사법연수원 33기) 변호사, 김지림(30·변호사시험 5회) 변호사, 조미연(30·변시 7회) 변호사가 공감이 태동한 2002년 봄에 대한 ‘팩트체크’를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염 변호사를 비롯해 4명으로 시작한 공감의 식구는 현재 12명(변호사 9명·실무간사 3명)으로 늘었다. 김지림 변호사는 2017년에, 조미연 변호사는 이번달에 합류한 새내기 식구다. “늘어난 식구 만큼 공감이 걸어온 길의 저변이 넓어졌고, 1호 공익변호사 그룹으로서 짊어진 책임감도 늘었다”고 염 변호사는 말했다.
15살 된 1호 공익변호사 그룹
공감은 2004년 1월 ‘아름다운 재단’에서 첫발을 뗐다. 익명의 독지가가 ‘공익변호사를 양성해달라’며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에 기탁한 5천만원으로 아름다운 재단이 만들어졌고, 아름다운 재단은 그 뜻을 이어받아 공감을 만들었다. 염 변호사의 연수원 동기인 소라미, 정정훈, 김영수 변호사가 의기투합했다. “다른 변호사 월급의 3분의 1만 받으며 일해야 한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낮은 자리에서 임하는 용기로 소외된 희망을 되살리자”는 말에 마음이 홀렸다고 한다. 공익변호사라는 단어조차 생소할 때였다. ‘비영리 전업 공익변호사’를 대외 홍보문구로 사용했다.
“우리끼리 ‘공익’으로 부를 건가, ‘인권’으로 부를 건가 의논했었죠. 군사독재 시절 고문 피해자들을 도운 변호사를 ‘인권변호사’라고 했는데, 그보다 더 넓은 범주에서 인권보호 활동을 하는 2·3세대 변호사라는 점을 고려했어요.”(염형국) 공감은 2012년 12월 아름다운 재단에서 자립했다.
여성·난민·빈곤·노동·성소수자 등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법률 지원을 호소하는 이들의 손을 맞잡았다. 버마 민주화 활동가 9명의 난민 불인정 취소 소송(2006년), 한국인 부부에 의해 대리모로 이용된 베트남 결혼이주여성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2009년)에서 승소했다. 이른바 인터넷논객 미네르바의 구속으로 논란이 됐던 전기통신기본법 47조 1항(2010년), 긴급조치 9호(2011년)의 위헌 결정도 공감의 문제 제기에서 비롯됐다. 장애인권 문제에 집중한 염형국 변호사는 2016년 정신병원 강제입원 헌법불합치 결정을 이끌어냈다. 지난해에도 제주 예멘 난민 문제, 직장 내 갑질 문제, 낙태죄 폐지 등 주요 사회 현안과 관련한 활동을 펼쳤다.
공감이 맡은 공익 소송은 2017년까지 576건에 이른다. 판례도 없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다 보니, 개별 소송을 넘어 사회제도 개선까지 고민하게 됐다. 그동안 사회인식과 제도 개선을 위해 61건의 연구 조사를 진행하고, 난민법 제정 등 88건의 법 개정 활동을 펼쳐온 배경이다. 세월호, 가습기 살균제, 스텔라데이지호 참사 등 사회적 참사가 연이어 발생했고 공감의 변호사들은 현장으로 달려갔다.
“최근엔 국가적 재난 사태에서 피해자들을 대리하고 변호하는 게 중요한 공익 활동의 영역으로 부상하고 있어요. 2014년 세월호 참사 다음날 공감의 황필규 변호사가 바로 참사 현장으로 내려갔죠. 공익변론 한다면서 사무실에 접수된 사건만 할 수는 없잖아요. 문턱을 낮추는 걸 넘어서 현장으로 직접 가야죠.”
