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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산불 두달 됐는데 해결된 게 뭐이가…아직도 불냄새가 나”

등록 2019-06-03 05:00수정 2019-06-03 10:39

91년부터 지난 4월까지 21차례 산불
4월 산불 첫 발화 원암리서만 5차례
매년 4월 태백산맥 넘어 ’불바람’
잿더미 위에 지은 집 또 잿더미

검은 폐허 볼 때마다 치솟는 분노
피해 확증 더뎌 철거 계속 유예
산불 난 지 50여일 지나서야
비대위-한전 공동 손해사정인 선임
죽은 불이 여전히 삶을 태우고 있었다.

■ 불타는 마음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창구를 더 열어요.”

원암리(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주민 김경학(가명)이 짜증을 섞어 요구했다.

“우리도 사람이 모자라요. 여기 상황 아시면서.”

센터 공무원이 그를 보며 난감해했다. 5월22일 토성면 행정복지센터(천진리)에서 소란이 일었다.

“끼어들지 마세요.”

“나는 아침 8시30분부터 기다렸어요.”

9시 센터 문이 열리자마자 산불 이재민들이 창구로 몰려들었다. 소수의 직원들이 다수의 이재민들을 감당하지 못해 창구 앞은 북새통이 됐다.

전날 김경학은 ‘고성 한전발화 산불피해 이재민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가 보낸 문자를 받았다. 센터에서 ‘피해사실 확인서’(산불 이재민들이 자치단체에 신고한 피해 내역)를 떼 비대위에 접수하란 공지였다. 문자 발송 직전 비대위는 한국전력과 공동 손해사정인 선임을 위한 협약을 체결했다. 양쪽에서 위임한 손해사정인들이 이재민들의 피해신고 내역을 들고 산불 현장을 다니며 피해액을 산정하는 방식이었다. 산불 책임(한전 전신주에서 최초 발화)을 물어온 비대위와 “합당한 조처를 다 하겠다”고 밝힌 한전이 배·보상 근거 마련을 위해 산불 50여일 만에 밟은 첫 절차였다.

한참 만에 손에 쥔 확인서를 들고 김경학이 행정복지센터 마당 구석의 한 칸짜리 컨테이너로 들어갔다. 확인서를 접수하느라 컨테이너(비대위 사무실) 안도 미어터졌다.

“손해사정액이 최종 금액이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그 내용을 가지고 한전과 협상해서 확정하는 거예요.”

밀려드는 서류를 접수하고, 발급 절차를 묻는 말에 답하고, 걸려오는 문의 전화를 받느라, 비대위 사무장 박종길(41)은 정신이 달아나는 듯했다. 세입자로 불을 만난 그는 피해 물품 40여종을 적은 확인서를 스스로 접수했다.

산불 피해를 입은 강원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의 산이 검게 그을려 있다. 고성/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산불 피해를 입은 강원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의 산이 검게 그을려 있다. 고성/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불 꺼진 잿더미가 눈에 익을수록 주민들의 마음은 재가 돼갔다.

지난 4월 발생한 강원 산불은 역대 최다 이재민(566가구 1289명)을 냈다. 고성군의 경우 피해 건물(주택, 창고, 농축산 시설 등) 867동 중 철거 동의가 이뤄진 건물은 344동(5월31일 현재 257동 철거)뿐이었다. 피해액을 확증받지 못한 상태에서 피해 증거(피해 건물)만 사라질까 우려한 주민들은 철거를 거부했다.

정부의 피해 조사는 건물·시설 중심으로 이뤄졌다. 산불 진화 일주일 뒤 행정안전부는 80여명의 정부 합동조사단을 현장으로 내려보냈다. ‘전파’ ‘반파’ 등으로 피해 형태와 규모를 조사해 주거지원금(전파 1300만원, 반파 650만원) 지급의 근거로 삼았다. ‘건물 안’(살림살이와 농기구 등)과 ‘건물 밖’(가축·농작물·나무 등)의 피해 금액은 산정하지 않아 이재민들이 직접 한전과 결정해야 하는 문제로 넘겨졌다.

모내기용 모판을 나르던 원암리 주민 이치용(가명·59)은 막걸리를 들이켜며 가슴속 불을 달랬다. 그는 잿더미를 바라볼 때마다 분노를 누르지 못했다.

