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구속기소된 (왼쪽부터) 양승태 전 대법원장, 고영한·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전 대법관)이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자신들의 첫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 이른바 ‘사법농단 사태’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고위 법관들이 기소돼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대법관 이상의 고위 법관들이 이렇게 무더기로 법정에 서는 것은 사법부 역사상 초유의 일입니다. 2019년 3월11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 대한 첫 재판을 시작으로, 진실을 밝히고 유무죄를 따지는 긴 여정이 시작됐습니다. 법정 르포의 방식으로 ‘사법농단 재판’을 중계해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법률가가 쓴 법률 문서라기보다는, 소설가가 미숙한 법률 자문을 받아 쓴 한편의 소설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미리 작성해온 원고도 없었다. 말을 더듬거나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지난달 29일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형사35부 재판부). 이날은 양승태(71) 전 대법원장이 ‘사법농단’ 혐의로 구속된 지 넉 달여만에 열린 그의 첫 정식 재판이었다. ‘피고인 양승태’가 왼쪽 가슴에 흰색 표찰을 달고 법정에 들어서자 피고인석에 나란히 앉아 있던 박병대(62)·고영한(64) 전 법원행정처장(전 대법관)과 변호인단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날 재판에서 그는 검찰의 공소사실 낭독 뒤 한 피고인 모두진술에서 무려 25분간 검찰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는 검찰 수사 결과를 “소설”, “사찰”, “포장”에 비유했다. 그리고 그 수사 결과가 담긴 공소장은 “용두사미”라고 했다. 법원행정처가 재판을 흥정 대상으로 삼아 개입까지 했다고 검찰은 주장하지만, 실체는 없고 남아있는 것은 겨우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이 작성한 문건뿐이라는 취지다.
“공소장 첫머리를 보면 흡사 피고인들이 엄청난 반역죄나 행한 것처럼 거창한 거대담론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재판으로 온갖 거래 행위를 한 것처럼 이야기를 엮어 나가면서 모든 것을 왜곡하며 상상력을 발휘해 줄거리를 만들어내다가, 제일 마지막 결론에 이르러서는 재판거래는 온데간데없고 겨우 심의관들에게 몇 가지 문건과 보고서를 작성하게 했다는 것이 직권남용이라는 것으로 끝을 냅니다. 용을 그리려다가 뱀도 제대로 그리지 못한 것입니다.”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도 비슷한 주장을 이어갔다. 뒤이어 발언에 나선 박 전 처장은 9분 동안 미리 작성해온 글을 굳은 표정으로 읽어내려갔다. “수사 결과로 제시된 공소장에는 알맹이 있는 실체보다는 기껏 부적절한 보고서가 작성됐다는 게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재판거래니 사법농단이니 말 잔치만 무성했던 한바탕 소용돌이에 휘말려 속수무책으로 떠밀려온 현실에 대해 어찌 통한이 없겠습니까.”
법원행정처, 재판연구관실 넘나든 문건들
사법부 서열 1·2위였던 전직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들의 첫 재판이 이날 시작하면서 ‘사법농단’의 진실을 다투는 사상 초유의 재판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섰다. 검찰은 이들이 직무상 권한을 남용해 법원행정처 심의관들로 하여금 재판 독립을 침해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그 내용을 문건으로 작성하게 했다고, 또한 그 문건이 담당 재판부에 전달돼 재판 진행 혹은 결론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형법 123조) 혐의가 적용됐다. 그러나 양 전 대법원장을 비롯한 세 피고인은 그저 ‘부적절한’ 문건이 작성됐을 뿐 재판 개입이나 거래는 없었다고 맞선다. 직권남용이라는 범죄를 완전히 성립하지 못했다는 취지다. 이들이 문건, 보고서 등의 단어 앞에 ‘겨우’, ‘기껏’이라는 수사를 붙였던 이유다.
양 전 대법원장과 박·고 전 처장이 언급한 ‘문건’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내부 문서를 말한다. 지난해 법원의 세 차례 자체 조사를 통해 외부로 공개됐는데, 그 개수만 400개가 넘는다. 사법부가 특정 재판을 청와대와의 흥정 대상으로 삼거나 특정 방향으로 개입을 도모한 흔적들이 담겼다. 가장 앞서 시작된 임종헌(60) 전 법원행정처 차장 재판에서는 이 문건들이 어떤 이유로 누구에 의해 만들어져서 어디로 전달됐는지, 작성자, 전달자, 목격자였던 전·현직 판사들을 증인으로 불러 묻는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지난달 30일에는 홍승면 서울고법 부장판사(2013년 2월~2016년 2월 당시 대법원 선임·수석재판연구관)에 대한 증인신문이 진행됐다.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전국교원노동조합 법외노조 통보처분 사건에 관한 문건이 제시됐고, 그 문건이 첨부된 홍 부장판사의 이메일도 공개됐다.