공감의 김지림(왼쪽부터), 조미연, 염형국 변호사가 2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원서동에 있는 공감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공감 보고 자란 ‘성덕’ 품는 요람
공익변호사의 도움을 요청하는 곳들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공감의 식구도 늘었다. 김지림 변호사와 조미연 변호사는 공감의 활동을 보고 자란 막내급 변호사다. 이들은 스스로를 공감의 ‘성덕’(성공한 덕후)이라 부른다.
조 변호사는 2010년 공감의 탄생 일화를 담은 신문기사를 읽으면서 공감의 존재를 알게 됐다. 2013년 공감에서 자원활동을 했고, 올해 4월 공감에 입사했다. 학자금 대출도 남아 있었지만, 조 변호사의 ‘덕심’을 이기진 못했다. “자원활동할 때 선배들을 보고 ‘나중에 변호사가 된다면 이렇게 살고 싶다. 이렇게 변호사로 활동하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친구들한테 자랑해요. 나는 성공한 덕후라고요.”
김 변호사는 입사 3년 차인데도 공감으로 향하는 출근길이 아직도 설렌다고 한다. “변호사시험에 합격한 뒤 법무법인 송무팀에서 실무수습을 했어요. 그러다 과로로 사망한 택시기사의 회사 상대 손해배상 소송을 맡으면서 ‘내가 진심으로 잘 할 수 있는 것은 소수자 권리를 대리하는 일이구나’ 깨달았죠.”
창립 멤버 중 염 변호사를 제외한 3명은 공감을 떠났지만, 2~3년에 한 번씩 비정기적으로 새 식구를 맞아들였다. 활동 영역도 넓어졌다. “더 낮은 곳으로, 더욱더 낮은 곳으로 향하는 게 공감의 가치”라는 김지림 변호사는 난민, 성소수자, 국제인권 분야에 몰두하고 있다. 억울하게 범죄 가해자로 지목돼 구금당한 외국인을 대리해 국가 배상 소송을 맡았고 승소했다.
재정적 어려움은 늘 발목을 잡는다. 공감은 법률지원 활동에 대한 수임료를 받지 않는다. 1800여명의 개인 기부회원이 공감 수입의 74.7%를 지탱하고 있다. 나머지는 기업과 로펌, 단체 등의 기부다. 지난해 수입은 9억4326만원이었다. 이 안에서 변호사·간사 인건비, 사무실 운영비 등을 지출해야 한다. 공감의 변호사들은 매주 주간회의를 열 때마다 숫자로 표현된 공감의 재정 상황을 정기 점검한다. “저 첫출근하고 주간회의에 참석했는데, ‘올해 얼마가 모자란다, 얼마가 모여야 한다’고 이야기가 오가더라고요. 내가 내 몫을 잘하고 있나, 그만큼의 역할을 하고 있나 주간회의 때마다 되돌아보게 되더라고요.” 김 변호사가 말했다.
염 변호사는 “여유가 되어서 사람을 뽑는다기보다는, 일단 변호사를 뽑고 그에 맞춰서 우리가 열심히 모금하자는 마음이다. 예비 법률가들을 공익 인권 분야로 이끄는 것도 ‘1호 공익변호사 그룹’이 짊어진 책무다. 제2, 제3의 공감이 생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공감은 법조공익모임 ‘나우’와 손잡고 2014년부터 인권·노동단체 등에서 상근하는 공익변호사를 지원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이 사업으로 지금까지 11명의 공익변호사가 난민, 노동, 성소수자, 장애 인권단체에서 활동을 했다. 공익변론을 전업으로 하는 공익변호사 단체들도 여러 곳 생겼다.
공감은 국제인권 분야 등으로 활동의 저변을 넓혀갈 계획이다. 올해 황필규 변호사를 센터장으로 해 국제인권센터를 설립한다. 염 변호사가 웃으며 말했다. “올해도 열심히 뛰어야죠. 공익 인권변호사가 지속가능하려면 첫 주자가 망하면 안 되잖아요.”
고한솔 장예지 기자 so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