“불난 지 두 달이 다 돼가는데 해결된 게 뭐이가. 군에서 철거하란다고 동의서 쓰고 철거해버리면 무슨 근거로 보상을 받나? 빨리 피해액을 결정해줘야 철거를 해도 하지. 느는 건 술병하고 발악밖에 없어. 씨발, 내 속이 전쟁통이다.”

■ 불의 마을

원암리는 ‘역동네’였다.

원암리를 통과해야 미시령을 넘을 수 있어 그렇게 불렸다. 설악산 울산바위가 마을을 내려다봤다. 수려한 경관 아래로 휴양시설(아이파크콘도·일성설악콘도 등)과 귀농인들이 모여들었다. ‘서울-양양 간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도시 은퇴자들이 들어와 노년을 보냈다. 전직 장관·외교관·병원장 등도 마을에 새 집을 지었다. 10여분이면 바닷가와 속초시에 닿았다. 이영도(55·설악의정원 대표)가 마을 입구에 펜션을 낸 이유였다.

그곳은 불의 마을이었다.

2019년 4월 산불은 산림피해 면적으로 역대 3번째(2832㏊)였다. 2000년 4월 동해안 산불이 최대(2만3138㏊)였고, 1996년 4월 고성 산불이 2번째(3782㏊)였다. 고성군 토성면은 세 산불의 공통 발화 또는 피해 지역이었다. 1996년 산불은 토성면과 접한 죽왕면 마좌리(군부대)에서 나서 토성면 운봉·학야·도원리 등으로 번졌다. 토성면 학야리(군부대)에서 시작된 2000년 불은 강풍을 타고 운봉·백촌리와 죽왕면 야촌·삼포리로 넘어갔다. 2019년 산불은 토성면 원암리(전신주)에서 시작됐다. 1991년부터 지난 4월까지 토성면에선 크고 작은 산불이 21차례(국립산림과학원 산불 통계) 발생했다. 원암리에서만 5차례 발화했다.

매년 4월이면 태백산맥 서쪽에서 동쪽으로 ‘불바람’(火風·양간지풍)이 불었다. 그때마다 강원도는 산불 방지 총력 대책을 발표하며 그 바람에 대비했고, 주민들은 화(火)를 돋워 바람의 화(禍)를 부르는 일 없길 바라며 조바심했다. 강원도 공무원 6분의 1을 산불 예방에 배치했다는 보도자료가 언론사에 배포된 날(4월4일) 저녁 미시령 톨게이트 앞 전신주(원암리 394-4)에서 불꽃이 일어 고개 아래로 날아갔다. 뱀처럼 허리를 출렁이는 용촌천(토성면 원암리~성천리~용촌리를 거쳐 동해로 합쳐지는 냇물) 주변의 가옥들에 달라붙었다. 불덩이 중 하나가 원암리 김영자의 집에 내려앉았다.

불의 흉터가 사라지지도 않았는데 새 불을 만났다.

100여년 된 낡은 한옥이었다. “일제강점기 미시령 숯가마에서 옮겨붙은 불이 원암리 마을을 다 태웠을 때 잿더미에서 지은 집”이라고 50여년 전 마을에 시집왔을 때 김영자는 전해 들었다. 불타 새까매진 집터에서 불타 새까매진 된장만 불타지 않은 냄새를 피워 올렸다. 농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영도의 펜션도 불을 맞았다. “뒤에서 날아온 불씨는 뒷마당에서 꺼졌는데 옆집에 떨어진 불이 바람을 타고 와 펜션을 덮쳤”다. 하던 사업을 정리하고 남은 재산을 끌어모아 낸 펜션이 지금도 매일 밤 이영도의 눈앞에서 불탔다.

그날 저녁 양문석(55·공연장비 대여업체 ‘설악레저’ 대표)이 친구 이영도의 전화를 받았다.

“너희 회사로 불이 넘어가.”