당시 법원행정처 관계자와 수석·선임재판연구관은 대법원 식당에서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 정도 식사를 했다고 한다. 2013년 8~9월께 임 전 차장은 그 자리에서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에 대해 외교부가 의견서를 내고 싶어한다”, “외교부에 ‘절차적 만족감’을 줄 필요가 있다”는 취지로 말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홍 부장판사는 “외교부가 2012년 판결을 부정적으로 보는구나” 생각했다고 법정에서 증언했다. 2013년 9월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이 작성한 ‘강제노동자 판결 관련-외교부와의 관계(대외비)’ 문건에는 이 같은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해당 문건은 일부 수정돼 대법원 민사총괄재판연구관에게 전달됐다.
이같은 문건은 법원행정처와 대법원 재판연구관실을 제한 없이 넘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2015년 1월 유해용 선임재판연구관이 홍승면 수석재판연구관에게 보낸 이메일을 보자. “존경하는 수석부장님께. 형님, 조금 전에 처장(박병대 당시 처장)님께 교원노조법 위헌 문제와 관련해 첨부파일과 같이 보고 드렸으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거꾸로 같은 해 2월 법원행정처에서 작성한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재판 검토 문건이 임종헌 전 차장으로부터 홍승면 당시 수석재판연구관을 거쳐 유해용 당시 선임재판연구관에게 이메일로 전달되기도 했다. 이메일에 첨부된 문건에는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1·2심을 정리한 표,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판단의 핵심인 교원노조법 2조의 위헌 여부를 검토한 내용이 담겼다. 법원행정처와 재판연구관실이 서로의 시각이나 판단 근거 등을 ‘문건’이라는 형태로 자유롭게 주고받은 셈이다.
홍 부장판사는 “강제징용, 국정원, 전교조 사건 모두 공정하게 법리 검토해 보고했다. 특정인의 요구나 지시에 의해 왜곡되지 않았다”, “검찰에 확보된 이메일이나 파일에 행정처 요청이 보고서에 반영돼 있음을 의심할 만한 내용은 한 줄도 없다”고 밝혔다.
법원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이나 두 전 처장은 법원행정처가 특정 결론을 요구하고, 그에 따라 담당 재판부 생각과는 다른 결론을 내리는 것만을 재판거래, 재판 개입으로 보는 듯하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사법부는 이미 스스로 다른 답을 구한 바 있다. 2009년 신영철 대법관이 서울중앙지방법원장 시절 촛불시위 관련 재판에 부당하게 개입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논란이 됐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대법관으로 있을 때다. 당시 판사들은 전국법관워크숍, 판사회의를 열고 법원장의 권한은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재판 개입이란 무엇인지 그 기준을 세우려 애썼다. 비슷한 사태가 또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머리를 맞댄 것이다. 당시 법원 내 제도개선티에프팀(TFT)이 만든 <법관의 독립 침해 사례, 기준, 대응방안> 보고서에는 그 고민의 흔적이 담겨있다.
<한겨레> 취재결과를 종합하면, 보고서는 소제목 ‘재판관여로 보는 경우’ 대목에서 이렇게 적었다. “재판의 내용이나 절차 진행에 대해 직·간접으로 구체적인 지시를 하거나 특정한 방향이나 방법으로 직무를 처리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직무 감독권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러면서 ‘재판관여’를 이렇게 정의했다. “심리나 사건 숙성 정도에 상관없이 무조건 일정기한 안에 판결을 선고하라고 한 행위, 특정 사건의 판결 선고를 연기하거나 재기하도록 한 행위, 특정 사건을 다른 사건에 앞서 먼저 처리하거나 처리를 미루라고 하는 행위.” 재판 결론뿐 아니라 재판 진행에 영향을 끼치는 행위 모두를 재판관여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2009년 당시 보고서에 따르면 재판 결론이 뒤바뀌었다는 것까지 굳이 증명하지 않더라도, 조언·암시·권유 등 간접적인 방법을 동원해 특정 결론을 유도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재판관여’는 일어난 셈이 된다. 그 정황을 뒷받침하는 것이 문건이다. 한 판사는 “어떤 형태든 문건을 전달받은 일선 판사는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 자체가 재판관여이고 개입이다. 사법행정권이 적절히 행사될 수 있도록 내부 통제 장치를 갖추려 노력한 건데, 그 노력을 무색하게 만드는 문건을 ‘겨우’, ‘기껏’이라 표현하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짚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