부부가 서울로 돌아가는 딸을 터미널에 바래다주고 오던 길이었다. 소방대가 도로를 막아 마을로 들어가지 못했다. 20m 높이로 치솟은 불길이 집과 회사로 옮겨붙는 것을 멀리서 지켜봐야 했다. 그의 트럭 4대가 주차된 자리에서 불폭탄을 맞았다. 언제든 이동할 수 있도록 트럭에 실어둔 음향 장비들이 트럭 짐칸에서 불을 뒤집어썼다. 불은 바람의 의지에 따라 사람의 운명을 갈랐다. 그의 전재산(25년 동안 사모은 20억여원의 장비)을 태운 불덩이는 땅을 밀고 가는 대신 바람을 타고 날아가 400여m 저편에 떨어졌다.

양문석의 스피커가 5월4일 ‘고성 산불피해 치유음악회’(봉포리어촌계 주차장)에서 쾅쾅거렸다. 대출받아 산 트럭에 대출받아 산 장비를 싣고 양문석은 주관사 자격으로 음악회에 음향을 지원했다. 불을 일으킨 바람은 불이 진압된 뒤에도 떠나지 않았다. 바람이 공연장 마이크를 때리며 스피커의 노랫소리를 찔러댔고, 그 바람에 긁힌 철판들이 양문석의 불탄 회사 마당에서 불에 녹아내린 채 찌걱찌걱 울었다. 한 달을 넘기고 두 달이 차도 그의 폐허는 그대로였다.

원암리(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마을회관 근처 펜션 ‘설악의정원’이 불타 무너져 있다.
원암리(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마을회관 근처 펜션 ‘설악의정원’이 불타 무너져 있다.
■ 불과 함께 살다

불이 그들과 함께 살았다.

양문석의 고향(죽왕면 인정리) 마을은 1996년 고성 산불 때 불의 공격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가 호스로 물을 뿌리며 불의 접근을 막아 간신히 집을 지켜냈다. 그 불에 죽왕면 삼포1리 주민들은 한국전쟁 때 피란 와 지은 슬레이트집들을 잃었다. 이재민 50여가구가 삼포2리(전체 174가구)로 이주해 현재의 민박단지를 형성했다. 그때 집을 살린 부모가 23년 뒤 산불이 쓸고 간 아들을 근심했다.

“아직도 냄새가 나.”

삼포2리 이장 함형복(73)은 마을을 둘러볼 때마다 19년 전의 불냄새를 맡았다. 삼포2리엔 세월이 덜 탄 집들이 많았다. 2000년 4월 동해안 산불 때 무너져 새로 지은 집들이었다. 1996년 삼포1리 이재민들이 옮겨간 삼포2리의 하늘에서 4년 뒤 “도깨비불이 날아다녔”다. 함형복도 그 불에 축사와 소들을 빼앗겼다.

큰불의 역사는 인간 재난의 역사였다. 1996년 산불 피해자들 중 2000년에 다시 해를 입은 10여 가구가 삼포리에 있었다. 남편을 일찍 떠나보낸 박석전(70)은 혼자서 아이 둘을 키웠다. 1996년 산불 때 그의 소 10마리가 불탔고 2000년 산불로 집이 전소했다.

“토성에서 불이 났어요. 일단 대기하고 계세요. 급해지면 다시 방송할 테니까 그때 마을회관으로 피하세요.”

4월4일 밤 9시2분 함형복이 마을방송으로 알렸다. “불” 소리만 들으면 공포에 떠는 마을에서 “불” 소리만 들으면 한이 맺히는 박석전은 94살 노모를 두고 집을 나왔다. 오르막길을 올라간 그가 전신주(집에서 30여m) 아래에 섰다. 토성면 쪽을 바라보며 불길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을 때 강풍에 날아온 지붕이 전신주의 반사경을 때렸다. 첫번째, 두번째, 그리고 세번째 산불. 산불 역사에 기록된 세 차례의 초대형 불이 마침내 그의 죽음을 만들어냈다. 반사경이 박석전의 머리로 떨어졌다. 사람이 쓰러져 있다는 소식을 들은 함형복이 차를 끌고 내려가 마을회관으로 옮겼다. 막힌 길을 뚫고 들어온 구급대가 심폐소생술을 했으나 숨을 거둔 뒤였다. 홀로 남은 할머니를 손녀가 데려간 뒤 텅 빈 집 앞엔 먹을 사람 없는 배달 우유들이 쌓여갔다.

“아까시나무 꽃(5월께 개화)이 피기 전까진 안심할 수 없다.”

불바람의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소방경 마기완(강릉 환동해 특수재난대응단)과 동료들은 주문 같은 다짐을 되뇌며 무탈한 4월을 기원했다.

불이 터졌을 때 마기완은 원암리에서 멀지 않은 속초시 학사평으로 출동했다. 군부대 화약고를 방어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화약고가 폭발하면 사태는 산불의 차원을 넘어설 수밖에 없었다. 화약을 보관한 컨테이너 환풍구 구멍으로 불꽃이 튀었다. “25년 소방관 생활 동안 가장 무서운 불”이었다. 공포를 견디며 불을 잡은 그가 이튿날 원암리를 지났다. 첫 불이 시작된 마을의 참혹한 장면에 그는 “불 끄는 자로서 자괴감”을 느꼈다.

그는 불과 함께 일했다.

세 차례의 ‘역사적 산불’에 모두 투입됐다. 임관 2년도 안 됐던 1996년엔 “불에 도망만 다니다 퇴각”했고, 2000년 산불 땐 워크숍 중 비상이 걸려 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때도 토성면에서 집을 잃은 노인들이 마기완 앞에서 “이제 어떻게 사냐”며 눈물을 흘렸다.

대형 산불을 만나 긴급 출동할 때마다 마기완은 길이 좁아 어려움을 겪었다. 농촌 마을 특성상 건물들이 드문드문해 소화전(소방기본법상 일정 규모 이상의 마을이어야 소화전 설치 의무)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주택과 인명 구조에 초점을 맞춘 소방청과 산림보호에 주력하는 산림청의 행동반경이 달라 ‘진화 공백’이 생긴다는 생각도 들었다. 붉은 불꽃이 진 뒤 하얀 아까시꽃을 보는 그의 눈이 시렸다.

죽왕면 삼포2리 함형복 이장이 산불 당일(4월4일) 주민 박석전씨(사진 왼쪽 단층 건물 거주)가 쓰러져 있던 전신주 쪽을 올려다 보고 있다.
죽왕면 삼포2리 함형복 이장이 산불 당일(4월4일) 주민 박석전씨(사진 왼쪽 단층 건물 거주)가 쓰러져 있던 전신주 쪽을 올려다 보고 있다.
이재민 ‘잊히지 않으려’ 몸부림
정치인·장관 만나고 시위하고
“집 불타는 건 막지 못했지만
사람 가슴 불타는 건 막아야 국가“

불에 놀라 손이 덜덜 떨리고
경운기 트랙터 불타 숯 됐지만
옥수수 심고 밭매고 다시 호미질
28일께부터 7.3평 컨테이너 입주

■ “잊히지 않겠다”

<상담심리학>.

비대위 사무장 박종길은 국회고성연수원(토성면 도원리)에서 임시 주거를 해결했다. 옷, 물, 라면, 계란, 스킨로션…. 구호품들밖에 없는 방 안에서 그의 재산은 학점은행제 교과서 두 권뿐이었다. 불구덩이에서 몸을 피하며 그가 챙긴 유일한 물건이 그 책 두 권이었다. 그 다급한 상황에서 왜 상담심리학 교과서를 가져 나올 생각을 했는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원암리에 정착하기 전 박종길은 타지에서 학원을 운영했다. 상담에 관심이 생겨 아로니아 농사(농장과 체험학습장 전소)를 짓는 틈틈이 공부했다. 자신의 차를 맹렬하게 뒤쫓던 불길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화끈거렸다. 트라우마 때문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함께 살아남은 책을 읽으며 알게 됐다.

4월24일 박종길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 비대위원들과 연락하며 플래카드 문구를 조율하고 제작을 맡겼다. 오전 10시께 그가 의뢰한 플래카드를 들고 이재민들이 구호를 외치며 토성면 행정복지센터 2층 브리핑룸으로 들어왔다. 그들 앞에 한전 사장 김종갑이 서자 고성들이 터졌다. “살인자”란 격앙된 말이 나왔고 “배·보상을 거부하고 소송할 거냐”는 고함들이 분출했다. 김종갑은 “수사 결과와 관계없이 민사적 책임을 다하겠다”며 머리를 숙였다. 전날 경찰은 한전 속초·강릉지사를 압수수색했다. 김종갑은 배·보상 협상을 담당할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하겠다고 비대위에 약속했다.

바람이 불을 키웠지만 바람엔 죄가 없었다.

불을 바람의 탓으로 돌리는 말들이 나올 때마다 주민들은 “한전에 면죄부를 주려 한다”며 폭발했다. 한전 사장 사과 2주일 전(4월11일) 고성군의 마을별 이재민 대표들이 한데 모여 비대위 구성을 논의했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이 사활을 걸고 논쟁했다. 의견과 의견이 부딪치고 주장과 주장이 충돌했다. 비대위원장 추천과 사퇴가 이어졌고 위원장 선출 절차를 다시 밟는 진통이 거듭됐다. 1996년 고성 산불 피해 배상 과정에서 지역 공동체가 깨졌다며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는 목소리(당시 피해 주민 대책위원장)도 있었다. 어렵게 선출된 비대위원장(용촌리 주민 노장현) 주재로 활동 분과를 정할 때도 격론이 벌어졌다. 그 지난한 과정들을 통과한 이재민들이 대책위를 출범시키고 한전과 정부, 자치단체를 상대로 활동을 시작했다. 한전 앞 시위를 조직하고,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에게 알리며, 그들은 “잊히지 않기 위해” 움직였다. 찾아오는 정치인들과 부처 장관들에게 이재민들의 의견(‘국가가 우선 배상하고 한전에 구상권을 청구하라’)을 전했다. 구호품이 이재민들에게 빠짐없이 전달되도록 조처했다.

그들은 “산불 일주일 만에 잊히고 있다”며 위기감과 고립감을 드러냈다. 비대위 컨테이너 옆 천진초 강당(최초로 설치된 대피소이자 현재 유일하게 유지되는 학교 대피소)엔 여전히 텐트 생활을 하는 이재민들이 있다. 그들이 연수원이나 콘도 등 비교적 생활이 편리한 임시거주시설로 옮기지 않는 까닭도 “여기 있어야 조금이라도 더 오래 기억해줄 것 같아서”(노연우·56)였다. “집이 불타는 것은 막지 못했지만 사람의 가슴이 불타는 것은 막아야 국가”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었다.

5월1일 정부는 ‘강원 산불 피해 종합복구계획안’을 발표했다. 규정상의 주거 대책비(전파 1300만원, 반파 650만원)뿐 아니라 국민이 모은 성금(470여억원 중 전파 3천만원, 반파 1500만원씩)도 정부 지원안에 포함됐다. 복구 재원(1853억원) 대부분이 산림·문화관광·군사 시설에 쓰여 이재민 직접 지원(245억원·12.5%)은 많지 않다고 주민들은 반발했다.

원암리의 불타 버린 집 앞에서 한 부부가 옥수수밭을 매고 있다.
원암리의 불타 버린 집 앞에서 한 부부가 옥수수밭을 매고 있다.
■ 삶은 계속된다

“오늘 산불 발화 지점(전신주)에 200여명이 모여서 이것을 외쳤어요. 제가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한전은 산불 책임을 인정하라! 그러면 뒤에 선 사람들이 ‘인정하라, 인정하라’ 외치고요….”

원암리 이재민 대표 김동아가 마을회관에서 비대위 활동을 보고(4월16일 저녁)했다. 박종길이 말을 보탰다.

“아무래도 불탄 집이 남아 있으면 한전과의 협상에서 증거가 될 수 있으니까 철거는 협상이 끝날 때까지 참으시면 어떨까 싶고요. 개인업자들이 철거(군과 도에선 무상 지원)해준다고 해도 절대 하시면 안 돼요.”

누군가의 눈물은 누군가의 기회였다. 원암마을 입구에서 화재복구 업체의 판촉 펼침막이 바람에 펄럭였다. 무너진 집의 창틀이나 그을린 우편함엔 그들의 홍보 브로슈어들이 꽂혀 있었다. 집은 무너져 흔적만 남았으나 우편물은 주소지로 꼬박꼬박 날아왔다.

전상인(81)이 빨래를 꺼냈다.

이재민들이 한꺼번에 넣어 돌린 빨래들이 마을회관 앞에 놓인 세탁기에서 덩어리째 뒤엉켜 올라왔다. 빨래 더미에서 찾아낸 전상인의 옷이 빨랫줄에 걸려 다시 섞였다.

원암리 마을회관 전후좌우에선 검은 건물들이 탄내를 풍겼다. 회관 뒷벽도 까맣게 그을렸지만 다행히 살아남아 마을 대피소가 될 수 있었다. 원암리는 전체 105가구 중 50가구가 주택 피해(주택 외 피해를 합하면 전체의 80%)를 입었다. 20명의 주민들이 회관 아래층(여 14명)과 위층(남 6명)으로 나뉘어 생활했다.

자원봉사자들이 배달한 밥으로 끼니를 때운 뒤 전상인이 남은 밥을 들고 자신의 부서진 집으로 갔다.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백구’ 앞에 밥을 부었다. 백구의 등엔 불에 탄 흔적이 있었다. 불이 집을 습격한 날 전상인은 개들을 풀어주지 못한 채 대피했다. 돌아왔을 땐 기르던 개 4마리가 “이를 악물고” 죽어 있었다. 그들 밑에 깔렸던 백구만 화상을 입고 살아남았다.

지은 지 20년 된 그의 집에 불냄새가 가득했다. 집이 불탈 때 그 집에서 살아온 시간과 이야기들도 모두 불탔다. 전상인은 1996년 고성 산불 발화지인 죽왕면 마좌리가 고향이었다. 한국전쟁 때 원암리 사람이 됐다. 마흔도 못 된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은 뒤 “젊은 여자 혼자 애들 데리고 산다고 겁나게 업신여김을 당했”다.

“애기들 가르치느라 진 빚을 작년에야 다 갚았는데… 이젠 죽어도 이 집에서 죽어야 하는데… 하이고, 사는 게 너무 지겹구마.”

마을회관에 머무는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 고령의 토박이 주민들이었다. 귀농인들은 주로 펜션을 운영하거나 특산물을 재배했다. 차량이 없거나 돌봐야 할 논밭이 있는 주민들이 마을회관에서 사생활 없이 살았다. 폐허는 타는 불 속이 아니라 불 꺼진 뒤의 잿더미에 있었다. ‘불의 마을’ 사람들은 잿더미에서도 농사를 멈출 수 없었다.

“보면 혈압이 올라서” 불탄 집 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는 최순녀(77)도, “불 때문에 놀라 손을 덜덜 떠는” 고강일(81)도 새벽 5시30분이면 일어나 밭에 쪼그려 앉았다. 옥수수를 심고, 감자밭을 매고, 잡초를 뽑으며 호미질을 했다. 그들 집터에선 숯이 된 경운기와 오토바이가 본래 무엇이었는지 맞혀보라는 듯 뼈대만 남아 바람을 맞았다.

원암리의 모내기는 5월10일께 시작됐다. “바람에 모가 쓰러져서 모내기도 ‘4월 바람’을 피해서 하는”(박종길) 원암리의 올해 농사는 “마음이 내려앉고 정신이 나가 베려 버렸”(신현칠·73)다. 불에 고추 건조기까지 잃어버린 주민들은 기계가 모자라 고추 모종도 줄여 심을 수밖에 없었다.

원암리 이장이 운영하는 육묘장에선 지난해(5만장)보다 모판 생산량을 3만장 늘렸다. 볍씨가 불타 모판을 만들지 못한 집을 위해 정부가 재배를 위탁해 피해 주민들에게 나눠줬다.

모내기가 끝난 논 옆에선 포클레인이 땅을 다졌다. 컨테이너 임시조립주택 두 동이 놓일 자리였다. 고성군에선 이재민 중 251가구(원암리는 22가구)가 컨테이너 주택을 신청(강원도 전체는 340가구)했다. 마을회관과 연수원 등에서 지내던 주민들이 5월28일부터 차례로 입주를 시작했다. 떨려나지 않는 잿더미를 안고 살기에 7.3평 컨테이너는 너무 좁았다. 군청에서 내보내는 녹음방송이 마을회관 스피커에서 웅웅거렸다.

“건조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산불 위험이 있으니 논두렁이나 쓰레기를 태우지 맙시다.”

회관 앞에 앉아 있던 김영준(71)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벌써 다 탔는데 무신.”

글·사진 고성/이문영 배지현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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